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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날들_[필멸]Til death do us part(3)


 Til death do us part(3)

 


 복도를 울리는 자신의 구두 굽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홀에서 들려오는 가볍고 경쾌한 클래식 음악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윙윙 떠도는 것을 듣다가, 필은 조용히 '3'이라고 쓰인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멸은 데려오지 않고 남겨두었다. 플랜 B요? 저희한테 그런 게 있었나요? 필은 당황스럽다는 듯 묻던 둥그런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나 있지. 첫 번째로 내세운 최선책이 늘 먹히는 건 아니니까."

 "무슨 계획인지 저한테도 알려주셔야죠."

 "아직. 지금 짚이는 거 확인해서 맞으면 알려줄게."

 "하지만…."

 "너 나 믿잖아."

 설마 안 믿어? 떠보듯 묻는 말에 멸이 입술을 삐죽였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아랫입술을 꾹 눌러보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필은 답을 종용했다. 그래서 나 안 믿느냐고.

 "…믿는 거로 쳐요."

 "하여간에 쌀쌀맞게 굴기는."

 그리 말하면서도 목소리에는 섭섭함이 담겨있지 않았다. 애초에 마틸다나 바나쳇이 자신과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라고 주던 명함도 거절하지 않던 녀석이다. 오히려 믿는 걸로 치자는 반응이면 꽤 좋은 편이지. 당장은 그 정도로도 만족했다. 필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물었다.   

 "잠시만 혼자 있을 수 있어?"

 "얼마나요?"

 "오래 안 걸려. 금방 올게."

 "알겠어요."

 다른 데 가지 말고 꼭 여기에 있어. 몇 번이고 당부하며 필은 천천히 손을 뻗어 멸의 어깨를 가볍게 매만졌다. 혼자 둬도 될까? 호텔 한복판, 정계와 재계 거물들이 잔뜩 모여 있는 화려하고 밝은 곳이다. 유혈사태와는 거리가 멀지.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다. 자신이 준 팔찌도 있고. 멸도 환하고 사람이 많은 파티장에서라면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입을 힘 있게 닫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필은 그런 멸을 뒤로하고 홀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혹시 모르니 확인은 하고 들어갈까. 필은 문 앞에 서서 멸의 맥박을 한 번 체크했다. 대상의 맥박이 일정함. 생체 신호 이상 없음. 그럼 그렇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필은 입고 있던 턱시도의 매무새를 정갈하게 다듬었다. 원하신다면 홀을 나가서 왼쪽, 3번 방입니다. 알려주던 직원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문의 정면, 눈높이에 달려있던 경첩이 찰칵거렸다. 이윽고 상대의 얼굴만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창이 열렸다.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약한 조명 아래 어렴풋이 드러났다. 눈을 똑바로 보고서는 질문을 던지는 무표정한 남자. 무슨 일이시죠? 필은 가슴께에서 아까 받은 카드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검은색 바탕에 금색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명함 크기의 종이.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만."

 "……."

 남자가 말없이 창을 닫았다. 곧 철컥, 하고 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직원은 공손하게 묵례하곤 필이 들어올 수 있게 비켜섰다. 필은 안쪽 문의 모양새를 눈여겨보았다. 전자식? 작정하고 덤비면 따기 어렵진 않겠군. 

 천장이 높은 방은 꽤 호화롭고 넓었다. 스위트룸 중 하나를 개조한 모양새였다. 펼쳐진 광경은 짐작대로. 역시나. 높으신 분들 어울리는데 이게 없으면 서운하지. 이전에 맡았던 상류층을 상대하는 의뢰에서도 이런 곳은 어디나 하나쯤 있기 마련이었다. 맞아떨어진 예상에 쾌재를 울리며 필은 슬며시 눈을 굴려 바닥이나 소파, 침대에 널브러진 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잔뜩 몽롱해져선 의식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눈들. 알 수 없는 소리를 되는대로 읊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나체로 뒤엉켜 지분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지휘하듯 손을 휘저으며 들떠있는 여자, 영문 모를 눈물을 흘리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남자, 제멋대로 늘어져 다른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는 사람, 사람들. 공간에서 미세하게 정향의 냄새가 났다. 필은 확인차 물었다.

 "혹시 공기 중에도 분사하고 있습니까?"

 "아니오."

 뒤따라온 직원이 덧붙였다. 순수하게 즐기려면 외부 요인은 배제해야죠. 향에는 성분이 없으니 안심하시길. 필은 옅은 미소를 띠며 뒷짐을 졌다. 다행이군. 혹시나 있으면 어쩔까 싶었지. 내가 맡으면 곤란하잖아.

