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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날들_[필멸]Til death do us part(5),(6)

(6)이 누락되어있던 것을 확인하여 (5)에 덧붙입니다.


※5편은 다소 폭력적인 묘사가 있습니다.

Til death do us part(5)



 남자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날은 간만에 사냥을 하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죽지 않게 된 이후로 생겨난, 목숨을 가지고 노는 온갖 놀이. 그중에서도 특히나 자신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놀이판이 열릴 예정이었다. 날아다니는 살점과 핏덩이 사이에서 결혼식 주례자로 분한 사회자가 있는 힘껏 흥을 돋우는(누군가는 이것을 악취미라고 했겠지만 애초에 그런 평을 신경 썼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피를 들끓게 해줄 자신들의 유희. 마침 딱 좋은 목표물도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미 찍어둔 사냥감 둘을 모두 잡아다가 준비된 약물을 주사해두어야 했다. 제대로 효력이 나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고, 미리 흥을 돋우어놓아야 더 재밌어지니까. 그나마 한 놈은 아까 잡았는데…. 명치에 주먹을 박아 넣고 상대가 무력하게 쓰러지며 몸을 떨던 순간을 떠올리자 기분이 나아졌다. 이래서 이 짓을 그만둘 수가 없다니까. 

 남자는 문명 세계에서는 분출하기 힘든, 용납되지 않을 제멋대로의 폭력성을 이런 더럽고 야비한 경로를 통해 해소하는 편이었다. 나머지 하나를 때려눕히며 느낄, 부러지는 뼈와 짓이겨지는 살의 감촉을 상상하자 몸에 아드레날린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어딜 간 거야. 덩치도 큰 게 숨는 건 쥐새끼 같아서.”

 사실 상대하는 게 쥐가 아니라 늑대 내지는 호랑이라는 점을 굳이 정정해줄 사람은 주위에 없었다. O라고 쓰인 하얀색 명찰을 고쳐 매며, 남자는 부러 쿵쿵대고 욕을 짓씹으며 복도를 걸었다. 멀찍이서 거친 목소리로 문을 두드리는 사내를 본 것은 그때였다. 아는 얼굴이었다.

 “너는 왜 여기 있어? 가서 준비하고 있어야 하잖아.”

 “아, 안녕하십니까.”

 왜소한 몸집의 사내가 3이라고 쓰인 문을 두드리는 것을 멈추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무어라고 말하려고 몇 번 입을 뻐끔대더니 시선을 내린다. 이 일종의 신호를 알고 있다. 드물게 일이 틀어졌을 때 이 자가 습관적으로 보이는 태도.

  “뭔데. 뭐가 문제야?”

  “저, 그게….”

  “서둘러!”

 높은음의 목소리와 뒤에서 달려오는 두어 사람 정도의 발소리. 뒤를 돌자 마찬가지로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들이 보였다. 제 파트너에게 붙여두었던 두 사람의 경호원. 둘이 자신과 눈을 마주치곤 흠칫하고 몸을 물리는 게 보였다. 오늘따라 다들 왜 이 모양이야?

 “이 녀석은 그렇다 치고 너희는 왜? 자리 비우라고 경호원 앉혀 놓은 줄 알아?”

 “상황이 비상인지라.”

 “비상?”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두드리던 남자가 몸을 떨었다. 그가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기도 전 경호원 중 머리를 높게 묶은 쪽이 선수를 쳤다.

 “약이 바뀌었답니다.”

 “뭐?”

 저도 모르게 인상이 확하고 구겨졌다. 고개를 돌려 떨고 있는 왜소한 사내를 바라보자 말을 더듬는다. 그게, 그게.

 “약 관리는 그쪽 소관 아니었나? 뭘 어떻게 처리 한 거야?”

 “이번에 포장이 모두 동일한 모양으로 도착했습니다. 다른 때는 개별로 담겨 왔는데….”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

 “하나하나 내부를 확인하고 처리해야 했는데. 하필 분류가 잘못된 걸 이제 확인해서…. 제 불찰입니다.”

