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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날들_[필멸]Til death do us part(完)

에필로그를 포함합니다. 다시 전체 공개로 돌려두었습니다.


Til death do us part(完)


 “그래서 이젠 누가 인질이지?”

 멸은 귓가에 흐르는 제 피의 소리를 들었다. 들불처럼 질주하는 고동이 혈관의 벽을 쾅쾅 때리며 흐르는 소리. 필은 놀랍도록 차분한 표정이었다. 불시에 들고 있던 칼이 날아가던 순간에도, 제 목에 날카롭고 큰 파편이 겨눠지고 있는 지금도. 인질로 잡힌 사람치곤 지나치게 여유로워 이해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뚱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필이 국어책 읽듯 건조한 목소리로 짐짓 놀란 척을 했다. 상대를 대놓고 비꼬듯.

 “어이쿠. 깜짝이야.”

 저를 붙든 남자의 상처가 있던 자리를 흘긋 바라보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오. 이제 보니 우등체질인가 봐? 질기기도 하지. 남자는 입가에 피거품을 물고서 악을 쓰듯 말했다.

 “이…. 개자식들. 나한테 피를 보게 하다니…. 너희는 진짜 멀쩡한 몸으로 나가긴 글러먹은 줄 알아.”

 필은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 했다.

 “그거 내가 하고 싶은 말인걸.”

 “뭐?”

 “어째 익숙하다 싶었는데. 내가 아까 네 파트너를 딱 요 자세로 붙잡고 있었거든. 포지션이 반대긴 하지만. 궁금하지 않아? 네 파트너가 어떻게 곤죽이 되었는지.”

 “이 새끼가….”

 “소장님! 제발 좀….”

 느긋하게 상대를 도발하는 장면에 멸은 제가 다 아찔해 심장이 뛰었다. 남자의 눈에서 안광이 튀는 게 보였다. 안 돼. 안 돼요. 그 사람 도발하지 마요. 그러다 찔려요. 제발. 그 사람 정말 위험한 사람이에요. 소장님.

 필의 목을 당장이라도 따버릴 듯 닿아있는 유리 조각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을 알기는 하는 건지 필이 멸과 눈을 마주치더니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긴장으로 떨리는 입술을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제 입술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 표정을 번뜩이는 눈으로 보고 있던 남자가 씹어내듯 말을 뱉었다.

 “맘만 같아서는 이걸 당장 그어서 네 놈 척추를 아작내주고 싶은데, 그것보다 훨씬 재밌는 방법이 있잖아. 그러니까 참아야지.”

 눈에 담긴 경악으로 사색이 된 멸을 직시하며, 남자가 자유로운 한 쪽 손으로 입가의 피거품을 닦았다.

 “좀 빙 돌아오긴 했지만, 원래 하려던 방식으로 재미 좀 보자고.”

 파핫. 터지는 실소에 남자가 다시 눈을 가늘게 떴고 멸은 애간장이 타들어 가다 못해 거의 발을 동동 구르기 직전까지 갔다. 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웃던 필이 단박에 웃음기를 걷어내곤 답했다.

 “뭘 어쩌게? 블러디 메리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그놈의 블러디 메리. 그딴 거 없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어. 거기 너.”

 남자가 불현듯 멸을 지목했다. 잔뜩 창백해져서 안쓰럽게 떨고 있던 멸이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반응했다.

 “바닥에 있는 주사기 하나 주워.”

 아까 남자와 멸이 벌인 실랑이 덕에 약품 상자에서 떨어진 주사기 몇 개가 카펫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멸이 주저하자 남자가 험악한 표정으로 몰아세웠다. 당장 안 주워?

 “정 하기 싫다면….”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필은 목에서 따끔함을 느꼈고 멸은 거기서 더 핏기가 가실 수 없을 정도로 백짓장 같은 얼굴을 하더니 입을 뻐끔거렸다. 소장님.

 “할게요,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좀.”

 멸이 쪼그려 앉은 뒤 주사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으려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떨림 때문에 몇 번이고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물건을 향해. 툭. 데구르르, 툭. 데구르르. 그것을 보던 남자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곤 장난감을 손에 쥔 것 마냥 웃었다. 청신경을 파고들어 고막을 난도질하고 발작을 일으킬 것만 같은 웃음소리였다.