 "향정신성 약물로 이미 효력이나 안정성이 검증된 것만을 사용합니다. 순도는 99% 이상으로 보장. 추가금을 내실 경우 투약량을 늘리실 수 있고 투약 시간을…."

 직원이 건조한 설명을 외었다. 필은 실소가 터지는 것을 참았다. 제아무리 번지르르하게 말해봤자 그냥 마약이고 약쟁이들이지. 취해있는 꼴들을 봐. 내심 현란한 설명을 한 마디로 일축하며 서 있자 설명이 끝났다. 직원이 무광의 직사각형 상자를 내밀곤 조심스러운 손길로 뚜껑을 열어 필에게 내부를 보여주었다. 붉은 벨벳으로 안감이 처리된 안쪽에는 텅 비어있는 새 주사기와 여러 개의 약병이 들어 있었다. 

 필은 약물 몇 종류를 알아보았다. 어니 녀석이 보면 배알이 꼴리겠는데. 그렇게나 쥐 잡듯이 잡고 다녀도 윗대가리들이 이렇게 즐겨서야 별 소용이나 있겠어. 필은 지금 이 시각 여느 뒷골목에서 잠복 수사를 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을 어니를 떠올리곤 코웃음 쳤다. 뭐. 내 알 바는 아니고. 필은 제 할 일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일반적인 것도 있습니까? 수면제라든지."

 "간혹 원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갖춰는 놓지요."

 "흠. 그럼 요즘에 제일 잘 나가고 센 건 어느 겁니까? 약효가 길면 더 좋고."

 직원은 눈썹을 한 번 꿈틀대고는 상자 가장 오른쪽에 눕혀져 있던 진한 분홍색의 약병을 꺼내 들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직원이 덧붙였다.

 "작년 말쯤 유행했던 바바야가의 아종입니다. 바바야가랑은 다르게 투약 후의 두통을 최소화하도록 개량되었죠. 투약량에 따라 30분에서 2시간 정도의…."

 "2시간으로 하죠. 지금 바로."

 말이 떨어지자마자 직원은 빈 주사기를 꺼내 들어 약병에 꽂았고, 필은 무채색의 액체가 꿀렁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정장 재킷을 벗고 셔츠의 소매깃을 걷어냈다. 형식적으로 피스톤을 한 번 밀어 주사기의 공기를 빼낸 직원이 천천히 필의 팔을 붙잡았다. 필은 제 팔뚝을 잡은 단단한 손을 다른 쪽 손으로 마주 잡으며 제지했다.

 "아, 실례. 제가 직접 하고 싶은데요."

 "하지만…."

 "전문지식 걱정하시는 거면 안 그래도 됩니다. 저도 한두 번 해보는 게 아니라서."

 아니면 직접 놓는 데에도 추가금이 들어갑니까? 능청스럽게 웃자 직원이 못 미덥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주사기를 건네 왔다. 그러다 잘못되시면 저희는 책임져드릴 수가 없습니다. 떨떠름한 목소리에 필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저는 이 분야는 프로니까. 

 "…확실히 그래 보이시기는 합니다만."

 "그렇죠?"

 "명찰 색을 보아하니 신규이신데, 본격적인 메인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거부터 즐기시는 걸 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길고 차가운 주삿바늘이 목을 꿰뚫었다. 헉. 급하게 숨을 들이켜던 남자가 얼굴을 까맣게 물들이며 몸을 비틀고 팔을 허우적대는 것을 필은 악력으로 억눌렀다.

 "말했잖아. 한두 번 해보는 게 아니라고. 쉿, 쉬이…."

 입매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려 악랄하게 웃으며, 필은 약 올리기라도 하듯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 맡겨 봐. 착하지. 제법 거센 반항을 제압하며 주사기의 피스톤을 끝까지 밀어 넣자 아래에 깔린 몸뚱이가 약하게 경련하다 멈추는 게 느껴졌다. 

"실컷 즐기라고. 고객들만 즐기게 두기엔 아깝지 않아?" 

 다소 과격한 방식이었으나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의뢰인이 뒤처리를 해줄 터이다. 뭐 어때. 피를 본 것도 아니고. 높으신 분이라면 이 정도야 알아서 수습하겠지. 멸에게도 딱히 찔릴 게 없었다. 급소는 피했다고. 치명타도 안 입혔고.

 엎치락뒤치락하며 꽤 요란한 소리가 났을 텐데도 곳곳에 누운 사람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듯 그대로 황홀경을 떠돌고 있었다. 몇 명이 발작처럼 웃음을 터뜨렸지만 아무 소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래서 비싼 약이 좋다는 거구만. 사위가 조용한 것을 살핀 뒤, 필은 간헐적으로 몸서리치는 직원을 살짝 걷어차며 감정 없이 내뱉었다.

