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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날들_[필멸]Til death do us part(2)

 

Til death do us part (2)



“홀은 이쪽입니다.”

 프런트의 직원은 절차대로 신분을 확인한 뒤 기계적인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사교 클럽의 모임 장소로 안내했다. 멸은 손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필의 눈치를 살폈다. 그걸 느낀 필이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너무 아프지는 않게, 그렇다고 잡은 손을 놓치지도 않게. 

 그 작은 행위에 멸은 단단히 뭉쳐 등을 내달리던 초조함이 조금이나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복도 끝으로 가자 세로로 긴 문이 드러났다. 직원이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문을 열자 복층으로 구성된 넓은 공간과 그 안에서 각자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제법 많은 수의 사람이 보였다. 짧은 순간 주위를 둘러본 필이 휘유, 하고 옆에서 낮은 휘파람을 울렸다.

 “왜요?”

 “11시 방향 하얀 정장에 곱슬머리. 그리고 7시 방향 갈색 단발에 검은색 롱드레스.”

 “보여요.”

 “흰 정장은 정계 장관 후보 중 하나야. 단발은 유력 계열사를 3개 정도 보유한 재계 거물. 각각 옆에 있는 게 자기 파트너군. 쟁쟁한데. 상류층 모임이라더니 거짓말은 아니었어.”

 멸에게는 생소한 얼굴들이었다. 소장님은 꽤 잘 아시네요. 묻는 말에 당연하다는 듯한 답이 돌아왔다. 그야 종종 저런 거물들이 간접적으로라도 클라이언트로 들어오니까. 몰가 코퍼레이션 때처럼. 필은 최고의 완수율을 가지고 있는 해결사였고 그것은 윗선과의 접촉이 자연스럽게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그럼 이전 클라이언트 중에 혹시 소장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요?"

"혹여나 알아봐도 모른 척할걸. 자기네들이 한 의뢰 내용을 생각하면 그게 낫거든." 

 의미심장한 말에 멸은 침을 삼켰다. 무슨 의뢰였는지는 물어보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뉴스 등을 통해 잘 알려진 얼굴을 몇 명 더 알아본 뒤(개중에는 유명인이라 멸도 모를 수가 없는 사람도 끼어 있었다), 필이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표적을 추려냈다. 정면, 머리 넘기고 자주색 정장 입은 남자. 풍채가 좋은 중년의 사내는 잔을 하나 든 채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왼손 약지에 목표물이 보였다. 아무런 장식 없는 단순한 디자인의 반지. 의뢰인이 회수해달라고 한 문제의 물건. 근데 저걸 어떻게 확보하죠? 일단 상황을 봐야지. 방법이야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너는 이 소장님만 믿어.” 

 입구에 선 채 낮게 속삭이던 두 사람 사이로 직원 하나가 다가왔다.

 “신규 등록이시죠?”

 이걸 착용해주세요. 단조롭게 이니셜만이 박혀있는 회색의 작은 이름표가 주어졌다. P, M. 의뢰인이 어떤 가명으로 등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의 본명에 가까운 이름을 쓴 모양이었다. 필은 멸 몫의 명찰까지 넘겨받은 뒤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그것을 직접 멸의 연미복 왼쪽 가슴에 달아주었다. 멸이 작은 소리로 항의했다.

 “제가 달 수 있는데요.”

 “이래야 더 다정해 보이잖아.”

 잊었어? 우린 부부야. 회유하듯 구슬리는 말이 뒤따랐다. 필은 자신의 무기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멸을 향해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멸은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대패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닭살 좀 밀어버리게. 필이 지금처럼 짓는 지나치게 반짝이는 표정은 즐거움이나 사랑의 환희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 몸의 색을 바꾸는 파충류처럼 사냥감을 찾는 맹수의 위장이라는 걸 멸은 지나치게 잘 알았다. 되려 그 미소에 넘어간 것은 멸이 아니라 명찰을 건넨 직원 쪽이었다. 넋이 나간 듯 필을 바라보던 직원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혹시 샴페인은 필요하신가요?”

 “아니오. 아직 마시고 싶은 기분은 아니군요.”

 “나중에라도 음료가 필요하시다면 안쪽에 바(Bar)가 마련되어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직원이 아무 말 없이 카드를 하나 내밀었다. 명함과 비슷한 크기의, 검은색의 종이 한가운데에 금색의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물건이었다.

 “원하신다면 홀을 나가서 왼쪽, 3번 방입니다.”

 “호오.”

 직원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필의 얼굴을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이 카드는 대체 뭘까요? 멸의 질문에 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유지한 채로 답했다. 짚이는 게 있어.

