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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날들_[필멸]Til death do us part(1)


Til death do us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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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당신을 반려자로 맞아,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til death do us part), 사랑하고 아낄 것을 신의 거룩한 법에 따라 신 앞에서 엄숙히 서약합니다.>

-Church of England 성혼 서약문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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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무리에요.”

 “이제 와 딴소리하지 말고 당장 옆에 안 붙어?”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

 “넌 언제쯤에나 네 소장님 제대로 믿어볼래?”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언성이 높아졌고 필은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만 다행히도 다른 사람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직은 아무도 이 말다툼을 듣지 못한 듯했다. 필은 최대한 상냥한 표정(물론 멸에게는 여느 맹수를 방불케 하는 아주 무시무시한 얼굴이었고)을 짓고서는 집에 가기 싫어 버티는 산책 나온 강아지를 달래듯 말했다. 이 경우는 반대의 경우에 속하긴 했지만.

 “이리와.” 

 “싫어요. 안 통할 것 같다고요!”

 “여기까지 와서 할 소리야? 이미 각 잡고 옷까지 갖춰 입은 상태로?”

 필이 격식 있게 차려입은 멸의 푸른색 연미복을 가리키며 말을 뱉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검은 턱시도를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이 두 벌에 돈깨나 썼거든? 멸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망할 고집쟁이. 다 알고 왔으면서 왜 새삼스럽게 불편해 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장님도 생각해보세요.”

 “대체 뭘?”

 멸이 눈에 힘을 주고는 단호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우리의 어디가 부부로 보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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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다페스트 호텔 다음주 화요일 저녁 7시. 시간 엄수.]

 통신상의 의뢰인은 얼굴을 가린 채 음성변조를 통해서만 이야기했다. 필은 수상쩍은 사람을 대할 때 으레 그렇듯이 신뢰를 요구했고, 의뢰인은 즉답했다. 저는 안 믿어도 제 돈은 믿으시겠죠. 당장 계좌 확인해요. 필은 돈에 대해서는 급할 게 없는 사람이었고, 의뢰인이 다짜고짜 그 말을 뱉었을 때도 꽤 침착했다. 이렇게까지 으름장을 놓을 정도면 적은 돈은 아니겠군? 여유로운 표정으로 금액을 확인하자마자 예상이 다른 의미로 빗나갔음을 깨달았지만. 액수가 필의 추정 범위보다 지나치게 컸다. 굳이 이렇게 많은 돈을?

 [저는 신분이 알려지면 곤란한 처지니, 비밀 보장 대금으로도 생각하시길.]

 “어디 높은 분 자제라도 되십니까? 아니면 높은 분 본인?”

 [대충 그렇다고 해둡시다. 구체적으로 대답할 의무는 없고. 지불되는 건 깨끗하고 합법적인 돈인 것만 알아둬요. 켕길 거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신분 정도는 보장해주셔야….”

 [좋아요. 지금 보낸 그게 착수금이에요. 성공 시 의뢰비는 따로 계산하죠. 착수금보다 적진 않을 겁니다.]

 “…흠. 나쁘지 않군요. 딜.”

 [회원증은 제가 위조해둘 테니 나머지 방법은 알아서 찾으세요.]

 “그 정도야 뭐.”

 “누구예요? 의뢰인?”

 뚝, 하고 통신이 끊기는 순간 사무실로 멸이 성큼 들어섰다. 늘 입는 트레이닝복 바지에 하얀 털을 다닥다닥 묻힌 채였다. 아침부터 또 산책하는 개라도 만난 모양이었다. 사무실에 털 달고 들어오지 말라고 그렇게나 얘기했는데. 필은 흩날리는 개털에 관한 주의사항을 재차 강조하는 대신, 멸이 신나서 관심도 없는 견종을 줄줄 외며 오늘 만난 개를 자랑하기 전에 바로 업무에 들어가기로 했다.

 “너, 나랑 결혼해야 돼.”

 “네…. 네?”

