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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날들_[필멸]Til death do us part(4)


※4편은 다소 폭력적인 묘사가 있습니다. 

Til death do us part(4)



 “이런 ㅆ….”

 욕설은 끝맺어지지 못한 채 흩어졌다. 쾅! 방금 피한 거대한 몸뚱이가 박살 내버린 다용도실의 문짝을 보면서, 필은 천천히 굽혔던 상체를 폈다. 누워있던 몇 명이 큰 소리에 반응한 듯 몸을 비틀며 움찔거리다 다시 사그라지며 조용해졌다. 널브러진 사람들은 아직도 의식의 저편을 헤매고 있었지만, 여기서 더 큰 소동이 일어난다면 혹시 모를 일이었다. 

 아. 이렇게까지 요란 떨 생각 전혀 없었는데. 뱉지 못한 욕을 삼키자 다시 한번 후웅, 하고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몸이 달려들었다. 필은 잽싸게 몸을 옆으로 굴려 다가오는 공격을 피해냈다. 기껏 새로 산 값비싼 와이셔츠와 정장 조끼가 더러워졌다. 양손이 결박되어있는 상대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적당히 좀 하자, 우리.”

 묶어두었던 것이 보이질 않아서 어딜 갔나 했더니, 시야의 사각에서 짐승처럼 아가리를 벌리며 뛰쳐나와 자신을 공격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날아온 첫 번째 공격을 피해낸 것은 여태껏 해결사로 구르면서 갈고닦아온 반사 신경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씁. 위험했잖아. 

 허연 게거품을 문 남자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필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비이성적인 의식 상태, 신체 능력의 비약적인 향상, 벌린 입에서 끓어오르는 거품과 무엇보다도 있는 대로 충혈되어 붉어진 눈. 필은 이런 현상을 유발하는 약물을 잘 알고 있었다. 현 상황에서 필 자신을 비롯해 어니, 그리고 다른 해결사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주어진 최대의 관심사.

 블러디 메리. 

 그것밖엔 답이 없었다. 가루로 된 형태만 봤는데, 설마 액상으로도 유통되고 있을 줄은.

 “바바야가의 아종이 어쩌고 하더니?”

 피의 메리면 요즘 제일 잘 나가는 게 맞긴 하다만. 고객들이 이런 것까지 즐기는 줄은 미처 몰랐네. 필은 빈정대면서 상대를 살폈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휙휙 돌아가는 붉은 눈이 바로 앞에서 이죽대는 사냥감을 향해 날뛰고 있었다. 사내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끄르륵….”

 그래. 대화가 되리라 생각한 내가 멍청했지. 필은 뒤로 물러서며 생각했다. 총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어차피 소음기가 없으면 쏘지도 못했겠지만. 호텔에 무기 반입은 거부되었고 필과 멸은 로비에서 이미 소지품 검사를 거쳤다. 흉기가 될 만한 물건은 그게 설령 펜 하나일지라도 압수당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못 가지고 들어온다는 소리는 아니지. 이 짓 하루 이틀 하는 줄 아나?

 신고 있던 고급스러운 수제화의 굽을 떼어내자 손바닥 크기의 투척용 나이프가 튀어나왔다. 좀 번거롭고 고전적인 방식이지만 나쁘진 않단 말이야. 부웅. 다시금 휘둘러지는 팔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면서 자세를 고쳐 잡은 필이 그대로 달려드는 남자의 허벅지를 찌르고 비틀었다. 대퇴부의 정맥을 노려서, 매끄럽고 효율적으로. 박아 넣은 칼의 손잡이를 통해 남자의 근육이 이리저리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크헉. 짧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남자는 그대로 턱주가리를 크게 벌리고선 필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어딜!”

 퍽. 필은 잽싸게 무릎을 들어 남자의 배를 강하게 가격했다. 얼굴을 방어하다 스치듯 뜯긴 손목에 피가 맺히는 게 느껴졌다. 대단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신경을 거슬리게 할 정도는 되었다. 짜증 나. 부글거리는 속을 느끼면서, 필은 다시 힘을 주어 남자를 세차게 걷어찼다.