 제가 인질이 되어본 적은 여러 번 있었어도 제 상사가 눈앞에서 잡혀보긴 처음이었다. 감히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에 현실감을 잃고 어딘가를 부유하던 정신이 날카롭게 목을 노리는 파편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듯 깨어났다. 저게 필의 살을 파고든다고 생각만 해도 시야가 아득해졌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을 거야.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듯 되뇌어도 별반 도움은 되지 않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이럴 때마다 늘 외우던 베사메 무초조차도 나오지 못하고 의식 속으로 사라져갔다. 멸은 심호흡을 반복하며 아직도 베인 곳이 찌릿찌릿한 손끝에 힘을 주었다.

 “주웠어요.”

 금방이라도 다시 놓칠 것만 같아 주먹으로 꽉 붙든 주사기. 필은 눈썹을 한번 까딱했고 남자는 고갯짓을 하며 다음엔 저걸 주워. 하고 지시했다. 멸은 그대로 따랐다.

 “거기 떨어진 상자 안에서 왼쪽 세 번째 병 꺼내서 주사기 채워. 가득, 최대한으로.”

 “얼씨구? 뭐길래? 액상 메스암페타민? 엑스터시?”

 “그거보다 더 끝내주는 걸 맛보게 해줄 테니 닥치고 기다릴래?”

 “그래 봤자 고만고만한 마약이지.”

 “오. 믿어 봐. 이게 정말 재밌는 거거든.”

 멸이 날 선 대화에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병을 꺼내 들고 주사기를 채웠다. 필은 라벨에 붙은 스티커를 귀신같이 알아보았다. 뱀의 머리칼을 한 여자의 두상. 과연 센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필은 아무렇지도 않게 덤덤히 말했다.

 “뭔데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나 했네. 메두사?”

 “마약을 좀 아는가 봐?”

 “그냥 그렇다고 해두지.”

 이게 다 어니 덕분이었다. 브라보, 어니. 네가 세뇌 수준으로 해결사들 머리가 터지도록 불어넣은 온갖 마약 지식들에게. 뭐 하나 건수만 잡혔다 싶으면 자신들을 풀어 사냥개처럼 몰이 사냥을 시키고 공로를 받아가곤 하던 녀석. 그가 여기 있으면 정말 여러 의미로 환장을 했을 거라고 필은 생각했다. 몇 년 전 유행부터 최신 유행까지. 완전 제약회사인데? 블러디 메리에, 바바 야가에, 메두사에.

 같은 라인의 다른 약들에 비하면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위 말하는 각성이나 환각 등의 효력보다도, 그 부작용 때문에 사람 하나를 저며 놓고 싶은 조직에서 많이들 썼다. 과다 복용 시 전신 마비를 일으키는 현상 때문에 붙은 이름이 메두사였다. 돌처럼 굳어버린다고. 그 외에도….

 “혈관에서 불꽃이 튀는 거, 느껴봤어? 신경 하나하나가 조각나고 갈가리 찢기는 기분.”

 “그쪽이야말로 잘 아는데. 꽤 많이 즐겨보셨나 보지?”

 “적당량을 복용하면 말이야, 처음엔 그게 몸을 타고 짜릿 거리는 게 황홀경에 빠진 것만 같지. 번개가 지나가는 것 같고.”

 필의 비아냥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남자가 흥분해서 튀어 오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데, 이게 엄청나게 예민한 녀석이라 정해진 양을 조금만 넘겨도 말 그대로 혈관을 다 찢어놓거든.”

 남자가 필의 귓가에 기분 나쁘게 속삭였다.

 “덕분에 가학성애자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였는데. 혹시 그런 쪽에 취미 있어? 있으면 곤란하거든. 네 기분 좋아지라고 고른 게 아니니까.”

 목덜미에 느껴지는 더운 호흡에 필은 급격하게 기분이 더러워졌다.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닥칠 줄 모르는 저 입을 제대로 한 대 치고 싶었다. 필이 무슨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저 혼자 들떠서 이죽거렸다.

 “어차피 죽지도 않는다면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은 줘야지. 안 그래?”

 멸이 다시 손을 떨기 시작했고 필은 혀를 찼다. 굳이 남자가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약의 부작용을 직접 봐서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마틸다의 앞에서 아직 가면을 벗지 않았을 때 그녀와 함께한 합동 작전에서(당연히도 어니가 지휘했다) 이 약의 중독자를 뒤처리해본 적이 있다.