 “이런 ㄱ….”

 튀어나가려던 욕설을 간신히 갈무리하며,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거 중에 하나라도 여기 있는 고객한테 잘못 주사되면 무슨 사달 나는지 몰라서 그래? 쥐도 새도 모르게 묻히고 싶어?”

“죄송합니다.”

 내부 상황이 제 생각보다 심각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떠오르자 쫓고 있던 놈이고 뭐고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머리가 핑핑 돌았다. 어쩌다가 일이 이따위로 꼬였지? 제 앞에 서 있는 약품 관리자가 제대로 일 처리만 했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터다. 열이 올랐다. 도망친 놈 손 봐주기 전에 이놈한테 먼저 스트레스나 풀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지만, 지금 상황을 수습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관두었다. 손은 나중에 봐주지 뭐.

 “그래서 너희 둘은 뒤바뀐 거 찾으러 온 거고?”

 엉거주춤 서 있던 경호원들을 향해 말하자 고개를 끄덕거린다.

 “물론 고용주 곁을 오래 비우고 있는 건 곤란하니 금방 찾아서 갈 겁니다. 회수해서 잡아둔 녀석한테 쓰기도 해야 하고.”

 “그 검은 머리에 얼빵하게 생긴 놈?”

 “네. 근데 그, 좀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그 말에 남자는 제 파트너의 성미를 떠올렸다. 곤란하게 되었군.

 “약 바뀐 거 알고 어지간히 짜증 냈나 보지. 혹시 다치게 했어? 상품은 건들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

 “악!”

 옆에 서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약품 관리자의 비명이 들렸다.

 어?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에 남자는 열린 문틈으로 탁하게 빛나는 적갈색의 눈과 마주쳤다.

-


 꿀꺽. 멸은 침을 삼키고는 제 옆쪽에 산산 조각나 내동댕이쳐진 화분을 흘긋 바라보았다. 저를 약 올리던 자가 잔뜩 뿔이 나서, 경호원에게 소리친 뒤 던져버린 물건. 조금만 가까웠어도 머리를 맞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파편 몇 개가 무릎 위에 튀어 작은 조각이 흩뿌려져 있었다.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으니까 저런 짓을 하는 거야. 졸아드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자 상대가 중얼댔다.

 “안 돼. 안 되지. 상품에 흠집을 내면. 다치게 하면 안 되지.”

 명찰의 남자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처럼 손을 떨었고, 멸은 다시금 몸에 새겨진 습관대로 무력하고 나약한 인질의 흉내를 냈다. 실제로 느낀 공포보다 훨씬 더 겁먹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움츠리며. 포식자 앞에 던져진 작은 초식동물처럼. 외침을 들은 경호원 둘이 남자와 몇 번 대화를 나누고는(대화라기보단 일방적으로 화를 받아주고 있는 모양새긴 했다) 쏜살같이 어디론가 뛰쳐나갔고, 응접실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분명 분홍색 병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뭔지는 몰라도 일이 그르친 모양이었고, 이건 좋은 기회였다. 멸은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 오랜 세월 길러온 동물적 감각으로 이것을 놓치지 않겠노라 마음먹었다. 다음 순간 사내가 멸을 째릿, 하고 노려보았다.

 “이제 이걸 어쩐다. 약이 올 때까지 재워둘까?”

 조금 전 쏟아버린 무광의 직사각형 상자에서 주사기를 꺼내 드는 사내의 모습을 보고, 멸은 필사적으로 변명을 짜냈다. 어떻게 하지? 뭐라고 해야 할까.

 “…싫어요. 주사 아프단 말이에요. 이따 한번 맞는 걸로 족해요.”

 “다 큰 게 주사가 무서워? 생긴 값 좀 하네.”

 킬킬대는 소리가 울렸다. 기분 나빠. 멸은 표정에 제 생각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 부단히도 애썼다.

 “그럼 이건 어때?”

 남자는 여전히 입으로만 웃으면서 주사기의 끝을 약병 중 하나에 찔러 넣었다. 멸로써는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는 약이었다.

