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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날들_[필멸]Til death do us part(7)


Til death do us part(7)


 

 한동안 조용했던 복도에 목소리가 울렸다.

“살려주세요!”

 방을 지키기 위해 남아있던 두 명의 경호원은 당황했다. 가뜩이나 침입자 알림 때문에 비상사태인데. 저 앞에서 다급해 보이는 앳된 얼굴의 청년이 잔뜩 울상을 하고선 자신들을 향해 절뚝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는 꽤 고급스러웠을 게 분명한, 입고 있는 셔츠와 푸른색 바지는 군데군데 짙은 검붉은 색으로 물든 데다 뻗어오는 손에도 울긋불긋하게 얼룩진 천을 돌돌 감고 있었다. 연미복의 재킷은 어디다 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흡사 지독한 사건 현장에서 도망 나온 듯한 몰골이었고 그 차림새가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일 것 같은 선량해 보이는 얼굴과 어우러지자 처참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어 측은지심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러고 있지 말고 도와줘요!”

 청년이 연신 외치는 모습에 먼저 정신이 든 한 사람이 말했다.

 “…잠깐만. 저놈 저거, 혹시 오늘 행사용 물건 아니야?”

 쓰고 있던 선글라스 너머로 시선이 오갔다.

 “명찰을 안 차고 있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회색이면 신규일 건데.”

 “처음 보는 얼굴이잖아. VIP면 우리가 알 테니 저건 새로 온 게 맞겠지.”

 신입이 여기서 얼쩡거릴 일이 하나밖에 더 있어? 묻는 소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리 있네.

 “좀 심하게 다친 거 같은데.”

 “고용주가 힘 조절 잘못했나?”

 “에이, 설마.”

 “너 아직도 그 성깔머리 몰라? 지지난달에 있었던 건 잊었어?”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어차피 다쳐봤자 금방 낫는다고 장난질을 했으면 했을 작자다. 본편 들어가기 전에 좀 즐기겠다고 난장을 쳤을지 누가 알아.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저건 완전 피 웅덩이에서 한 바퀴 구르고 온 꼬라지잖아.”

 “저번에 당한 놈 생각해 봐. 역시 이번에도 자제 못 했나 보다. 하여간에 그 싸이코.”

 “그러고 보니 저게 왜 여기에 있지? 탈출했나?”

 다시 시선이 오갔다. 서로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사연이 어쨌든 보고도 놓치면 까이는 건 우리지.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 하나를 저 모양으로 만드는 고용주의 분노를 본인들이 직접 맞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일단 잡고 보자.”

 “야! 거기 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내가 붙잡아 올게. 생긴 거 보아하니 한 사람으로도 충분히 잡겠다. 그렇게 말하곤 앞서가던 동료가 갑자기 날아든 무언가에 맞아 눈앞에서 쓰러졌다. 어? 뭐였지?

 사태를 인지하기도 전에 뒤에서 달려든 매서운 주먹에 목덜미를 제대로 갈겨 맞은 경호원이 비명도 채 못 지르곤 까무룩 정신을 잃고 나가떨어졌다.

 멸은 제 상사가 훈련된 경비 둘을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눕히는 모습을 거의 기인열전을 보듯 바라보았다. 해결사 일을 하기 전엔 무슨 일을 했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어디서 용병이라도 뛰셨나?

 멸이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온갖 운동을 병행하고 파쿠르를 배웠듯이, 필도 엇비슷한 삶을 살아오기는 했을 것이다. 멸은 제 상사의 개인사에 대해 호기심을 품는 스스로에게 적잖이 놀랐다.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안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러나 무언가가 달라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보다는 필이라는 사람에 대한 순수한 궁금증이 그 저변에 존재했다.