 터진 혈관 때문에 피부가 전신 화상을 입은 것처럼 울긋불긋한 데다 심각한 마비현상으로 인해 신경이 손상된. 이후로도 제대로 된 회복을 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이 시대에 생산되는 마약이란 게 그랬다. 무슨 짓을 해도 목숨을 잃진 않으니 점점 더 강하고, 자극적이게. 불멸자들이 가진 자가치유능력조차 압도할 수 정도로. 죽을 수 있는 자신이나 멸에게는 소량이라도 치명적이겠지. 멸은 이미 혈관을 찢는다는 대목에서부터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블러디 메리가 없어서 너희들이 서로를 직접 찢어놓는 걸 못 보는 건 아쉬워. 하지만 연인의 손에 고통을 맛보게 하는 방법이라면…. 그런대로 대체재는 있지 않겠어? 너, 까만 머리.”

 남자가 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 손으로 직접 이놈한테 주사를 놔.”

 “네?”

 “못 들었어? 네 손으로, 직접, 놓으라고.”

 “뭐야. 물어뜯게 하는 대신 주사를 놓으라니. 고상하네?”

 “닥쳐.”

 남자가 힘을 주자 조각이 더 깊게 파고들었다. 금방이라도 살갗을 찢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하지. 몰려오는 불안감을 몰아내며 멸은 필사적으로 변명을 짜냈다.

 “저, 저는 주사 놓는 방법도 모르는 걸요. 무리에요.”

 “내가 알 바 아니야. 목이건 팔뚝이건 그냥 찔러. 어떤 방식으로건 네가 직접 해. 그러지 않으면 이 녀석의 척추를 끊어내 버릴 거야. 다시는 회복할 수 없도록 망가뜨리면 어떨 거 같아?”

 궤변이에요. 멸은 차마 그 말을 뱉지 못하고 삼켰다. 어차피 남자가 필을 해치나 자신이 놓는 주사가 필을 해치나 별 차이가 없었다. 결론이 같았으니까. 필은 버티지 못한다. 절대로.

 자신이 주사를 놓았을 때 필에게 벌어질 일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차갑게 살과 근육을 꿰뚫는 날카로운 금속과 약물을 몸속으로 욱여넣는 피스톤. 남자의 말대로라면 약물은 필의 심장박동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며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짓이기고 찢어발길 것이다. 불멸자라면 그러고도 살아남을 수야 있겠지. 하지만 필은 거기서 끝이다. 회복 불가. 되돌릴 수 없는 시계침의 끄트머리.

 “저는….”

 “해.”

 차분한 목소리에 눈을 마주하자 뜻밖에 낮고 부드러운 적갈색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꿰뚫리는 것만 같았다. 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까 주사해.”

 “대체 무슨….”

 어안이 벙벙했다. 뭐가 괜찮다는 거지? 필이 반복해서 말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그냥 해.

 “거 눈물 없인 못 보겠네. 야. 네 남편이 하라잖아. 얼른 놔버려. 냉큼.”

 남자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멸은 손에 든 주사기를 내려다보았다. 보호소에서 2년 남짓 봉사활동을 하며 안락사를 겪고 제 곁을 떠나가던 개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멸에게는 가슴이 조각나고 무너지는 파고(波高)의 무덤, 상실의 비탄이었지만 적어도 개들에겐 고통 없는 죽음이었다. 이 주사는 다르다. 필이 겪을 고통은. 설령 만에 하나 운 좋게 살아나더라도 생살을 뜯어내고 신경을 바수는 감각은 필을 철저하게 망가뜨릴 것이다.

 그러니 괜찮지 않다. 멸은 괜찮지 않았다. 필이 괜찮다고 해도 저는 괜찮지가 않았다. 필이 제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망가지는 것을, 호흡을 멈추고 맥박을 세워 끝내는 무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괜찮다는 필이 야속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제 인생에 들어오질 말든지. 그때 나를 총에 맞아 죽게 놔두고 제 갈 길을 가버리던지. 애초에 시작을 말지.

 그들의 첫 만남에서 이것과 정확히 반대의 상황이 있었다. 총을 겨누며 자신을 인질로 삼고 위협하던 바실. 멸의 체질을 파악하자마자 필은 깔끔하게 무기를 포기했다. 총알이 빗나가서 그의 머리나 다리에 맞았다면? 필은 그런 가능성은 염두에도 두지 않은 사람처럼 자신의 목숨을 걸고 멸의 목숨을 건져냈다. 소장님, 그러지 마셨어야 했어요. 그렇게 쉽게 괜찮다고 말할 거였다면,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릴 거였다면요.