 "부디 토는 하지 마. 질식하니까. 어차피 죽지도 않겠지만."

 다만 걸리는 거라면 쓰러지기 직전 남자가 내뱉은 말이었다. 메인이 시작되기도 전에? 무언가 준비된 게 있는 건가? 말은 끝까지 듣고 제압할 걸 그랬나. 그래 봤자 뒤늦은 후회였다. 어차피 잽싸게 끝내고 자리를 뜨면 돼. 멸이 이제나저제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홀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멸을 떠올리니 필은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비몽사몽 하며 약에 취해 누워 있던 남자 중 하나의 바지에서 벨트를 풀어 직원의 손목을 묶은 뒤, 필은 방에 딸린 작은 다용도실의 문을 열었다. 여긴가? 정답이군. 별별 게 다 있어. 방 안 찬장 가득 놓인 형형색색의 약병이 필을 반겼다. 어지간한 대형병원의 의료용품 보관소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고객이 고객이니만큼 당연한 건가. 필은 선반을 살피며 몇 가지 약품을 골라냈다.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조금만, 샴페인 쏟은 걸 사과하는 척 접근해서 먹이면 돼. 그 뒤에 방심했을 때를 노리면. 생각을 깬 것은 다용도실을 나와 마주한, 달라진 방의 풍경이었다.

 다른 것은 모두 그대로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 공기 중에 풍기는 정향과 곳곳에서 들리는 나른한 신음. 다만 단 한 가지.

 "…어딜 간 거야?"

 방금 제압해 묶어둔 직원이 보이질 않았다.


-


 "그래서 제가…."

 "어머나."

 "부인 생각은 어떠신지…."

 간간히 들려오는 대화 속에서 자리를 지키며 멸은 구석에 구겨지듯 서 있었다. 자신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이 화려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다. 소장님은 언제 오시는 거지. 멸은 자신이 필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가 스스로를 달랬다. 아니. 당연한 거야. 이 낯선 곳에서 유일하게 아는 얼굴, 익숙한 얼굴이라고. 입 모양만 뻥긋거리며 베사메 무초를 불렀는데도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필이 건드렸던 어깨가 유독 서늘했다. 그의 감촉이 남아있는 것처럼.

 부부를 위장하자며 가까이 붙어 있던 몸은 뜻밖에도 불쾌하지 않았다. 아예 거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최소한 밀쳐내고 싶다거나, 뿌리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 성향, 접촉을 피하는 성향을 잘 알고 있는 필이 처음부터 양해를 구한 덕도 있을 것이다. 멸은 차라리 필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언제 위장을 들킬지 모르는 불안에 떨면서 혼자 멍하니 서 있는 것보단 나았다. 

 익숙한 온기, 익숙한 존재감. 즐겁게 어울려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 틈에서 그것이 못 견디게 사무쳤다. 오래 안 걸려. 금방 올게.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말하던 목소리와 이마를 간질이던 머리칼. 거짓말. 금방 온다면서요. 사실 필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멸은 툴툴거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안 돼. 일에 집중하자. 그럼 좀 나아질지도 몰라. 멀찍이 서 있는 표적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는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M은 모티인가요? 아니면 모리슨?"

 "아. 안녕하세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다소 놀랐지만, 멸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인사했다. 입장했을 때 자신들에게 신규 담당이니 뭐니 하면서 말을 걸었던 남자다. 가슴께에서 L이라는 이니셜이 빛나고 있었다. 같이 있던 'O' 명찰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같이 계시던 분은…."

 "아. 그쪽 파트너 담당하러 갔어요. P였나요? 흠, 역시 피터인가."

 남자가 넉살 좋게 웃었으나 멸은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저 사람, 입은 웃는데 눈이 안 웃잖아. 의식의 구석에서 약한 경보가 울렸다. 한순간의 방심이 생명과 직결되는 세상에서 오랫동안 단련해온 감이 주는 경고였다. 이 사람들 그다지 안전하지 않아. 왜냐고 묻는다면 답할 수 없었지만, 본능이 그렇게 말했다. 처음 다가왔을 때부터 내키지 않았는데. 필이 대신 남자의 악수를 받아주어서 내심 얼마나 안심했던가. 필. 소장님은 아직인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거리를 벌리자 상대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글쎄, 안 잡아먹는다니까요? 다 알면서 왜 그러실까. 신규 회원을 돌보는 게 제 의무라고요. 그렇게 무서운 사람 취급하시면 섭섭해요. 엄청나게 낯을 가리시는군요."