 두 사람은 의식이 없는 경호원을 하나씩 맡아 질질 끌며 쓰러진 그들이 경비를 맡고 있던 복도 끝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방들 중 가장 은밀하고 구석지고 보안이 엄격했던 곳. 그들의 목적지, VIP룸. 널찍한 방은 일종의 회의실로 보였고 VIP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지만, 입구 바로 옆에 개인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마 시간이 되면 홀에서 여기로 직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둔 거겠지. 필이 설명했고 멸은 그것을 따로 설계하고 설치하는데 들어갔을 액수 자체에 순수하게 경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필은 깔끔하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경호원들을 한데 모아 묶고는 불만을 표했다.

 “마음에 안 들어.”

 “뭐가요?”

 “네가 굳이 나서서 미끼 노릇한 거.”

 다행히도 경호 인력이 지킬 사람이 많은 홀이 있는 1층을 비롯한 다른 층으로 많이 빠진 상태였다. 덕택에 필과 멸은 몇 남지 않은 수행원들을 수월하게 피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지금 제압한 둘만큼은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만 했고, 멸이 바람잡이로 나서느냐 마느냐를 두고 짧은 실랑이를 벌인 참이었다. 어쨌든 저기 들어가야 하잖아요. 제가 할게요. 미쳤어? 끝까지 반대하는 필이 붙잡기도 전에 멸이 혼자 경호원들을 향해 뛰쳐나갔고.

 “저도 딱히 내켜서 한 건 아닌데요.”

 제가 위험 무릅쓰는 거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시잖아요. 그렇게 말했는데도 필이 여전히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심결에 변명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무턱대고 돌입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제 인상은 확실한걸요. 전에 아샤 씨네 잡혔을 때도 그랬고, 아까도 그랬고, 이번에도 먹혔어요. 솔직히 남들 방심시키기엔 제격이에요.”

 멸은 구태여 덧붙였다.

 “저 혼자라면 모를까 소장님이 같이 계셨잖아요. 무슨 일이 생기기도 전에 소장님이 처리해주셨겠죠. 지금처럼.”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 네 명줄 함부로 걸지 말라고. …설령 상대가 나여도 그러면 안 돼.”

 필이 진중함을 담아 속삭였다.

 멸이 순하고 무해한 인상과는 달리 보기보다 계산적으로 움직인다는 걸 그는 나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특히나 무언가를 받아내야 하는 일이나, 생명과 연관된 일에서는 더더욱. 멸은 남들이 보기보다 순진하거나 멍청하지 않다. 이번에도 무턱대고 나선 게 아니다. 저가 구해주리라는 확신이 있으니 덤빈 것이리라.

 그럼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때보다도 더.

 “이놈들이 딱히 무기를 꺼내고 있지 않았으니까 먹힌 거지, 안 그랬으면 어림도 없어.”

 “하지만….”

 “옷 때문에 방탄복도 못 입었는데 총이라도 꺼냈으면 어떡할래. 무기반입금지여도 VIP급을 보호하는 경호원이면 예외에 속해. 충분히 갖고 있고도 남아.”

 필은 그렇게 말하며 기절한 경호원들의 허리춤을 탈탈 털어 위험해 보이는 것들을 구석으로 치우곤,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잠긴 서랍들을 하나하나 땄다. 전문가의 솜씨로 신속 정확하게. 와중에도 멸을 향해 끝없이 쏟아내는 잔소리가 여전했다. 자신을 향한 걱정에 기분이 묘해져서 멸은 괜스레 툴툴댔다.

 “마틸다 씨가 소장님은 효율적인 거 좋아한다고 그랬는데. 이번엔 왜 그러세요.”

 “걔가 언제 너한테 그런 말을….”

 필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마틸다의 저를 향해 맹렬히 타오르는 적개심을 생각하자 새삼스레 불안해졌다. 대체 그 녀석이나 다른 녀석들이나 나를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거야? 사람을 뭐로 보고. (물론 이것은 그가 한 짓을 봤을 때 마틸다나 바나쳇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경악할만한 생각이었다. 필에겐 진지한 의문이었을지라도)

 주변인들 사이에서 제 평이 안 좋은 것은 익히 알고 있었고 딱히 신경 써 본 적도 없었다. 그럼 그냥 이해하지를 마. 한마디로 정리하고 낡은 거미줄을 쳐내듯 걷어내 버린 관계들. 그러나 그 뒤에 고치처럼, 발자국처럼 남겨둔 악평이 멸의 귀에 들어간다면 사정이 달랐다.