 필은 몇 번이고 멸을 구해냈고 기꺼이 그를 염려했고 신경 쓰고 나름의 방식대로 위로했다. 멸이 쌓아버린 담을 허물고 무너뜨리고 종내는 잿더미로 바꾸면서. 아무도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두었던 그 선의 한 귀퉁이를 지워내면서까지. 들어와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나누고 생명을 나누고 죽음을 나누고. 존재하기 전에는 그렇게 절실한 줄도 몰랐던 두 사람분의 시간.

 그는 기어코 그가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자신이 필을 생각하게 하고 걱정하게 했다. 멸은 필이 자신에게 주는 위안의 생경한 안정감에 깜짝 놀랐다. 자신을 주시하며 허락을 구하는 눈, 제가 거기 있음을 확인하듯 매달려 오던 손, 목에, 어깨에 기대 체온과 맥박을 나누던 순간들. 이미 한 번 얻었던 것들을 다시 잃을 수 있을까? 제가 평생 얻지 못하리라고 확신하고 포기했던 것들을. 맞닿았던 손에 거짓 맹세로 끼워진 결혼반지가 있었다. 필이 급조해서 감아준 피투성이 붕대의 아래에 여전히. 제가 빼는 것을 거부했으니까. 그때, 손을 깍지 끼고 부드러운 온기를 나누며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에 나눈 대화에서 필이 말했었다. 네 방식대로 해. 네가 반려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방식.

 갑자기 평온함이 물밀듯 밀려들어 왔다. 불안감이 어떤 임계점을 넘어 아무렇지도 않은 영역으로 미끄러지듯 헤엄쳐간 기분이었다. 머리가 맑아졌다. 붙들려 있는 필의 고요한 눈을 직시하자 천천히 이성이 되돌아오고 머리가 차분해졌다. 손이 더는 떨리지 않았다. 파편을 쥔 남자가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대치 상태를 유지하면서 멸은 천천히 주사를 제 팔에 가져다댔다. 남자가 낮게 말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제 방식대로 하고 있어요.”

 필이 미간을 좁히며 멸을 바라보았다. 멸은 쉽게 괜찮다고, 자신을 해쳐도 괜찮다고 말한 필에게 화가 나 있었다. 아니. 나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건데요. 그것은 필을 향한 일종의 시위였다.

 “저한테 주사할게요.”

 “장난해?”

 “그게 나아요.”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야, 이것 봐라.

 “진짜 죽고 못 사나 봐? 상대가 고통받게 하느니 스스로 받으시겠다? 꿀 떨어진다, 아주?”

 “그만둬.”

 필이 여유를 지우고 험악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바늘이 아슬아슬하게 멸의 팔에 닿아있었다. 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한 눈으로 시선을 맞받아쳤다. 아. 저거 진짜야. 저 녀석 지금 진심이야. 필은 벼락같이 깨달았다. 필은 저를 붙잡은 남자를 향해 말했다.

 “야, 너. 당장 나 찔러.”

 “뭐?”

 던져진 요구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소리를 냈다. 이것들이 지금 뭐하자는 거야? 필의 형형한 눈빛이 멸을 향했다.

 “당장 그거 너한테서 치우고 나한테 주사해. 안 그러면 이놈한테 당장 나 찌르라고 할 거야.”

 “찔러준다고 안 했는데? 지금 너희 나 가지고 노냐?”

 원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자 머리끝까지 성질이 난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겨우 인질을 잡아서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하려고 했는데, 이 사랑에 눈먼 듯 보이는 미친 불나방들이 그러느니 차라리 스스로를 해치겠다고 하고 있었다.

 “아니지, 내가 원했던 건 그런 게 아니라고. 니들 사랑이나 굳건해지라고 이런 번거로운 짓 하고 있는 줄 알아? 어이가 없어서. 검은 머리. 당장 니 남편 말대로 해.”

 다음 순간 바늘이 멸의 살갗을 꾹 하고 눌렀다. 이미 결심한 것을 바꾸지 않겠다는 고집 있는 손. 멸은 더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주사기의 피스톤뿐이었다. 서서히 힘이 들어가는 압력의 선단.

 이성이 거의 날아갔다. 필은 남자를 향해 급히 몸을 틀었다.

 “너 뭐해? 당장 나 찌르라고!”

 “뭐? 이 ㅆ…, 헉!”