 충격을 받다 못해 얼이 빠지고 눈의 초점이 나간 둥근 얼굴을 향해 한 치도 무를 수 없다는 듯 확고하게 끊어낸 말이 떨어진다.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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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끌려온 이후 멸은 내내 경멸이 서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은 급기야 짜증을 냈다. 뭐가 문제야. 

 “모든 것이요.”

 “나라고 딱히 재밌어서 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

 “아주 재밌어서 못 견디시는 것처럼 보이시는데요.”

 “어머. 여기서 싸우시면 안 되죠. 신혼이라 기운들이 넘쳐서 그런가?”

 하여간 젊은 사람들이 혈기왕성하다니까. 치수를 재고 있던 중년의 직원이 사이에 끼어든 덕에 두 사람은 잠시 휴전했다. 저희 부부 아니에요, 라는 멸의 응수가 나오기 직전 눈빛으로 그것을 막아낸 필은 예의 그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조각 같은 미소를 본 직원이 활짝 웃고는 말했다.

“원래 사람은 반대일 때 더 싸우면서도 끌린다는데 딱 그런 커플인가 보네요. 뭐, 결혼 준비하러 와서 싸우는 예비부부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에요. 꽤 흔하거든요. 그 자리에서 파혼까지 가는 경우도 있고.”

 두 분은 그러지 않길 바라요. 넉살 좋게 웃던 직원이 다른 디자인의 정장을 가지러 간 사이 설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상대가 저일 필요는 없잖아요.”

 물건을 빼돌려달라는 의뢰였다. 주로 고위 인사들이 모이는 상류층 사교 클럽에서 표적이 끼고 있는 결혼반지 하나를. 이거 도둑질 아니에요? 이런 일도 해요? 묻는 말은 한마디에 묵살되었다. 가격만 맞으면 하지. 사람 하나 묻어달라는 의뢰에 비하면야 윤리적이지 않아? 문제는 사교 클럽의 요구 조건이었다. 비공개 회원제. 거기다가.

 “부부 동반의 상대요.”

 “너일 필요는 없지만, 너인 게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지. 기정사실 엎으려 들지 마.”

 “마틸다 씨나 바나쳇 씨도 있는데….”

 “얼씨구? 걔들이 퍽이나 나랑 부부인 척해주겠다?”

 멸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답이 없었다. 이내 머뭇거리며 다음 질문이 나왔다. 아니면 전에, 아샤 씨랑 칼 씨한테 부탁해도 되지 않나요? 그 사람들은 이미 부부니까. 필은 콧방귀를 끼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 과거 클라이언트지 동료도 아니야. 말이 되는 소릴.” 

 실은 필도 좀 지나치다 싶었다. 무슨 놈의 사교 클럽이 부부 동반만 가능하다는 거야? 부부끼리 가서 무슨 재미를 보는데? 하지만 거절하기엔 착수금이 지나치게 좋았다. 그래서 더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어찌 되었든 맡은 일을 무르면 완수율에 문제가 생긴다. 닥터 노스가 얼마 전 요구한 연구비를 생각하면 충분히 수지타산이 맞기도 했고. 의뢰인이 준비해둔 사교 클럽 회원 정보에 맞춰 입장하기만 하면 된다. 시간 엄수. 필은 그 대목을 특히 유의했다. 보통 이런 곳은 상대가 누구건 간에 규칙 하나라도 따르지 못하면 아웃이다. 주의 사항 생각할 시간만으로도 빠듯한데, 멸이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일을 전부 받아주기는 힘들었다.

 “아니면 대역이라도.”

 “너 아까부터 왜 그렇게 예민해.”

 “소장님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결혼이 장난도 아니고….”

 “네가 이깟 세속 놀음에 그 정도의 무게를 둘 줄은 몰랐는데.”

 뜻밖에 싸늘한 말이 떨어져 멸은 그 냉정함에 발끈했다. 필은 영업용 미소를 걷어낸 채, 지극히 평온하다 못해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열성적인 건 소장님 아니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아까부터 뭘 이렇게 열심히 골라요? 어차피 위장하는 건데.”