 필은 치밀어 오르는 조바심을 꾹꾹 담아 누르며 하고 있던 일에 집중하려 애썼고, 방금 막 열어젖힌 서랍에서 전자식으로 잠긴 태블릿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서류 몇 장을 건져냈다. 그래도 조바심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데가 아니지. 나중에, 나중에. 필은 진정시키듯 제 이마를 손으로 주무르듯 누르며 말을 이었다.

 “효율도 상황 봐가면서 따져야지. 이건 네 안전이 달린 거잖아.”

 “…저를 잃었을 때의 비효율이 의뢰 완수로 얻는 효율보다 크니까요?”

 “효율 따위의 문제가 아니야. 그런 거랑은 아예 차원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 그러는 거야?”

 그 말에 멸의 귓가가 뜨거워졌다. 제 소장이 자신을 특별 취급하는 건 당연하다.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몇 번을 되새기며 멸은 마음을 다잡았고 필은 나름대로 하던 작업을 이어 가면서도 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선고하듯 말했다.

 “난 네 목숨값 가지곤 도박 안 해.”

 진심이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어떤 판에라도 제가 멸의 생명을 거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필의 행동 대부분을 결정하는 효율 우선주의에서건, 단순한 흥미로건.

 한때 그는 좀비 괴담 하나 확인하자고(좀비를 잔디 깎는 기계에 한 번 갈아보는 게 평생의 소원 중 하나였으니까!) 어둡고 축축하고 허술한 치안으로 악명 높은 하위 구역에 별다른 안전장치나 보험 없이 멸을 끌고 간 적이 있다. 만약 지금이라면 섣불리 그럴 수 있었을까? 지금과 같은 마음이었다면. 필은 저가 무심결에 사랑이라는 단어와 멸을 연관시킨 순간을 떠올렸다. 잠시나마 자신이 찾아낸 개념의 정의에 스스로 놀라고 환희를, 뒤이은 후회를 키웠던 그 때를.

 그건 독성이야. 사랑이라는 추상 관념에 필이 붙이고 있는 정의가 그랬다. 상투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스스로 눈을 찔러 멀게 하고 자기 손으로 마지막 남은 이성을 산산 조각 낸 뒤 그 어떤 얼간이 짓이라도 하게 되는 원흉이었고 무가치한 바보 놀음이었다. 필은 해결사의 삶을 살기 전에도, 그리고 살게 된 후에도 그 감정을 명분삼아 숱하게 미친 짓을 하는 자들을 봐왔다.

 목숨을 잃을 일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목숨 외의 다른 모든 것을 그 짓에 걸었다. 영원을 거는 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사람들은 영원 대신 명멸하는 찰나를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던져 가며 마음을 불살랐다. 개중에는 거의 중독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마치 그게 아니면 매달릴 게 없는 듯 병적으로 집착하는.

 필은 태생적으로 갖게 된 체질 덕에 세상을 투영하는 눈에 굳이 불필요한 감정을 포함하려 하지 않았고 그가 대분류와 소분류를 나눠 처리해버린 무수히 많은 어절과 단어와 정의 중엔 지극히 당연하게도 사랑을 비롯한 모든 감정적 교류가 들어갔다.

 그가 그것들을 아예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 잠시나마 아주 막연하게 원해본 적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져야 할 리스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이유가 부족했다.

 그래서 필은 그것들을 한데 몰아 비효율의 극치, 개념적으로만 알아도 별로 상관은 없는 것, 어쨌든 제 일생에 들어올 필요도 가치도 없는 것의 분류에 집어넣었다. 구태여 제 생명을 거는 위험을 질 필요가 없었다.