 갑작스럽게 요동치는 몸에 당황한 남자가 목에 겨누고 있던 손을 뺐다. 아니, 누구 좋으라고 찔러달라는 거야, 미친! 그런 생각은 곧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 아, 아.

 절대 작지 않은 체격의 인질이 있는 힘껏 들이대면서 우르르 무너지는 균형. 남자는 반사적으로 팔을 크게 휘적거렸고 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뒤에서 소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겹친 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 순간이 멸에게는 느릿한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남자가 몇 번이고 팔을 휘둘렀다.

 “…소장님!”

 멸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거센 몸부림이 넘어진 가구들 사이에서 요동치는 것을 보았다.

 멸은 누군가의 피가 튀는 것을 보았다.

 멸은 힘없이 무너지는 몸을 보았다.

 멸은 얽힌 윤곽 속에서 피에 젖은 회색의 머리칼을 보았다.

 멸은 지옥 같은 정적 한가운데에 서서, 두려움에 떨며 흐르기 시작하는 검붉은 웅덩이를 보았다.

 툭. 들고 있던 주사기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떨리는 발을 뗐다. 도저히 제대로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시야가 흐려졌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봐야 해. 아니야, 보고 싶지 않아. 만약, 만약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는 두 사람의 인영이 뿌연 눈가에 어렴풋이 보였다. 멸은 아주 느린 속도로 붉게 젖은 회색의 머리칼 쪽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손을 뻗었다.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손끝이 조심스럽게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어 갔다.

 “그러지 마요.”

 저도 모르게 애원이 튀어나왔다. 그러지 마요.

 “가지 마요.”

 “…너 미쳤어?”

 짜증으로 가득 찬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참고 있던 눈물이 솟구쳤다. 멸은 필사적으로 필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절실함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야, 나 안 다쳤거든? 필의 말을 무시하고 재차 만지고 확인하고. 혹여 손끝에 걸리는 상처는 없는지, 저가 못보고 지나친 부상은 없는지, 어디선가 피가 흐르고 있진 않은지. 필이 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야.

 “답지 않게 왜 그래?”

 “안, 안 다치셨다면서. 왜, 흑, 왜 계속 누워계시는데요.”

 “부딪혔어. 어지러워서 잠깐 쉬는 거야.”

 필이 제 머리 쪽을 가리켰다. 넘어지면서 제대로 박은 모양이었다. 멸은 덜덜 떨면서 다시 필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찌, 찢어졌어요?”

 그래서 피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머리에 피가…. 필이 손을 저었다. 아니야. 피는 저 쪽 거고. 뻗어버린 남자는 이번에야말로 미동이 없었다. 파편이 목을 가로지르듯 꿰뚫고 있었다. 끄륵. 상처에서 이는 피거품에 멸이 고개를 돌렸다. 필이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급소를 찔러버렸네. 정신이 없더라. 이번까지만 봐줘.”

 “상관없어요.”

 멸은 반복해서 힘주어 말했다. 상관없어요. 필은 크게 한숨을 쉬곤 갑자기 인상을 팍 구겼다. 너 이 자식.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내가 설마 믿는 구석도 없이 놈을 도발했겠어? VIP룸은 괜히 간 건 줄 알아? 거기 있던 태블릿에….”

 안도감에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자신의 몸을 꽉 붙들고 있는 멸을 보자 뒤이어 나오려던 잔소리가 멈췄다. 다 큰 성인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꼴사나울 정도로 울고 있는데, 그게 다 저 때문이었다. 눈가가 새빨갰다. 제 몸을 붙든 주먹을 너무 세게 쥔 나머지 손을 감싼 천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안 다쳤어요? 몇 번이고 되묻는 말. 필은 가죽장갑을 벗곤 조용히 손을 뻗어 멸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빼지 않고 기대오는 둥그런 얼굴이 주는 온기가 만족스러웠다. 맞닿은 살 위로 느껴지는 적당히 안온한 눈물의 온도와 저를 놓지 않을 것처럼 힘껏 붙들고 있는 손아귀가 주는 안정감.

 튼튼한 지반보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불안정한 흔들다리에서 만난 상대에게 심리적으로 더 끌리는 현상. 사람들은 보통 그걸 흔들다리 효과라고 불렀고 필은 멸이 느끼고 있는 게 그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만 같은 불안감과 정서적 스트레스를 겪는 이들이 긴장으로 인한 감정을 끌림으로 착각하는 것. 굳이 말하진 않았다. 알려줄 필요도 없었고. 멸이 다시금 물었다. 이번엔 정말로 괜찮아요?