 자신이 먹인 한 방에 떨어져 나간 남자의 다리에서 왈칵하고 피가 쏟아졌다. 뽑힌 칼이 나뒹굴었다. 남자는 여전히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바르작댔다. 이게 문제라니까. 어떤 부상을 감수하고서라도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는 폭력성, 집요하게 상대를 절멸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 출혈이 큰 부위를 고집해서 찌른 건데, 이래서야. 원래대로라면 과다출혈 때문에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해야 정상이다. 손목에서부터 손가락으로, 검은 가죽 장갑을 타고 미끈거리는 액체가 묻어났다. 한동안 볼 일이 없었던 제 피를 보자 머리가 차가워졌다. 착수금이 어마어마할 때부터 알아채야 했는데. 일이 이렇게 번거로워질 거라고 예상을 해야 했어. 일어나지 마라, 일어나지 마라…. 언제나 소망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기어코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 내면서도 일어나는 남자를, 필은 주먹을 쥐고 있는 힘껏 머리를 쳐 쓰러뜨렸다.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꽤 요란했다. 뇌진탕이 있으려나? 남자가 상체를 뒤틀며 허우적대더니 다리 끝을 부르르 떨곤 움직임을 멈추었다. 입에서는 계속해서 거품이 흘러나왔다. 여기서 굳이 더 손대지 않아도 확실하게 끊어낸 정맥덕에 곧 출혈 쇼크가 올 것이다. 발끝으로 슬쩍 건드리자 버겁게 숨을 들이쉬는 것이 보였다. 그거 봐, 안 죽는다니까. 의식 한쪽에서 소장님! 급소는 안 돼요! 하고 쫑알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머리에 칼을 박거나 하진 않았잖아.”

 저도 모르게 변명을 뱉으면서 필은 홀에 있을 청년을 떠올렸다. 자기가 두고 온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뒷모습에 대해서. 화려한 조명 속에서 혼자 응달에 서 있을, 자신과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공유하는 저의 반쪽(어쨌거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혼인 맹세고 애인이고 자시고, '고작' 그런 것에 빗댈 것이 아니니까)에 대해서…. 머릿속에서 재잘대지 말고 조용히 해. 금방 갈 테니까. 

 필은 이미 익숙해진 피 냄새 속에서 씨근대며 호흡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몸을 뒤틀며 깰 듯 말듯 몸을 뒤척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필은 바닥에 뒹굴던 자신의 칼을 주워들었다. 한 번 일어나 봐. 무슨 일이 일어나나. 인내심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멸이 기다리고 있어. 필에게 다행인건지 혹은 애꿎은 칼을 맞을 뻔한 그들에게 다행인건지, 바스락거리던 몸들이 금방 잠잠해졌다. 그래, 착하지. 푹들 자라고. 신경 쓰지 말고.

 손목에 맺힌 피는 금방 멈추었고 와이셔츠의 소매만이 붉게 물들었다. 그나마 잘 안 보이는 곳이라 다행이군. 필은 벗어놨던 턱시도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잘 있으려나. 상태를 확인했어야 했는데, 기기가 벗어둔 옷에 있었던 덕에 멸의 맥박을 보지 못했다. 천천히 안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쿵, 쿵.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거친 목소리가 바깥에서부터 울렸다.

 “야, 문 열어!”

-


 “우리가 굳이 부부 동반을 고집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그 질문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직도 화끈거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명치께의 통증 덕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콜록, 콜록. 연달아 이어지던 기침이 멈추자 멸은 눈에 힘을 주고는 고개를 들었다. 감각을 집중하자 손목을 여러 겹으로 묶은 케이블 타이와 깔끔하게 마감된 목제 의자의 감촉이 느껴졌다. 여긴 어디지? 

 흐렸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며 퍼져있던 그림자들이 카메라의 조리개로 초점을 맞추듯이 선명해졌다. 책장으로 둘러싸인, 하얀 조명이 밝혀진 작은 응접실 가운데 자신이 묶여있었다. 입고 있던 푸른색 연미복의 상의가 절도있게 접힌 채 건너편 의자에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아니, 잠깐. 저게 왜 저기 있어?

 그제야 멸은 저가 입은 와이셔츠의 오른쪽 소매가 걷혀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나마 왼쪽이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왼 손목에는 필이 준 해결사의 팔찌가 있다. 혹여 들켰을까? 생각이 우르르 쏟아지는 것을 짝, 하는 소리가 가로막았다. 방금 질문을 던져 멸의 의식을 건져낸 상대가 의료용으로 쓰이는 고무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거슬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L 명찰의 남자, 자신을 붙잡아 끌고 온.

 눈앞 테이블에 어질러지듯 놓여있는 빈 주사기와 검은 직사각형의 상자가 보였다. 기억이 차례차례 영화의 스틸컷처럼 흘러갔다. 끈질기게 회유하던 남자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척 뛰었던 자신, 운 나쁘게도 부딪힌 한 패. 혼란 속에서도 멸은 저 자신에게 속삭였다. 침착해야 해. 약한 척해. 무력한 척해. 네가 타고난 무기를 써. 인상.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기분은 좀 어때?”

 “…….”

 “너무 그런 눈 하지 마. 완전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고.”

 남자가 고무줄을 다시 팡, 하고 튀기고는 말을 이었다.

 “이게 신규 회원들이 거쳐 가는 코스는 맞아. 모든 사람이 거치는 게 아닐 뿐이지. 상대를 가려가면서 해야 하거든. 괜히 건드린 게 고위직이면 곤란하잖아. 근데 네 프로파일은 건드릴 만하더라. 나중에 별로 문제도 안 될 거 같고.”