 “짚이는 거요?”

 “한 번쯤 확인해서 나쁠 건 없….”

 “여긴 처음이신가요?”

 왜 이렇게들 귀찮게 해? 필은 짜증이 샘솟으려는 것을 프로의 자세로 억누르고는 접근해온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L, O. 명찰 색이 자신들의 것과는 다른 하얀색이었다. 보통 이런 데선 이게 등급으로 쓰이니까, 상대는 VIP인가? 이런저런 경험으로 추론하던 찰나 L이라는 명찰을 단 쪽이 필의 가슴에 달린 이니셜을 읽고는 먼저 운을 뗐다.

 “P는 뭐죠? 피터?”

 “맞춰보시죠.”

 “재밌으신 분이네요. 그쪽 파트너가 많이 긴장하신 것 같은데.”

 “말씀대로 처음이라서요.”

 멸을 지칭하는 것에 필은 다소 예민하게 반응했다. 어딜 수작질이야. 평소 성격 같았으면 급소라도 한 대 쳤을 것을, 필은 다시금 만면에 미소를 띠며 웃음으로 받아냈다. 일이 끝나면 얼굴 근육이 저리게 생겼군. 속으로 투덜대는 것을 간파라도 한 것인지 말을 걸어온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오해라는 듯 손을 저었다.

 “걱정하지 마시길. 우리가 신규 회원 담당이거든요. 보통 여성분들이면 여성 담당원이, 혼성이면 혼성 담당원이 오죠.”

 그쪽은 남성 두 분이시니까 우리가 왔어요. 남자가 멸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멸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손을 마주 내밀었다. 굳은 손끝을 본 필이 멸의 손이 남자에게 닿기도 전 선수를 쳐 제 손을 내밀어 남자의 악수를 받아냈다.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O’ 명찰을 단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독점욕이 딱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죠. 그러다 자기 파트너에게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다 큰 성인을 아이 취급하지 마세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쓸데없는 참견이군. 게다가 집착이라면 이미 하고 있었다. 도청, 미행, 언제나 확인하고 있는 신체의 안위. 이것도 집착이라면 집착이지. 필은 순수하게 좋은 의도에서 기인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딱히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멸이 알게 되면 곤란하기야 하겠지만. 남자의 손을 놓으며 필은 곁눈질로 멸의 눈치를 살폈다. 멸은 멋쩍어하면서도 남자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내고 있었다.

 딱히 아이 취급하는 게 아니다. 녀석이 나이가 몇인데. 애초에 그의 체질이 아니었다면 걱정할 일도 없었겠지. 엮이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바실을 위한 총알받이로 쓰고 끝났을 테니까. 어차피 죽지도 않는데 뭐가 문제야? 그렇게 생각하고 그곳을 떠났을 터이다. 이내 잊었겠지. 멸이라는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그 가정만으로도 스멀스멀 불쾌함이 몰려왔다. 그 가설은 이 불멸하는 괴물들의 숲에 자신이 여전히 혼자였을 수도 있다는 뜻과 동일했다. 그딴 건 끔찍할 정도로 지긋지긋해. 필은 살며시 입 안쪽의 살을 한 번 물고는 다시 미소 지었다. 남자는 집요하게 말을 걸었다.

 “그냥 얘기만 좀 하자는 거예요. 여기에 익숙해지는 거 도와드릴게요. 안 잡아먹습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실례하죠. 저희가 신혼이라 방해받는 게 싫어서요. 한창때잖습니까.”

 이럴 시간이 없어. 필은 더는 질질 끌지 않고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낸 뒤 멸을 구석으로 이끌었다. 조명이 잘 들지 않고 눈이 닿지 않는, 복층 테라스 아래쪽으로. 차라리 후드를 쓸 수 있다면 나았을 텐데. 이동하는 와중에도 여기저기서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이것 참. 이 짓도 질리지는 않지만 일할 땐 짜증 난단 말이지. 기둥의 뒤쪽으로 들어서자 필은 바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내고 냉담한 관찰자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괜찮을까요?”

 “뭐가?”

 “혹시 저 사람들이 우리를 의심해서 그런 건 아닌가 싶어서….”

 “우리 신분은 의뢰인이 전적으로 보장해놨어. 그러지 않았으면 통과 자체가 안 되었겠지. 설령 의심했더래도 벌써 들켰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며 필이 불시에 멸을 향해 바싹 붙어 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낮은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조금만 참아. 실례하자.”