 물음에 답하는 대신 필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 때문에 한층 흐려진 푸른색의 눈이 보였다. 필은 상체를 일으키곤 질문하듯 이마를 맞대고 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승낙하듯 청년의 눈이 감겼다.

 그래서 필은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멸에게 입 맞췄다.

 멸은 피하지 않았다.



Epilogue

 마법 같은 잠시간을 깬 것은 바깥에서 달려가는 경호원의 발소리였다. 필과 멸은 빛의 속도로 떨어졌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탈출구를 찾았다. 이따금 얼굴을 붉힌 멸이 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평소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필은 의식이 없는 남자를 들쳐 메곤 경비를 피해 비상계단으로 멸을 이끌고는 뒤쪽 통로로 빠져나가도록 종용했다. 너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맨 처음 들어왔던 주차장에서 기다려.

 “소장님은요?”

 “그건 내가 다 방법이 있어. 의뢰는 마저 끝내야 할 거 아니야.”

 “하지만….”

 나오려는 반박을 필은 단 한마디로 틀어막았다.

 “아니면 우리 하던 거나 마저 할래?”

 멸은 언제 거기 있었냐는 듯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 사라졌다. 필조차도 잡을 수 없는 잽싼 몸놀림으로.

*

 하나, 둘, 셋. 세 명. 이 정도면 되려나. 필은 근처에 기절시켜 두었던 경호원 둘과 의식을 잃은 남자를 발치에 둔 채로 메인 홀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패널을 조작해 안쪽에서만 열리도록 작업해둔 참이었다. 야. 구둣발로 남자를 차자 캑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놈의 우등 체질. 질기기도 하지. 파편이 박힌 목이 부글거렸고 세포의 재생이 눈에 보였다. 필은 감정 없는 눈으로 가차 없이 조각을 뽑아냈다. 큰 기침 소리가 좁은 엘리베이터 안을 울리는 것을 들으며 품 안을 더듬어 주사기 하나와 약병 하나를 꺼냈다. 진분홍색 라벨로 포장된 약병. 3번 방에서 덤벼들던 직원을 때려눕히고 혹시 몰라 따로 챙겨두었던 것.

 “네가 그렇게 찾던 블러디 메리 여기 있네.”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는데 못 찾아서 좀 억울하겠어. 비꼬는 말에도 남자는 답이 없었고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곧 정신이 들지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필은 1층의 버튼을 누르곤 엘리베이터를 잡아끄는 중력을 느꼈고 로비에 도착하는 시간을 빠르게 계산했다. 대강의 암산이 끝나자 주사기의 끝이 약병에 꽂혔다. 약물이 뒤로 빠지는 피스톤의 빈 공간을 가득 채웠다. 투약량은 알고 있었다. 전에 멸이 언데드 매치에 참여했을 때, 빌리언 다이아몬드에게 의뢰를 받았던 그때에 이미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해 본 적이 있으니까.

 필은 챙겨온 칼로 세 사람을 묶고 있던 벨트를 끊어내곤 피스톤을 살짝 눌러 주사기 끝의 공기를 빼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비즈니스 관계를 위해서라도 어니에게 의리를 지켜주기로 했다. 문자 전송. 월척 있음. 블러디 메리. 호텔 위치까지 전송하고 나니 1층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손에 들린 주사기의 예리한 바늘 끝에서 그 유명한 피의 메리가 방울져 떨어졌다. 필이 의식 없는 남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걸 그렇게나 좋아하는데 내가 소원 성취는 해줘야지.”

 띵. 로비에 도착하는 쨍한 알림음에 경호원들의 시선이 쏠렸다. 뭐야. 뭐가 내려온 거야? 문이 열리자 피 묻은 양복을 입은 세 사람이 겹쳐서 움찔대는 게 보였다. 엘리베이터 천장의 문이 열린 채로 불길하게 덜렁거리고 있었다. 삐걱, 삐걱.

 “어? 잠깐만. 저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이 울렸다.

*

 홀에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터진 비명과 유혈 사태에 당황해 우왕좌왕했다. 살려줘! 누가 경찰을 불러! 연이어 터지는 비명과 입구 쪽에서 쓰러지는 사람들. 자주색 새틴 정장을 입고 있던 중년 남성은 다른 이들과 함께 옆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누군가 발을 걸어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그대로 무사히 빠져나갔을 것이다.