 “비즈니스니까. 난 허투루 사업 안 해. 나랑 계속 일할 거면 너도 기억해둬.”

 단답형으로 이어진 대답 끝에 부연이 붙었다. 낄 반지 디자인이나 골라놔. 자리가 자리인 만큼 싸구려는 안 돼. 너무 화려하지는 않은 거로. 필이 조용히 손목의 커프스를 풀었다. 멸은 그 온도 차에 놀랐다. 연미복을 맞추고 결혼반지를 고민하고 서류를 위조하는 데에 그 많은 시간을 들여놓고서도, 그 모든 일을 불필요한 세속적 행위로 일축하고 냉담하게 대하는 온도 차에.

 “어차피 다 허울이야.”

 멸의 얼굴을 보고선 필이 뒤늦게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의미가 있어?

 “필멸자들의 시대에 존재했던 영원의 맹세 같은 건 지금 와서는 모두 무의미해.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좋거나 나쁘거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멸도 그것을 알았다. 신랑과 신부, 혹은 신랑과 신랑, 신부와 신부가 하는 혼인 맹세에(결혼에 성별 따위를 따지는 일은 이미 200년은 뒤처진 구시대의 고리타분한 악습이었고) 이제 죽음을, 각자의 끝을 거는 말은 들어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언어의 유통기한이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살아내는 억겁의 시간만큼 서로에게 질리거나 지친 사람들의 이혼도 만만치 않게 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은 아샤와 칼의 결혼을 생각했다. 진심으로 서로를 아끼는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하여. 끈질기게 서로를 놓지 않을, 그 흔하지 않은 불멸성의 맹세와 사랑하는 이들 간의 내밀한 언어로 이야기되던 다정한 말들에 대하여. 필은 비웃을 것이다. 멸은 그렇지 않았다. 나도 마음을 나누고, 다정한 말로 위로받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평생 가지지 못할 언어, 평생 얻어내지 못할 무형의 결합이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죽음으로 서로 헤어지는 게 가능한 상대라면 단 한 사람 있기는 하지. 멸은 금방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몰아냈다. 필이 담담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부담 가지지 마. 그냥 흉내만 내.”

 “흉내요?”

 “내가 보여준 필멸자들의 영화에 나온 거든지, 아니면 네가 다른 데서 봤던 거든지. 뭐든 좋으니까 그런 척이라도 하라고.”

 지금 필요한 것은 애정의 모사(模寫)였다. 다정의 껍데기. 느껴본 적도 없는 감정의 허울. 애정을 나누는 척, 둘도 없는 사랑을 하는 척, 서로가 못 견디게 소중한 척, 절대로 잃을 수 없는 척…. 아니. 정정해야 했다. 마지막 말만큼은 굳이 그런 척을 하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둘은 절대 서로를 잃을 수 없다. 특히나 필이 그랬고. 지금으로선 같은 존재는 세상에 더 없으니까. 그것만큼은 연기하지 않아도. 이 모든 흉내 중에 그나마 하나라도 진심이 있다는 게 다행일까. 

 “최선을 다해 연기하면 다들 속아 넘어가겠지. 혹시 몰라? 자기들도 그냥 어디서 본대로 따라 하는 걸지.”

 “완전 부정적이시네요.”

 “왜? 여기 오는 커플의 6할 정도는 사랑의 확신 없이 결혼할 거야. 자기 감정을 착각하는 멍청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놀랄걸.”

 소장님도 그런 적 있어요? 물으려던 말은 천천히 가라앉아 사라져갔다. 그의 말이 맞다. 다 의미 없는 짓이다. 이 질문조차도. 그래도 멸은 자신이 절대 가질 수 없을 결혼이라는 행위의 무게감을 한낱 세속적인 역할극으로 치부하는 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거지로 끌려온 상황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본격적일 필요가 없는데. 