 짐승의 발톱처럼 파고드는 외로움을 물처럼 삼키며 사는 것을 견디다 못해 사랑하는 이에게 비밀을 폭로하고 결국 그 때문에 죽는 저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들을 보라.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비밀의 고백은 필연적인 파멸과 직결되었다. 모든 서사의 반복되는 클리셰. 그렇게 돌아가도록 짜 맞추어지고 정해진 톱니바퀴. 필은 그것을 감당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그 톱니의 부품이 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과 같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는 폭로의 위험도 결국 그렇게 정해져 있기나 한 듯 정해진 결말의 위험도 질 필요가 없다. 가장 마지막에 밝혀져야 할 진실은 첫 만남에서 이미 모두 드러났다. 장갑을 벗겨 아직 문신으로 가리지 않은 손바닥의 상처를 보게 했던 그 순간에, 서로를 확인하고 뚜렷하게 눈앞에 존재하는 동족을 느꼈던 그 순간에. 그때부터 제 안에서 멸의 위치는 확고했다. 자신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는 공감자, 가장 깊숙하고 내밀한 비밀의 공유자. 너는 나를 이해해야 해. 그렇게 만들 거야. 그는 제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들거나 웃거나 화내거나 우는 청년을 향해 몇 번이고 다짐했다. 나는 그렇게 만들 거야.

 상대가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사랑의 범주에 들어갈까? 너만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나를 이해해야 해. 나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고 납득하고 왜 이래야만 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고 떠올려야 해. 나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그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태초에 닿아 나와 나누어야 해. 제 반쪽이 될 가능성을 온전히 품은 유일무이의 이해자. 자신이 존재할 거라고 가정해본 적도 없으나 나타난 순간 제일 강렬한 갈구와 욕구의 존재로 화(化)하고 세상의 중심이 된.

 그 간절함이, 사랑이 되지 못할 이유는 어디 있겠는가?

 아가페건 에로스건 필리아건 뭐건. 그 어떤 명칭과 범주를 가져온대도 끼워 맞추려면 끼워 맞출 수 있는 게 그놈의 추상 관념이었다. 문제는 진득하게 매달려오는 후회였다.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제 안에 멸을 담을 생각이, 이 독성을 품을 생각이 없었다. 없었었다. 제가 품은 독은 필멸자로 생애를 시작하면서 품었던 덩어리 하나면 족했다. 그 작은 독의 무게 하나면 생애 전체를 살기엔 충분했는데.

 결국엔 행복한 결혼식 전의 해프닝으로 끝난(그렇다. 여기도 사랑이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 몰가 패밀리의 의뢰, 멸이 잡혀있었던 그때 마틸다는 인질로 잡힌 게 애인이냐고 물었다. 그는 답했다. 그런 거랑 차원이 달라. 그래. 아예 다르지. 논할 수 있는 층위 자체가 달랐다. 나는 결국 독을 품었어. 내 인생을 끝장낼지도 모를 독을. 너무 많은 독을. 비밀이 폭로되는 위험성이 없더라도, 사람들이 한낱 애정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필은 잘 알았다.

 누군가와는 다르게 필은 사랑을 구원의 방식으로 보지 않았고 멸은 제 구원자가 될 수 없었다. 구원. 고통과 죄악에서,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건지는 행위. 그들의 체질은 환경상의 어려움이나 위험에는 속할지언정 죄악이 아니었으며 구제받아야 할 무언가도 아니었다.

 오히려 필에게 있어 죽음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는 애초에 가져본 적도 없는 구원을 원할 바에야 모두를 필멸의 삶으로 돌려놓기를, 저와 똑같은 자리로 데려오기를 선택했다. 그렇기에 멸은 제 구원이 아니었다. 그는 저의 독, 저의 이해자, 저와 종말을 나눌 멸망이었다.

 필은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게로 다가와 저를 잠식하는 독성을.

 멸이 누가 오지는 않는지 살피는 동안 필은 마지막으로 입구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조작판을 따고는 회로를 뜯어냈다. 이걸로 시간은 좀 더 벌겠지.