 "친절은 감사해요. 하지만 곧 저희 소… 아니, 남편이 올 거라서요."

 "어차피 제 파트너랑 같이 오실 텐데요. 저랑 얘기 좀 한다고 남편분이 화내실까요? 집착이 강해 보이시긴 하던데. 말도 못 붙이게 하고."

 남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빈정대듯 말했다. 

 "애초에 당신이 그렇게 사람 가리는 거, 남편이 그렇게 만든 거 아닌가요? 다른 사람들이랑 말 못 하게 하려고…."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울컥. 목소리가 제멋대로 튀었다. 소장님이 좀 쓰레기 소리를 듣긴 하지만(야, 너무 하잖아. 의식 너머에서 필의 목소리가 잠깐 메아리치는 것을 멸은 가볍게 무시했다.) 애초에 내가 경계하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멸은 의식하지 못한 채로 필을 위해 변명했다. 당신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만, 나는 경계하지 않으면 안 돼.  

 그들은 알지 못한다.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서 스스로 쌓은 울타리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조차 대놓고 느낄 정도로 벌리는 거리감을 어쩔 수 없이 유지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손을 맞잡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주고받으며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조차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나는 이래서 속상했어. 저래서 힘들었어. 괴로움을 나누고 마음을 열 존재의 가능성을 저 스스로 지워야 하는 것에 대해서.

 멸은 거기다 대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일을 오래전에 관두고 체념했다. 하지만 이럴 때면, 소장님은 알 텐데. 적어도 그 사람은.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원망만 깊어졌다. 멸은 저도 모르게 왼손에 낀 결혼반지를 만지작댔다. 그 행위가 작은 위안을 주었다. 어디 있어요? 얼른 뛰어오란 말이에요. 멸의 표정을 살피던 남자가 말했다.

 "과민반응하지 말아요. 그냥 혹시 몰라 물어본 거니까. 그런 케이스가 아예 없지도 않잖아요?"

 "그렇지만…. 제 남편은 아니에요. 그런 취급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필이 시도했더래도 멸이 호락호락 넘어가 줄 상대가 아니기도 했다. 상대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생각했는지 남자는 저자세로 나왔다. 미안합니다. 그냥 해본 말이에요. 딱히 악의는 없었어요. 그러고 보니 남편분이 참 잘생기셨어요, 그렇죠? 제가 모르는 사이에 데뷔하신 모델인가? 남자는 온갖 미사여구를 들이대며 점수를 따기 위한 말을 늘어놓았다. 애초에 필의 얼굴에 감흥이 없는 멸에게는 별 소용없는 말이었지만.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쏟아내던 남자가 슬며시 본론을 꺼냈다.

 "신규 회원들을 위한 조촐한 환영 인사가 있어요."

 "인사요?"

 "강요하고 싶진 않은데, 이게 우리 클럽 전통이거든요. 그래서 아까부터 귀찮게 굴었던 거예요. 미안해요. 와 줬으면 하는데, 어때요? 제 파트너랑 얘기해서 남편분도 오실 거고, 다른 신규 회원들도 다 같이 있을 거예요.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꼭 가야만 하나요?"

 "다들 한 번씩은 거치는 행사에요."

 이건 무슨 보험 판매원도 아니고. 남자는 지겹도록 끈질겼고 어떤 철벽을 내세워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도움을 청할 만한, 이 상황에서 자기를 빼내 줄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집요하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남자를 보면서, 멸은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고 소장님의 도움만을 바랄 수는 없어.

 "좋아요. 갈게요."

 "정말요? 기쁘네요. 그럼 절 따라오면 돼요."

 멸은 마지못해 져준다는 태도로 홀을 나서는 남자를 따랐다. 쭉 가서 로비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타요. 남자가 운을 떼는 순간, 멸은 반대 방향을 향해 뛰었다.

 "야!"

 작정하고 뛰는 멸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그 필조차도 스피드로는 이길 수가 없는 상대니까. 내가 지금 왜 도망치고 있지? 소장님은 어디에 있지? 약간의 공황을 느끼면서도 멸은 힘껏 달렸다. 뒤에서 남자가 욕설을 퍼부으며 따라오는 소리와 복도에 장식되어있던 잡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멸은 무시하고 코너를 돌았다. 쿵.

 꽤 센 충격에 몸이 흔들렸다. 멸은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부딪힌 상대의 명찰이 보였다. O. 안 돼. 그놈 잡아! 들려온 외침에 다음 순간 명치 부근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퍽. 기세 좋게 꽂힌 주먹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오지 못한 비명이 목을 울렸다. 

 "더럽게 잘 튀네."

 분을 삭이지 못해 씨근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소장님. 의식이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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