 “악!”

 손가락이 부러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져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혼비백산해 덩어리처럼 움직이는 사람들로 인해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으악! 한 번 더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자 저 멀리서 부인이 달려왔다. 여보! 그는 자신을 부축하는 부인의 손을 잡고 일어나 불타는 것처럼 고통을 호소하는 손을 쥐고 달렸다. 멀리서 경찰차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손에 있던 결혼반지가 사라진 것을 깨달은 건 담요를 덮은 채 응급차 안에서 떨고 있을 때였다.

*

 한동안 SNS와 뉴스피드는 상류층의 사교 클럽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들썩였다. 특히나 유명세를 떨친 것은 학대와 강제된 폭력에 가까운 언데드 매치가 벌어지는 현장과 그것을 주관하고 있는 대기업 자제들의 모습이 찍힌 CCTV 테이프였다.

 영상에는 이번 유혈사태의 중심에 있었던 굴지의 대기업 라이헨(Laihen) 코퍼레이션 막내아들의 얼굴도 있었다. 금지된 약물인 블러디 메리 과다 투약을 비롯하여 불법 언데드 매치, 그 외의 여러 가지 죄목으로 중형을 피하기는 어렵게 된.

 쟁쟁한 변호인단들이 어떻게든 구형을 낮춰보려 용을 쓰고 있었지만, 그가 블러디 메리 투약으로 이성을 잃고 공격한 고위 인사가 한 둘이 아니었던데다 중상을 입은 사람들도 다수였다. 급소를 공격당한 몇 사람은 아직도 의식이 왔다 갔다 할 정도였다. 강제로 투여된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인터뷰가 연신 올라왔으나 악취미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제의 언데드 매치 CCTV 영상 때문에 너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게 대중의 반응이었다.

 […그 영상은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완수율 1위의 해결사를 뭐로 보시고. 다 방법이 있는 거 아닙니까.”

 멸은 능청스럽게 의뢰인의 통신을 받고 있는 필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영상의 출처를 알고 있었다. 호텔 밖에 서 있던 제게 어느 틈엔가 목표물이었던 반지를 들고 다가온 필이 알려주었던 것이다. 내가 말했잖아. VIP룸에 괜히 간 것 같냐고. 거기엔 늘 건질 만한 게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거든. 필이 서랍을 따서 꺼내 들던 태블릿이 스쳐 지나갔다. 인질로 잡힌 와중에도 여유로웠던 게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필은 실제로 여차하면 태블릿의 영상을 방패 삼아 남자를 협박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멸에게 주사를 놓으라던 것도, 괜찮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차피 진짜로 멸이 하려고 했다 해도 바늘이 채 꽂히기도 전에 남자를 구슬릴 자신이 있었으니까. 구슬린다기보단 굴복시키는 것에 가까웠지만. 까짓 가소로운 애송이쯤 별일도 아니지.

 물론 필이 멸을 호텔에서 내보낸 뒤 벌어진 일련의 블러디 메리 유혈 사태에 대해선 멸은 어찌 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저 필을 향해 설마 소장님이 또? 라는 의구심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필은 그 눈을 모른척했다.

 “어쨌든 여기 있습니다.”

 얼굴을 가린 채 화상통화 중인 의뢰인의 눈앞에 필이 반지를 꺼내 흔들었다. 안쪽에 이니셜이 음각된 결혼반지. 의뢰인이 요구했던 최종 목표.

 [이렇게 요란하게 해달라는 건 아니었어요.]

 “해냈으니 된 거 아닙니까?”

 [일을 너무 크게 쳐놨….]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신규회원들이 지는 리스크에 대해서 말씀 안 하셨죠. 그 부부동반 언데드 매치 말입니다. 신분증을 위조해서 들여보내 줄 정도면 사교 클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고 있었을 텐데.”

 필의 말투가 위협적으로 변했다.

 “저는 그렇다 쳐도 제 직원이 좀 다쳤거든요. …저는 그걸 아주, 아주 싫어합니다.”

 의뢰인은 답하지 않았다. 필이 싸늘한 눈으로 화상화면을 보고 있었다. 멀찍이 서 있던 멸이 눈을 둥글게 뜨곤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손에는 의료용 드레싱을 칭칭 감은 채였다.