 “무지하게 뿅 가는 거야. 너무 좋아서 자지러질걸? 본게임 전에 에피타이저로는 제격이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끼면서도 멸은 부러 남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기대해. 정말 좋은 나머지 질질 짜면서 울게 될 테니.”

 멸은 제 목을 배려 없이 휘어잡는 손아귀에 몸서리쳤다. 날카로운 주사기 끝의 서늘함이 시야의 사각에서 느껴졌다. 잘못해서 맞으면 어떡하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스스로 떠오른 말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멸은 아직 자유로운 두 다리에 있는 힘껏 힘을 주고는 남자의 배를 향해 돌진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남자가 멸의 멱살을 붙잡았고 둘은 동시에 넘어졌다. 쿵, 파삭.

 “앗 따거!”

 “이 새끼가…!”

 두 사람은 남자가 던져버린 화분 위로 굴렀다. 정교한 유리의 파편이 살갗에 박히는 것도 괘념치 않고, 멸은 묶여있던 손의 연결부를 깨진 조각에 문댔다. 빨리, 빨리! 손 하나가 간신히 자유로워진 순간이었다.

 “악!”

 퍽. 남자가 있는 힘껏 멸의 명치를 걷어찼다. 아까 맞은 데를 또 때리는 게 어딨어! 걷잡을 수 없이 심하게 기침을 하며 올려다보니 남자가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는 노려보고 있었다. 저보다 더 험하게 구른 건지 얼굴에 작지 않은 파편 하나가 박혀 있는 모양새가 공포 영화를 방불케 했다. 히익. 저도 모르게 쇳소리를 내자 상대의 눈빛이 더욱 형형해졌다.

 “상품이라고 봐줬더니 기어올라?”

 네가 한 짓 모두 후회하게 될 거야. 사내가 다시 주사기를 주워들었다. 멸은 손금을 갈라버릴 듯 파고드는 파편의 잔해를 느꼈다. 선명한 고통.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사이렌. 위험해.

 남자가 멸이 누워있던 바닥을 향해 주사기를 내리꽂은 것과 멸이 남자의 손등에 파편을 박아 넣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붙잡힌 남자의 울림이 손을 타고 느껴졌다. 필은 표정 없는 얼굴로 짧게 답했다.

  “어쩌라고?”

  “네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는 모르겠는데, 감히….”

  “말이 많네.”

 필이 목에 대고 있던 칼을 좀 더 힘 있게 갖다 댔다.

 “죽지는 않아도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프긴 할 거야, 그치? 좀 거칠게 자르면 신경이 잘 안 붙을 수도 있고. 중추신경에 문제가 생기면 앞으로 아주, 아주 거슬릴 텐데.”

 남자가 이를 악다무는 것이 보였다. 필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들려온 노크 소리에 이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정돈하며 방 안에서 들은 대화. 홀에 들어섰을 때 자신들에게 접근했던 남자 중 하나의 목소리가 울렸고 그가 말한 게 멸이라는 걸 필은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애초에 우리를 노리고 접근했던 남자가 언급할만한 검은 머리가 걔밖에 더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재킷 안에 들어있던 기기를 꺼내자 메시지가 연달아 떠 있었다. 대상의 맥박이 급격히 증가함, 생체 신호 불균형. 대상이….

 다음 순간 남자가 말했다. 혹시 다치게 했어? 상품은 건들면 안 된다고…. 다치게 했다니, 누구를? 떠오르는 건 한 사람뿐이었고 이후로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문을 열자마자 있던, 노크 소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작은 놈의 목을 꺾었다. 직후 달려드는 경호원 둘에게 방 안에서 준비해두었던 진정제 주사를 하나씩 박아 주고(방에 넘쳐 나는 게 바로 이런 약이었다). 아. 투약량이 좀 많은가? 쇼크가 오건 말건 알 바는 아니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 유일한 알 바인 존재 외에는 어떻게 되건.