 그러나 이 독불장군 앞에서 불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멸은 소심하게 반항 아닌 반항을 하며 따라다니다 기어코 화요일 오후 6시 30분에 끌려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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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시 45분. 데드라인은 7시였다. 호텔 뒤 주차장에서 이어진 15분의 설전이 아니었다면 진작 6시 30분에 입장해 정황을 살피고 표적을 찍어뒀을 터이다. 내내 소극적으로 저항하더니 이 순간을 위한 포석이었군. 골치를 앓으면서도 필은 한 번 더 설득해보기로 했다. 

 “말했잖아. 흉내만 내라고.”

 “잘 해낼 자신이 없어요. 소장님하고 그렇고 그런 척을 할 자신이….”

 멸이 진심으로 소름 돋아 하는 것에 필은 약간 울컥했다. 이게 진짜. 더는 안 되겠어. 결국, 비장의 카드가 나왔다. 

 “이 일 자체로 상여금 200% 쳐준다.” 

 움찔. 필은 상대가 흔들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여기 참석하는 시간 야근 수당으로 넣어서 죄다 50% 추가로 쳐주고.”

 “……좋아요.”

 “아 좀. 진작 이럴 것이지.” 

 결국 할거면서. 돈은 언제나 히든카드였고 높은 확률로 잘 먹혔다. 멸은 머뭇머뭇하면서도 필에게 다가왔고, 필은 자연스럽게 멸의 허리를 감았다. 멸이 불편한 듯 쭈뼛거렸다.

 “저희 지금 지나치게 가까운데요.” 

 “가까워 보여야 맞는 거야. 토 달지 마.”

 “하지만….”

 “내내 이러고 있지 않을 거니까 입장할 때만 좀. 최소한 들어설 때는 남들 눈에 그럴싸하게 보여야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멸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결코 작지 않은 품 안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선 최대한 직접 닿는 면적을 줄이려 움츠러든다. 경직된 근육을 느낀 필이 천천히 허리를 감은 팔을 풀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여기에 네가 손 올려. 나는 너한테 손 안 댈 테니까.”

 필은 팔 한쪽을 굽혀 에스코트의 자세를 취했다. 멸이 제안에 살짝 놀란 기색을 비쳤다.  

 “왜 그렇게 봐?”

 “아니, 시간 없다고 그냥 끌고 가실 줄 알았는데.”

 배려해주실 줄 몰랐거든요. 필이 혀를 찼다. 내가 그렇게까지 막돼먹은 인간으로 보여? 다음 순간 멸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황급히 멈추는 것을 필은 예리한 눈으로 간파했다. 그 정도로까지 이 녀석 안에서 내 인상이 엉망인가? 눈썹을 찌푸리고 있자 내민 팔 위에 멸이 아주, 아주 살포시 손가락을 올렸다. 

 “그렇게 소심하게 잡지 말고 좀 편하게 잡아. 그 상태로는 신혼은커녕 별거 3년 차로 보일걸.”

 “익숙하지 않단 말이에요.”

 그거야 훤히 알고 있다. 얼마나 사람의 접촉을 꺼리는지, 상처 하나 봐주는 것도 싫어했었으니까. 필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제법 진중한 눈으로 멸을 바라보았다.

 “닿는 게 싫으면 안 해도 돼. 강요할 생각 없고,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비비는 역겨운 짓 안 해. 적어도 남들 보기에 자연스럽게만 보이자는 거야. 원한다면 네 방식대로 해.”

 “제 방식이요?”

 “네가 반려자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방식.”

 멸의 눈이 까무룩 의식의 저편으로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찌나 골똘히 생각을 하는지 여기까지 팽팽하게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짧은 침묵 끝에 대답이 나왔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없어?”

 “말씀드렸잖아요.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자체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봐. 기왕이면 10분 이내로. 7시 전엔 입장해야 되니까.”

 “그러라고 하셔도….”