 의뢰인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위조 회원증에 대체 뭐라고 적은 것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남자는 빙글빙글 웃으며 들고 있던 고무줄을 꼬았다. 멸은 언젠가 필과 함께 보았던 구시대의 스릴러 영화들에 대해 생각했다. 교살당하던 사람들, 사소해 보여도 사람 하나는 족히 죽일 수 있는 살인 무기들. 저걸로 뭘 할까? 내 목을 조를까? 아니면, 나를 고문할까?

 “표정 좀 봐. 너 정말 귀엽다.”

 오소소. 어쩔 수 없이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에 또아리를 튼 뱀이 제가 꽁꽁 묶은 쥐를 한입에 집어삼키는 광경이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으스러지는 뼈와 살의 이미지. 침착, 침착하란 말이야. 멸은 마음속으로 베사메 무초를 단숨에 완창하며 몸을 움츠렸다. 실제보다 약해 보이게, 왜소하고 조그마해 보이게. 눈을 똑바로 맞춰선 안 돼. 도전적으로 보일 거야. 멸은 제가 만들고 새겨온 위기 대처용 가이드라인에 철저하게 따르려 노력했다. 비록 금방 수포로 돌아가긴 했지만.

 “걱정하지 마. 말했잖아. 안 잡아먹는다고. 최소한 우리가 잡아먹진 않아. 한다고 하면…. 네 남편이 하겠지.”

 “뭐라고요?”

 저도 모르게 반문이 튀어나왔다. 아차. 말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실수를 인지하면서도 멸은 자신 앞에 버티고 선 남자의 시선을 마주하고 말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처음에 물어봤잖아. 부부 동반을 왜 고집하는지 아느냐고.”

 남자의 입이 호를 그리며 활짝 웃었다. 이 상황이 재밌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무력하게 묶인 대상을 장난감 보듯 하는 미소. 남자가 멸의 왼손에 낀 반지를 툭툭 건드리더니 볼을 찔러왔다. 필의 손과는 다른, 배려 없고 제멋대로인 손길에 멸은 진저리를 쳤다.

 “우리 쪽 VIP들은 말이야, 좀 짜릿한 걸 좋아하시거든. 전율이 넘치고, 긴박하고, 손에 땀을 쥐게 되는 거. 근데 높으신 분들이 어떻게 언데드 매치 경기장 따위에를 행차하시겠어.”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귓가에 자신의 맥박이 울리는 것을 느끼며 멸은 자신이 올라갔던 링을 떠올렸다. 어느 한쪽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벌이는 살육의 경기. 찢고 바스러뜨리고 짓뭉개고 잡아 뜯고. 낭자한 살점과 경기장에 고여 있던 핏물이 떠올랐다. 자기가 굴러다니는 누군가의 얼굴 가죽과 마주한 뒤로 그만둬버린 잡역부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래서 그걸 좀 상대적으로 우아하게 변형해보자 한 거지. 어떻게 하면 재미있을까 아이디어도 내고. 그러던 중에 회원 하나가 그러더라고.”

 남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죽이곤 코앞까지 성큼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즐거운 듯 웃던 입이 차갑게 내뱉었다.

“부부를 데려다가, 서로 피를 보게 하면 재밌겠다고. 마침 요즘 유행하는 적절한 약도 있고.”

 멸은 제 몸의 피가 식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뻐끔대고 있자 남자가 폭소를 터뜨렸다. 너 정말 재밌다. 반응이 물건이야, 물건.

 “뭐 어때. 어차피 죽지도 않잖아.”

 귀가 먹먹해졌다. 멸은 그 말을 곧잘 입에 올리던 사람을 안다. 소장님. 남자의 태도는 완벽하게 필의 그것과 일치했다. 그 점이 너무나도 역해져서 멸은 기어코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워, 안 돼, 안 돼. 바닥이 더러워진다고.”

 남자는 잽싸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구석에 놓여 있던 속이 깊은 재떨이를 가져다 댔다. 멸은 고개를 저으며 올라오는 토기를 억눌렀다. 억지로 참은 탓에 딸꾹질이 흘러 나왔다. 딸꾹. 그 모습에 남자가 또다시 요란하게 웃었다. 어떡해. 너무 재밌어. 본게임도 죽여주겠다. 멸은 허리를 숙였다. 몸을 뒤흔드는 딸꾹질 때문에 눈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명치가 다시 아려왔다. 그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무의식이 속삭이는 말들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소장님은 이런 사람들하고 달라. 진짜? 확신할 수 있어?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의 급소를 노려. 어차피 죽지도 않는다면서. 어떤 죄책감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이 남자와 다르겠어? 누군가를 찌르고 가르면서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사람이야. 얼마든지 이런 일을 즐길 수도 있겠지. 아니, 아니야. 소장님은.