 마지막으로 남은 남자를 향해 돌진했다. 격한 움직임에 물어뜯긴 손목에서 다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귀를 가득 울리는 저 자신의 심장 소리. 제 손짓 한 번에 떨어지는 검붉은 피와 비명. 필은 두려움을 느꼈다. 보통 때라면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것.

 목숨을 건 줄타기를 하면서도 즐거움을 수반하는 짜릿함이라면 느껴보았지 근원적인 공포에 도달해본 적은 별로 없다. 거기까지 닿으려면 자신을 한계의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타르처럼 뭉쳐있는 검은 감정에 불을 붙여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은 어찌 되었건 살아있는 자신을 향한 환희였고 삶을 누리는 특권에 대한 자부심이 장작이 되었다. 지금은 달랐다.

 멸. 심장을 긁어내리는 그의 공포, 그의 두려움. 필은 문득 이 감정이 종교가 유효하던 시절 신을 두려워하던 것과 같을까 생각했다가 이내 흘려보냈다. 그는 신을 믿어본 적이 없다. 예전이건, 지금이건. 믿는 건 자신의 존재와 생애를 향한 집념. 그 집념의 무게가 멸의 몫만큼 무거워졌을 뿐이다.

 상념을 깬 것은 밑에 깔린 남자의 고함이었다. 이거 안 놔? 필은 그대로 남자의 목에 칼을 들이댔고 반항하는 몸을 억지로 잡아 세워 뒤쪽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괜히 널 남겨둔 게 아니지. 제값을 하라고. 대강의 이야기는 남자의 팔 하나를 부러 뜨러 가며 주워들을 수 있었다. 언데드 매치의 변형, 신규 회원들, 전통, 어쩌고저쩌고. 꾸역꾸역 내뱉는 이야기를 방 밖에서 넷이 나누던 대화와 취합하자, 쓰러뜨린 직원이 블러디 메리 양성 반응을 보인 것도 이해가 갔다. 원래는 자신들에게 쓸 약이었을 것이다. 약병이 뒤바뀌지 않았다면.

 필이 보인 반응은 단순했다. 가지가지 하네. 새삼스럽게 놀랄 것도 없었다. 해결사 노릇 하면서 본 갖가지 변태 취향이 몇 가진데. 이건 본인이 아닌 남을 이용해먹는다는 점이 저열하긴 했지만. 남자를 몇 번이나 어르고 협박하며 필은 직원들을 이리저리 피해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탔다. 로비나 홀 쪽으로 가서 눈에 띄고 싶지 않았으므로. CCTV의 렌즈를 깨뜨려 망가뜨린 직후에, 남자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지금은 네가 기세등등할지 몰라도….”

 “진짜 지치지도 않네.”

 필은 무덤덤하게 남자의 무릎 뒤를 걷어찼다. 비명이 울렸고 순간적으로 주저앉은 몸 탓에 칼이 목을 조금 파고들었다. 남자가 숨을 참는 것이 보였다. 필이 낮게 말했다.

 “내가 그딴 거에 관심 있어 보여?”

 “하하. 그래. 나도 전략을 바꿔야겠어. …네 얼빵한 파트너. 지금쯤 무슨 꼴을 당하고 있을까?”

 씨근대던 남자가 갑자기 기괴하게 웃었다. 필은 무표정을 유지하며 남자의 말을 들었다.

 “나나 다른 경호원들이 이렇게까지 안 오면 눈치를 챌 거거든, 윗선에서. 지금쯤 네가 난도질해서 방 안에 밀어 넣은 사람들이 발견되었을지도 모르지. 너야 나를 인질로 잡고 있다 쳐도 네 파트너는?”

 “…….”

 “이제 좀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어? 어차피 너나 그 녀석이나….”

 남자가 무어라고 쓰잘데기 없는 말을 하나 꺼낼 때마다 그의 목에 닿은 칼끝을 통해 거슬리도록 질긴 맥동이 느껴졌다. 불규칙적이고, 소란스럽고, 흥분으로 인해 있는 대로 질주하는, 무시무시하게 큰 맥동.