 필이 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붉은 기가 도는 얇은 회색의 머리카락이 이마와 관자놀이를 간질여 왔다. 아. 또 지나치게 가까워. 그렇게 생각했지만 멸은 그 접근을 피하지 않았다. 귓가에 날숨이 닿는 것이 간지러워 살짝 몸을 움츠리면서도. 필이 다가온 직후에 뒤쪽으로 표적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기웃대던 명찰을 단 남자들이 두 사람이 붙어있는 것을 지켜보다 떠나는 것도.

 “방해받기 싫다고 굳이 말해놨으니 이제 집적대진 않겠지.”

 남들이 보기엔 구석진 곳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커플로 보일 거야. 어차피 부부 동반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필은 무리하게 몸을 붙여오진 않았다. 가깝지만, 최소한의 영역을 남기면서. 필이 조금 더 고개를 숙였고 호흡이 아슬아슬하게 맞닿는 순간 근처에서 여럿의 사람이 웃으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이번 슬로건은….”

“그 건에 대해서는 맡겨주시면….”

“홍보는 누가….”

 띄엄띄엄 들려오는 대화 속에 표적이 있었다. 그것도 꽤 가까이. 목표물인 반지가 여전히 왼손에서 빛났다. 멸은 제 앞에 다가온 회색 머리칼을 향해 말을 걸었다. 

“확실하게 생각해둔 건 있으세요?”

“일단은 동선을 파악하자고.”

 그렇게 말하면서 필은 표적을 곁눈질했다. 어두운 구석으로 기어드는 샹들리에의 빛이 필의 눈 위를 기민하게 흘러갔고, 멸은 빛을 받은 필의 눈이 제 생각보다 더 붉은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점이 너무나도 묘했다. 그렇게나 진한 색을 하고서도 딱히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붉은색, 오히려 무채색의 인상을 지니고 있는 붉은색이었다. 그 눈이 표적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강렬한 원색을 되찾는 것에 멸은 다소 놀랐다. 착각이겠지. 역시 너무 가까운 거야. 맞닿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 중인 다부진 장신의 몸을 인식하자 저도 모르게 목 뒤가 달아올랐다. 척추를 타고 홧홧하게 올라오는 열기가 뻐근했다. 멸은 손을 올려 목을 주물렀다.

 “왜. 어디 안 좋아?”

 “약간 긴장돼서요.”

 “혹시 어지러워도 여기선 쓰러지지 마. 이목 집중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서는 멸의 시야에 보이도록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허락을 구하는 시선이 닿았다. 만져도 돼? 적갈색의 눈에 담긴 질문에 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이 떨어지자 약간 서늘하게 느껴지는 가죽장갑의 끝이 이마에 톡, 하고 올려졌다. 가죽을 관리하는 데 쓰이는 광택제의 약한 냄새가 필이 평소에 사용하는 스킨의 냄새와 섞여 코끝에서 가물거렸다.

 “열이 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아프진 않은데요.”

 손가락이 물러갔지만, 그대로 끝은 아니었다. 이내 필이 상처가 없는 왼손의 장갑을 벗곤 멸의 얼굴에 손 전체를 조심스레 가져다 댔다. 약지에 결혼반지가, 멸이 낀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얇은 반지가 끼워진 손이었다.

 그 손이 영락없이 제 파트너를 염려하는 연인의 태도로 이마를 거쳐 뺨을 어루만지는 것에 멸은 다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반지가 지닌 금속성의 차가움이 피부를 간질였다. 단단한 엄지가 눈가를 어루만지고, 뺨을 덮고도 남은 손가락이 목 근처에 놓였다. 역시 약간 있는 것 같은데, 열…. 반사적으로 돌아가는 멸의 고개를 필이 약간 힘을 주어 자신의 쪽으로 고정시켰다. 쉿. 여기 집중해.

 “그리고 괜히 표적한테 눈길 주지 마.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곤란하니까.”

 “소장님.”

 “근데 너 부정맥 있어?”

 목 근처에 있던 손가락이 맥을 짚는 것이 느껴졌다. 멸도 제 맥박을, 그리고 그 맥의 끝에 아슬하게 올라와있는 맨살을 느꼈다. 굳은살이 박여있는, 저에게 닿을 때만은 뜻밖에 섬세한 손가락. 쿵, 쿵, 쿵.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멸은 단호하게 한 글자 한 글자 끊어내 내뱉었다.

 “소, 장, 님.”

 그제야 필이 작게 혀 차는 소리를 내며 조심스레 손을 거뒀다. 아차. 선을 넘었군. 이 녀석한테 미움 받을 생각은 없는데. 그 눈치를 읽어낸 듯 멸이 미간을 찌푸린 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좀 만지셔도 어쩔 수 없죠. 부부로 보여야 하는 거잖아요.”