 밑도 끝도 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깊어지던 실망감에 제동을 건 것은 맞잡았던 손의 기억이었다. 네 방식대로 해도 돼. 자신을 의식하고 신경 써주던 그 사소한 배려들. 나름대로 급했을 텐데도 몰아세우지 않고 물어봐 주었다. 네가 반려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방식 말이야. 고작 이거야? 손이나 잡는 거? 빈정대면서도 자신의 손을 붙잡고 겹쳐주던 온기. 손을 잡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서늘한 가죽 장갑의 밑으로 느껴지던 체온과 그 밑의 상처. 불안해하는 손끝을 달래주던 상냥함의 편린(片鱗).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필은 자신을 위해 수도 없이 도박을 했다. 바실 앞에서 총을 내리던 모습, 자기를 향한 칼날을 대신 받아내던 모습, 모습들. 뭉개져버린 케이크는 모양새는 엉망이었지만 신경 써서 고른 것이 분명해보였다. 네가 딸기는 싫다고 했으니까.

 필은 그게 필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멸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잡았던 손의 온기가, 혼자 있을 수 있겠냐며 어깨를 쓰다듬던 손이 사무쳤다. 그늘 속에서 거의 닿을 정도로 마주 서 있던 남자의 존재감과 자신을 바라볼 때 원색으로 빛나던 적갈색의 눈.

 멸은 천천히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제 안으로 침잠했다. 맞아. 소장님은 근본적으로는 나와 달라. 나는 그 다른 점을, 애초부터 되돌릴 수 없는 근간을 좋아할 수는 없어. 그것만은 인정해야 했다. 당장 세상이 끝난대도 멸은 필의 그 부분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 외의 다른 것이라면? 그 사람이 저에게만은 보여주는 그 사무치는 상냥함이라면. 멸은 자신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리란 사실을 깨닫고 새삼 놀랐다. 그저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다. 갈구했다. 멸은 자신이 그 온기에 얼마나 굶주려있는지, 얼마나 간절한지 알고 있었다.

 마음을 열고, 보여주고, 대화를 나누는 것. 필이라면, 그라면 자신의 원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숨길 필요도 감출 필요도 없다. 가장 큰 비밀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따뜻한 위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건 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위로는 직설적이고 돌려 말하는 법이 없으며 때로는 날카로웠다. 그래도 멸은 거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날뛰던 심장이 서서히 제 박동을 되찾았다. 쿵, 쿵. 소장님. 소장님은 지금 괜찮으실까? 계속 멸을 지켜보며 놀려먹던 남자가 눈을 세모꼴로 접으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숨겨진 가학 성향이나 성적 취향을 깨달을 수도 있어. 실제로 그런 케이스가 한 두어 번 있었거든. 일단 피 맛을 보면 멈출 수가 없지. 긴장 풀어. 이래 봬도 만약을 위한 안전 요원들도 있고. 최악의 사태는 없을 거야.”

“…….”

 그건 당신들이나 그렇고. 반박하려던 것을 집어삼키며 멸은 눈을 굴렸다. 정말 악취미야. 표정을 읽어냈는지 남자가 갑자기 결혼반지를 낀 멸의 약지를 으스러지도록 꽉 쥐었다. 악. 무심코 비명이 샜다. 

“자신의 영원을 맹세한 두 사람이 피를 흘리고 서로를 찢어발기는 걸 보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깨가 쏟아지는 커플이었을수록 더 재밌어지거든. 너도 일단 겪어보고 나면 이 구경에 맛 들이게 될 걸. 우선 내 파트너가 네 남편을 잡아 와야겠지만.”

 대체 금쪽같은 연인을 두고 혼자 어디를 갔을까? 아주 건드리지도 못하게 금이야 옥이야 감싸더니 중요할 땐 없네? 빈정대는 말에 멸은 입을 꾹 다물었고 남자는 손가락을 놓았다. 필은 호락호락 당할 사람이 아니다. 남자의 파트너쯤 쉽게 제압할 것이다. 게다가 필이 홀에 갔을 때 자신이 없다는 걸 확인하면 금방 찾으러 와 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멸은 욱신대는 약지와 거기서 얌전히 빛나고 있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필도 끼고 있는 똑같은 것을 떠올리면서. 그렇죠? 찾으러 올 거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왜냐하면, 저는 당신에게 있어서….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야 해. 이성이 속삭였고 멸은 침착하게 눈만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소장님이 찾으러 오기 전에 나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인데. 갑작스레 남자가 말을 던졌다.

 “VIP들도 곧 오실 테고, 우리도 준비할까?”

 채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남자가 비어있는 주사기를 들어 올리곤 약병이 담긴 사각형 상자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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