 필은 불멸자들이 가진 이 끈질긴 박자를 싫어했다. 어떻게 비틀어도, 어떻게 바수어도 끊어질 줄 모르는 메트로놈의 움직임.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기계적인 진자(振子) 운동. 그가 원하는 맥박은 단 한 가지였고 필은 당장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제 것처럼 명백하게 살아있는 맥동. 언제든 쉽게 죽을 수 있고 쉽게 멈출 수 있는. 필은 그 맥동을 사랑했고, 그 맥동을 가진 사람을….

 잠깐, 사랑?

 “…경호원!”

 띵. 다음 순간 VIP룸이 있다던 층에 도달하는 엘리베이터 신호음이 울리고 붙잡혀있던 남자가 힘껏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필은 반사적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움켜쥐고 엘리베이터의 벽면에 때려 박았다. 쾅, 쾅. 몇 번 반복하자 더 이상 시끄럽고 짜증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힘이 빠진 몸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필은 그 뒤에 대고 속삭였다.

 “자꾸 얼빵하니 어쩌니 하는데, 걔가 네 놈보단 영악하고 똑똑할걸.”

 안 그래? 대답이 없는 입에서 피거품이 흘렀다. 아. 급소였나. 이번엔 어쩔 수 없지. 필은 머리가 점점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불분명하고 추상적인 어떤 개념을 붙잡아 구체화했을 때의 묘한 만족감. 분명 알고 있는 단어인데 생각이 나지 않아 고민하던 것을 드디어 떠올렸을 때의 쾌감. 

 그 순간의 명료함 덕에 필은 달려온 경비 하나의 다리에 별 힘들이지 않고 정확하게 칼을 던져 명중시켰다. 무어라 악다구니가 나오기도 전에 목을 쳐 기절시키고 다시 칼을 뽑으면서, 필은 밀물과 썰물처럼 번갈아 가면서 밀려오는 찬란한 환희와 그보다 더 큰 공포를 느꼈다. 정의(定義)를 내리고 나자 몰려오는 후회. 이게 아닌데. 이럴 생각은 없었어.

 문제에 대해 계속 생각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일단은 끝내고 나서. 찾아야 할 사람을 찾고 나서. 그렇게 생각을 미루며 필은 어두운 통로를 지나 직원용 출입구를 열었다. 넓은 복도와 미로처럼 연결된 방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제는 목적지인데. 어느 쪽인지 알려줄 놈을 방금 작살내버렸으니. 방을 하나하나 뒤져야 하나?

 혀를 차면서 코너를 돌다가, 필은 피투성이의 인영과 마주쳤다.


-


 “…소장님!”

 반쯤 공황 상태로 목적지를 잃고 서성이던 제 앞에 필이 나타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당장에 가장 반가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좀먹던 불안감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기쁘다 못해 벅찰 지경이었다. 방금까지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멸은 안심했다. 드넓은 공원에서 미아가 된 심정을 느끼는 것도, 두려움의 쳇바퀴를 돌리는 기분으로 미로 같은 복도를 헤매는 것도 끝이었다. 이제 어떻게든 될 거야. 문제는 지금 제 몰골이 어떤 상태인지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소장님, 대체 어디 계셨….”

 “누구야?”

 “네?”

 어느새 성큼 다가온 필이 평소와는 달리 자신의 팔을 강하게 붙잡는 것에 멸은 화들짝 놀랐다.

 만남의 초반에 의견 차이로 다투다 손가락을 꺾은 일 이후 최대한 제 몸을 다치지 않게 하려 애쓰던 사람이다. 몇 번 만지려 들고 그걸 피하길 반복하고 나선 닿더라도 언제나 자신이 놀라지 않게, 접촉을 인지할 수 있게, 허락을 구하며 답지 않은 상냥함을 베풀던 사람. 그 사람이 아주 오랜만에 조심성 없이 저를 꽉 붙들고 있다.