 “얼굴에 싫다고 다 써놓고서 그렇게 말해봤자 설득력 없어. 어쨌든 방금 건 내가 지나쳤어.”

 그래도 계속 열나는 거 같으면 이번 일 끝나고 닥터 노스한테 가. 혈압 검사도 받고. 필은 그렇게 말하며 장갑을 다시 끼더니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바로 곁을 차지하던 묵직한 부피감이 떠나가자 기묘한 서운함과 제 공간을 되찾은 안도감이 동시에 스며들었다.

 “어디 가시게요?”

 “동선 파악한다고 그랬잖아. 방금 끝났어.”

 “표적은 계속 한자리에 있었는데요?”

 "누가 표적 동선을 본대? …그럼, 달링. 물론 해주고말고.”

 달링? 뜬금없이 내뱉어진 낯간지러운 애칭에 벙찐 멸에게 필이 능청스레 말했다.

 “그렇게 목이 마르면 말을 하지 그랬어. 여기서 기다려.”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킨 필이 표적을, 정확히는 표적의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직원을 향해 다가갔다. 은빛의 쟁반에 샴페인이 가득 담긴 잔을 든 직원이었다.

 “여기, 잔 하나만 좀….”

 필은 다소 경박해 보이는 태도를 가장하고서는, 직원을 부르며 그대로 부딪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샴페인이 표적을 향해 엎질러졌다.

 “이런, 죄송합니다.”

 잽싸게 손수건을 빼든 필이 타고난 얼굴을 십분 활용해 가녀리게(놀랍게도, 가녀리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자리에 있던 사람의 절반 이상이 그 얼굴에 넘어갔다. 아뇨, 괜찮아요. 파트너를 위해 잔을 가져오려다가 그랬다고요? 어쩜 상냥하기도 하셔라. 직원은 얼굴을 붉히고는 자신의 불찰이라며 수건을 가지러 떠났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멸은 내심 필에게 감탄했다. 대화하는 와중에도 계획을 짜고 계셨다니. 해결사는 해결사야. 멸은 필이 말한 대로 기다리면서 잠자코 거기 서서 표적의 반응을 살폈다. 필을 둘러싼 사람들 중 유일하게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게 그 사람이었다. 고급스러운 자주색 새틴 정장의 가슴께와 왼팔이 방금 필이 쏟은 샴페인에 젖어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주의했어야 했는데. 손까지 다 젖으셨군요.”

 남자는 대답 없이 필이 들고 있던 손수건을 빼앗았다. 오. 성격 있는데. 이 얼굴도 통하지 않고. 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유도하려 애썼다.

 “그대로 두면 반지가 상할 텐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싸늘한 시선이 꽂히더니 남자가 손에서 문제의 반지를 빼냈다. 빙고. 저걸 받아드는 척하면서 따로 갖고 있던 가짜랑 바꿔치기하면…. 계획은 남자가 손수건으로 반지를 대충 닦아내고 손가락에 다시 끼면서 무산되었다. 그래도 필은 포기하지 않았다.

 “화장실에라도 가셔서 닦으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대로 두면 끈적해질 겁니다. 도와드리죠. 표적은 차갑게 됐습니다. 라는 한 마디로 대화를 종료하고는 손수건을 필에게 던지듯 내밀곤 자리를 떴다. 자신을 그의 아내라고 소개한 중년의 여성이 필에게 러브콜을 했다.

 “저분이 좀 예민하신 데가 있어서. 이렇게 된 거 저희랑 합류하지 않으시겠어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안면이라도 틀 겸해서.”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필은 고갯짓으로 구석에 서 있는 멸을 가리켰다. 제 파트너를 혼자 두기가 좀 그렇네요.

 “같이 오셔도 되는데요.”

 “인상을 보시면 알겠지만, 제 남편은 수줍음이 좀 많아서요. 조금 더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곧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다리는 제가 놔드릴게요.”

 여성은 필에게 호감을 표시하곤 떠나갔다. 멸이 제 자리에 서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제게 되돌아오는 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줍음이요?”

 “왜? 네가 낯가리는 건 사실이잖아. 인정해.”

 “단순히 낯가리는 게 아니에요. 생존 본능 같은 거라고요.”

 “그게 경계하고 낯가리는 거지.”

 “그래서 나쁠 거 없잖아요. 적어도 저희한텐.”

 “나쁘다고 한 적 없는데? 목소리 조금 낮춰.”

 “…그래서 이젠 어떡하죠?”

 멸은 시근대면서도 소리를 낮췄다. 필이 주변을 의식하며 멸 쪽으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건 아니지. 플랜 B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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