 “근데 이제 어디로 가요?”

 파란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에 왠지 모를 쾌감을 느끼면서 필은 답했다.

 “네가 있었던 응접실.”

-

 기대한 바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이리저리 쏟아지듯 넘어진 가구들에 흙과 화분 유리가 뒤섞여 난잡해진 카펫과 바닥. 화분에 원래 심겨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이는 불쌍한 식물 하나가 가지가 꺾인 채로 구석에 놓여 있었다. 물론, 그것 외에도 바닥을 뒹구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저는 더 못 보겠어요.”

 멸이 제 행동이 야기한 결과물을 보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거기 그가 있었다. 넘어진 의자의 옆쪽에, 허리춤에 큰 파편이 박힌 남자가. 멸은 제게로 꽂히려는 날카로운 바늘을 피하려 남자의 손등을 찔렀다고 했다. 이어서 그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뗀 그 순간에 본능적으로 있는 힘껏 남자를 걷어차 떠밀었다고…. 그 위치에 남자에겐 운 나쁘게도 파편들이 있었을 뿐이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벌어진 모든 일의 결론이 여기 있었다.

 공황에 빠져 허둥지둥하며 피투성이 손을 어쩔 줄 모르고 헤매다 제 얼굴을 보고 구명줄을 잡은 듯 웃던 멸이 떠올랐다. 안쓰러울 정도로 상처 입은 손에서 흐르던 미적지근한 피의 감촉이 아직 제 손에도 남아있다. 박힌 파편들을 빼낼 때 꽤 아팠을 텐데도 멸은 소리를 내지 않고 참아주었다.

 필은 무생물을 내려다보듯 남자를 바라보았다.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웅크린 몸이 호흡에 따라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것 봐. 이것들은 절대로 죽지 않아. 지긋지긋하게도. 적어도 멸이 쓸데없는 죄책감을 지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으나 필은 자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나 이 남자에게 베풀 몫은.

 멸이 피를 흘리게 만든 남자. 어쩌면 피를 흘리게 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멸의 생을 끊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원래 자기들에게 하려고 했던 짓을 생각해보면. 물론 자신이 그렇게 되도록 놔뒀을 리가 없지만. 실제로 실현되었다면 제 손으로 멸을 죽이게 되었을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이 멸에게 죽던지.

 어느 쪽이건 영 유쾌하지 않은 가정이었으나 자신이 멸을 죽이는 것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의 목록에조차도, 그 어떤 일말의 가능성에 조차도 넣고 싶지 않았다. 필은 조용히 칼을 꺼내 들고 몸을 천천히 굽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멸이 기어코 한마디 했다.

 “…찌르실 건 아니죠?”

 “아니? 왜? 이미 찔려 있잖아.”

 이거에. 필이 허리에 박힌 큰 파편을 가리켰고 멸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작게 신음을 냈다. 필은 아랑곳하지 않고 칼을 들지 않은 손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잡았다. 멸이 작게 말했다.

 “굳이 인질을 잡아야 할까요?”

 “최소한 다음 층에 있을지도 모를 경호원을 피하려면 필요하지.”

 그래, 그 경비들 말이야. 다음 순간 필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 그러고 보니 경호원들이 여기는 안 들여다봤나? 저들 고용주가 이러고 자빠진 걸 봤다면 알아서 어련히 수습했을 텐데. 웅크린 남자가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아.

 “소장님!”

 그러니까 이건 필의 실수였다. 평소라면 몇 번이고 확인했을 것이다. 의식이 확실히 있는지 없는지, 제압이 된 상태인지 아닌지. 그러나 남자에 대한 순수한 분노, 솟구치는 맹목적인 파괴 욕구와 가죽장갑을 낀 제 손을 타고 흐르던 멸의 피에 대한 기억 때문에 필은 언제나 잊지 않던 것을 잊었다.

 유리 파편을 쥔 손이 목을 겨냥하고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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