 소장님, 너무 세게 잡고 계신데요. 말을 꺼내 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는 손아귀. 천천히 놀라움을 가라앉히려는 찰나 필이 초점 없는 눈으로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누가 이랬느냐고.”

 그제야 멸은 제가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인지했다. 파편 위로 구르느라 온몸에 자잘하게 난 생채기들. 특히나 손이 심각했다. 손목 아래로는 원래 피부색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온통 피범벅에, 푸른색 연미복의 바지와 입고 있던 와이셔츠도 검붉은 액체로 흥건하게 물들어 있었다. 상황의 심각성 때문에,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치솟았던 흥분감 때문에 미처 인지하지도 못했던 아픔이 뒤늦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손끝이 온통 따끔거렸다.

 와중에도 자신을 붙잡은 손에 점점 힘이 실리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우뚝 버티고 서서 그늘을 드리운 필의 얼굴은 어떤 감정의 표출도 보이지 않고 깨끗했다. 오직 못 박힌 듯 멸에게 고정된, 붉은 기를 띈 눈만이 섬뜩하게 빛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눈을 통해 형용하기 힘든 수 가지의 감정이 읽혔다. 백지처럼 어떤 것도 읽을 수 없는 표정과 대비되는 눈이었다.

 멸은 제 소장의 이런 눈을 처음 보았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잊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만, 멸은 필이 거의 울고 싶어 한다고까지 느꼈다. 인간성과는 요원해 보이는, 앞으로도 요원할 남자가 저에게만 드러내는 감정의 치부.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선명한 처연함. 그게 괜히 안쓰러웠다. 안쓰러움이란 단어가 필과는 거리가 있다 못해 만나지 않을 평행선을 내달리는, 영원히 얽히지 않을 말이란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감정들, 필이 보여주는 일말의 인간성 때문에 멸은 아주 조심스럽게 피에 젖은 손을 뻗어 필의 어깨에 얹었다. 자신을 홀에 두고 나갈 때 필이 자신에게 그랬듯이. 혹시나 피 묻는다고 싫어하진 않을까? 뒤늦게 생각이 들었으나 필은 다가오는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냈다. 닿는 순간 손 밑의 몸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곧은 어깨와 건장한 팔, 손목께에서 느껴지는 심장 소리 같은 것들이.

 “저 괜찮아요, 소장님.”

 “지금 이 꼴을 하고서….”

 “정말이에요. 괜찮아요.”

 멸은 부러 반복해서 말했다. 괜찮아요. 참을만 해요. 아직 죽지도 않았고요. 봐요. 살아있잖아요.

 그 말에 필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렇게 붙잡고 계시면 더 아파요.”

 이어진 말에 강하게 붙잡고 있던 손이 다소 누그러지더니 천천히 허리로 내려갔다. 붙잡힌 곳이 간지럽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필이 제 고개를 멸의 어깨 위에 올렸다. 정확히는 맥이 뛰는 목의 바로 옆에. 마치, 귀 기울이듯.

 자신보다 한 뼘은 겅중 큰 남자가 무게를 실어오자 엉거주춤 서서 반쯤은 끌어안긴 모습이 되었다. 생소한 접촉에 가슴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반, 이대로 있고 싶은 마음이 반. 이중적인 감정 속에서 충돌하는 정신. 갈 곳을 잃은 손이 공중을 맴돌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필이 고개를 들었고 땀에 눌어붙은 머리칼이 약간 찐득한 감촉을 남기고는 떨어져 나갔다.

 이내 혹여 더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손길이 피에 젖은 양손에 맞닿았다. 멸은 그 행위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누군가 닿는 것을 싫어하는 제 성미치곤 이례적인 일이었다.

 필은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기고는 멸의 손을 살펴보았다. 대체 어쩌다 이런 거야? 그 말을 듣고 멸도 제 손을 바라보았다. 몸싸움 도중에 말려들어간 작은 유리 조각들이 마치 가시가 박히듯 손의 곳곳에 박혀 있었다. 아. 어쩐지 계속 따갑더라니. 그 때 멸은 제 손처럼 피로 젖은 필의 손목을 발견했다.