 필은 아직 멸의 피가 흐르던 감촉을 잊지 않았다.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다 예상하고서도 알려주지 않은 것은 분명 고의겠지. 위험하다는 걸 알면 거절당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상대가 의뢰인만 아니었다면 필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신원을 알아내 그 혹은 그녀를 끝장냈을 것이다. 제 손으로 직접, 신분과 관계없이,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그 무엇도 제게서 멸을 앗아갈 수 없다.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비긴 거로 칩시다. 비밀 유지 조항은 끝까지 지켜드리죠.”

 […계좌 확인하세요.]

“반지는 어떤 경로로 보내드리면 되죠?”

 [다시 한 번만 보여주시겠어요? 화면 가까이. 안쪽이 잘 보이도록.]

 필은 순순히 의뢰인의 요구대로 했다. 의뢰인은 한동안 말없이 반지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버려버려요.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올 일 없게. 용광로 같은 데에 던지던지.]

“뭐라고요?”

 필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반문했다. 표정에 대놓고 아니 그럴 거면 왜 이 고생을 시킨 거냐는 짜증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저는 그게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합니다. 나를 배신한 사람에게 그 반지가 계속 있는 게 싫었을 뿐이에요.]

 “뭡니까? 불륜 상대기라도 했나 보죠?”

 [답하지 않겠습니다.]

 정곡인가 보군. 그깟 치정 놀음에 이 개고생을 시키다니. 차오르던 불만은 계좌를 확인하고 즉각 집어넣기로 했다. 원래 받기로 한 착수금보다 배는 더 많은 돈이 들어와 있었다. 침묵 유지비용이라 이거지?

 [반지를 처리한 뒤 처리한 사진을 찍어서 보내세요. 그럼 우리 관계는 끝입니다.]

 “그 정도야 해드리죠.”

 [그럼 이만.]

 뚝. 통신이 끊겼다. 대화를 듣고 있던 멸이 물었다.

 “그래서 어쩌시게요, 반지?”

 “의뢰인이 원하시는 대로 철저히 파괴해주면 되지. 모르도르까지 가서 용암산에 빠뜨리면 별 불만 없겠지.”

 “네?”

 “구역 외곽에 쓰레기 소각로가 있어. 거기 던지면 돼.”

 지금은 말고. 너무 힘들었으니까 일단 좀 쉬자. 필이 길게 한숨을 뱉으며 와이셔츠의 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다음 의뢰는 좀 덜 번거로운 게 왔으면 좋겠네. 하여간 이놈의 인기. 멸은 뒤의 말은 무시하고 앞의 반만 동의했다. 맞아요. 다음 건 좀 편했으면 좋겠어요. 필이 물었다.

 “상처는 괜찮아?”

 “네. 이번에도 닥터 노스가 잘 봐주셨어요. 흉터는 남지 않을 거래요.”

 그것 참 아쉬운걸. 필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어쩌면 멸의 손에 제 것과 똑같은 흉터가 남을 수도 있었을 텐데. 기묘한 섭섭함을 몰아내며 침묵을 지키다가, 필은 참고 있던 말을 꺼냈다.

 “멸.”

 “네?”

 “하나만 확실히 해두자.”

 “어떤….”

 “그때 그거, 만약 네가 싫었다면.”

 필은 잠시 멈추었다가 멸과 눈을 마주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입맞춤. 그땐 두 사람 다 경황이 없었고 절박했다. 확인할 것은 확인해야 했다. 그것이 그저 찰나의 안도감과 충동에서 발현된, 서로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종의 종교의식 같은 절차에 불과했던 건지. 아니면….

 “싫었다면, 나는 두 번 다시 너한테 그런 식으로 접촉 안 할 거야.”

 말을 뱉어 놓고도 필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손을 느꼈다. 장갑 안에 서서히 땀이 차고 있었다. 스스로도 무슨 대답을 원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독성을 품기로 했어. 너는 어떻지? 내가 원하는 답은 뭐지? 멸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고 대답은 아주 천천히 흘러나왔다.

 “…싫지는 않았어요.”

 필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말 한마디가 지니는 가능성의 무게를 그는 알았다. 멸. 자신을 죽이느니 스스로 죽음의 약물을 택한. 저의 이해자, 저의 독성. 의뢰인의 반지를 없애더라도, 둘이 위장을 위해 맞춘 반지는 소각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혹시 모르지. 위장이 아니게 될지도.

 그 순간, 두 사람은 줄곧 함께일 것이라고 필은 확신했다. 그들만이 공유하는 것, 오직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인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Til death do us part(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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