 정말로 떠오르는 게 없는걸요. 이리 말하며 멸은 제 경계선에 대해서 생각했다. 주변에 동그랗게 쳐두고서 아무도 들여 보지 않은 그 선을.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고독에 질식시키려 만들어진 하얀 원형. 그것은 목숨의 문제였고 제 손에 들린 모든 것에 관한 문제였다. 들키지 마. 아예 아무도 들이지 마. 이 선 안에 서는 건 나 혼자여야 돼. 그런 말 하나하나가 고집스레 쌓여서 만들어진 견고한 울타리. 원을 그리는 단어 하나하나가 춤을 추듯 떨었다. 반려가 생기면 무엇을 하고 싶었느냐고? 일생에서 고려해보지 않은 문제의 답을 눈앞의 남자가 요구한다.  

 “그러는 소장님은…. 반려자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게 그거에요?”

 “뭐?”

 “방금 저한테 하신 거요.” 

 “다정한 척 감싸 안고 속닥대는 거? 말했잖아. 그냥 흉내 내는 거야. 나도 별로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그냥 흉내만 내. 필멸자들의 영화에 나온 거든지, 아니면 네가 다른 데서 봤던 거든지. 연미복을 맞출 때 그가 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말한 사람 치고 필의 행동은 대단히 자연스러웠다. 단순히 흉내를 내는 것이라면 그는 대단한 모사꾼이자 배우인 셈이었다. 

 한편으로 멸은 필의 말에 안도했다. 그 필이, 모든 문제에 해결법을 가지고 있을 법한 사람이 자기도 이것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한다. 그도 자신과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유한성은 타인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가둔다. 새어나가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니까. 아무에게나 말할 수는 없어. 누구도 믿을 수 없다면 결국엔. 

 필에게도 같은 울타리가 있다. 자신이 쌓아 올린 것과 같은 종류의, 불멸자라면 가질 수 있었으나 필멸의 생을 타고 나면서 기어코 무너져버린 가능성의 잔해들로 쌓은 울타리. 반려는커녕 마음을 터놓을 사람조차 없는 고독을 이 사람은 알고 있다. 

 멸은 이 남자가 방금 보인 배려를 떠올렸다. 접촉을 꺼리는 자신을 위해 굳이 맞춰주려는 태도. 그 외에도 자신이 지난 몇 주간 받아온, 친절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지 궁금한 사람이 보여준 뜻밖의 사소한 베품들. 그 작은 행위 하나하나가 멸의 기저에 심어진 호감의 씨앗이 되어 하나둘씩 박혀있었다. 침묵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는지 필이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상대가 나라서 싫은 건 알겠는데….”

 “저 그렇게까지 소장님 안 싫어해요.”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갔고 필은 잠시나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대조차 않았던 대답에 갑자기 찬물을 맞은 사람의 얼굴. 멸조차도 제가 내뱉고 놀란 나머지 말을 잊은 통에 잠시간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필은 분위기를 수습하려 운을 뗐다. 

 “아까는 나랑 부부 흉내 낼 자신 없다며?”

 “그거랑은 또 별개죠. 그나저나 5분 남았네요.”

 멋쩍게 제 뒷머리를 한 번 만지고는, 멸이 천천히 손을 뻗어왔다. 사전에 맞춘, 단순한 디자인의 위장용 결혼반지를 낀 손이었다. 필은 그 손이 가죽장갑을 낀 자신의 손에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겹쳐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체온으로 느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손이 완전히 맞닿았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뭐야. 이게 반려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거야? 기껏 손잡는 거?”

 “방금 생각해낸 거니까 빈정대지 마세요.”

 멸의 얼굴이 천천히 붉어지더니 곧 귀 끝과 목까지 달아올랐다. 필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깍지를 꼈다. 멸은 움칫거리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두 손의 손가락이 좀 더 긴밀하게 얽히고 자세가 좀 더 편안해졌다. 필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고 멸을 호텔의 입구로 이끌며 말했다.

 “잡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멸은 제가 쌓은 저지선의 한구석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들었음에도 모른 척했다.

 6시 59분, 두 사람은 호텔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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