 “소장님도 다치셨잖아요.”

 “별 거 아냐.”

 “피가 나는 게 어떻게 별 게 아니에요.”

 필이 다시 인상을 구겼다. 그냥 스친 거야. 진짜 사소한 거니까 토 달지 말고 있어. 그래도…. 나오려는 반박에 필이 선수를 쳤다.

 “네 꼴부터 먼저 좀 봐라. 몸은 또 왜 그래. 어딜 어떻게 다친 거야.”

 필이 눈으로 피에 젖은 와이셔츠와 바지를 가리켰다.

 “아. 맞다.”

 멸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괴로워하던 이유를 떠올렸다. 손이 잘게 떨렸다. 필이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하도 떨어댄 통에 조각이 더 깊숙이 파고들었을 것이다. 창백해진 얼굴에 필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많이 다쳤어?”

 “이거 제 피 아니에요, 소장님.”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자 말을 꺼낼 기운이 들었다. 뒤집어쓴 피의 느낌이 더 생생하게 아려왔다.

 “제가 사람을 다치게 했어요.”

 멸은 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으레 나올법한 그의 비아냥을. 도덕 소년은 아니라더니 사실이었네. 내지는 그거 봐, 결국 너도 사람 해칠 줄 알잖아. 하는 말들을. 예상과 다르게 아무 답도 없었고 멸은 고개를 들었다. 필은 멸의 말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안심한 듯 보였다. 옷에 묻은 흥건한 피가 제 피가 아니라는 데에. 조금 전까지 날뛰듯 빛나던 눈에 안도가 스쳐 갔다.

 “…어쩌다 그랬는지 안 물어보세요?”

 “뭐하러?”

 “제가 사람을….”

 필은 순수하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게 뭐 어쨌는데? 어차피 정당방위 아니야?

 “그건 맞는데….”

 “쓸데없는 죄책감 느끼지 마. 어차피 안 죽….”

 “그 말 진짜 안 하시면 안 돼요?”

 멸은 다시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안 죽잖아. 빙글빙글 웃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더없이 재밌는 스포츠를 즐긴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파리 목숨쯤 일도 아니라는 얼굴로 웃던. 그는 지금 제가 떠나온 응접실에 누워 있다. 손등을 찔린 채, 제가 있는 힘껏 떠민 바닥에 놓여있던 큰 파편을 허리춤에 박아 넣은 채. 그 얼굴을 괜히 필과 다시 겹쳐보고 싶진 않았다. 타인의 살갗을 꿰뚫던 유리 조각의 감촉이 선명했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감촉이었다. 표정을 어둡게 하고 서 있자 필이 슬쩍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알았어. 안 해, 안 한다고. 어쨌든 너무 그러지 마. 방어한 거잖아. 안 그랬으면 네가 죽었을 거야. 안 그래? 그래서 녀석이 죽기라도 했어?”

 “아뇨. 피를 많이 흘리긴 했지만.”

 “그럼 괜찮아. 일단은 말이야. 어차피 발견되면 금방 나을 거야. 우등 체질이면 더 빨리 회복될 거고.”

 그 말이 작은 위로가 되었다. 양심의 가책을 완전히 떨쳐버릴 순 없었지만. 말하면서 필은 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양손으로 피 흘리는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연신 짜증스럽게 혀를 차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살폈다. 그 조심스럽고 섬세한 행동에 멸은 화끈거리는 가슴께를 느꼈다. 홧홧하게 도는 열기. 다쳐서 그런가? 그제야 두 번씩이나 얻어맞은 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명치를 좀 얻어맞긴 했어요.”

 필이 눈썹 끝을 올리더니 피에 젖은 와이셔츠의 가슴팍을 유심히 살폈다.

 “둔기로 얻어맞은 건 아니지?”

 “일단은 그런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쪽도 나중에 보여줘. 여기선 확인하기 힘드니까. 피 때문에 알아보기도 힘들고.”

 “진심이세요?”

 멸은 순간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는 거야, 이 사람이. 필은 지지 않고 우겼다.

 “갈비뼈에 금이라도 갔으면 어쩌려고 그래. 일개 타박상으로 치부하지 마. 우리 체질로는 작은 부상 하나도 치명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거 몰라?”

 “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렇다고 쳐요.”

 멸은 대충 얼버무렸고 필은 다시 멸의 피투성이 손을 살피며 속삭였다.

 “그래서 네가 다치게 했다는 놈은 어디 있는데.”

 “쭉 가서 오른쪽 응접실에요.”

 “그럼 일단 그리로 가서….”

 “-B팀은 본관으로 내려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앗. 하는 사이에 필이 멸을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복도 끝에 달린 좁은 붙박이장의 안쪽으로. 서둘러. 재촉하려다 멸의 손 상태를 떠올리곤 제 손으로 직접 문을 열고 멸을 인도한다. 숨을 죽이고 있자 우르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추적이 붙었군. 그리 말하며 필이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멸의 입가에 가만히 가져다 댔고, 멸은 가까이 붙은 남자의 체온을 느끼며 멀뚱히 구겨져 있었다.

 비좁은 내부 때문에 홀에서 부부를 가장하며 붙어있던 것보다도 서로의 몸이 훨씬 가까이 있었다. 멸은 제 맥박 소리를 느꼈다. 두근, 두근. 고조되는 박동이 어쩌면 필에게도 들리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필이 문 틈새로 스며드는 약한 빛에 의지해, 재킷과 조끼의 단추를 풀더니 칼을 들고 입고 있던 와이셔츠의 밑단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사는 데 돈깨나 썼다고 으름장을 놓던 그 옷이었다.

 “뜬금없이 옷은 왜요?”

 “움직이지 말고 있어 봐.”

 필은 부상에 관한 응급 처치에 도가 튼 사람처럼 보였고 뜯어낸 밑단으로 멸의 손을 꼼꼼히 감기 시작했다. 아주 능숙하게. 멸은 그 행동에서 상처에 익숙한 사람의 기운을 느꼈다. 언제나 스스로 제 살을 꿰매고 부러진 뼈를 맞추는 데 주저하지 않는, 죽음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기척을. 늘 혼자서 해결했을까? 작은 의구심이 솟았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혼자서? 혹은 도움을 받았을까?

 조금 따끔할 거야. 필이 말하더니 곧이어 살갗을 파고들던 조각들을 하나씩 빼내기 시작한다. 멸에게 미리 경고해놓고도 멸이 움찔댈 때마다 손놀림은 더 조심스럽게 돌아왔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이럴 때가 아니라니? 아직 의뢰 남은 거 몰라? 마저 완수하려면 최소한 손은 쓸 수 있어야지.”

 멸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되물었다. 의뢰요?

 “이 상황에서 완수할 수 있어요? 무사히 탈출하기만 해도 다행인데요.”

 “네 소장님 명성을 뭐로 보고.”

 필은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었고, 멸은 어째서 자신이 이 재수 없어 보일 정도로 자신과 확신에 가득 찬 얼굴을 싫어할 수 없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저를 뻔뻔하게 위험에 빠뜨리면서, 동시에 몇 번이고 구해주는 남자를. 나는 어쩌면….

 “이건 잠시 빼는 게 좋겠는데.”

 상처를 살피는 데 거슬렸는지 필이 왼손 약지의 반지를 가리켰다. 멸은 멍하니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내내 닿아있던 체온 덕에 미적지근하게 온기가 남아있는 얇은 금속이 거기 있었다. 거기서 시선을 거두며 필을 향했다.

 “아뇨. 지금은 그냥 끼고 있을게요.”

 그편이 안심이 되네요. 필은 입꼬리를 한번 올리고는 그럼 그러던지. 하고 감던 천을 마저 감았다. 다 됐어.

 “이제 나만 믿고 따라 와.”

 그가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는 어쨌든 멸이 믿을 수 있는, 믿어야만 할 사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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