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불멸의 날들_[필멸]Let it Snow

오늘 제가 있는 지역에 첫눈이 와서 쓴 짧은 글. 마지막에 언급되는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


Let it Snow


 드라이브 인 모텔은 프런트부터 주차장까지 가득 찬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웃돈 더 얹어준다니까! 안 된다고요! 방이 없어요! 모텔의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구역의 경계에 그대로 발이 묶인 것을 한탄하며 주차장을 서성이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마침 주말이었던 점과 구역 간을 넘어가는 유일한 교차로라는 점이 맞물려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필은 솟구치는 짜증을 억누르며 가지고 있는 총으로 모든 사람을 한 방씩 쏘면 좀 조용해질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멸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말을 걸어왔다.

 “저는 굳이 방 안 잡아도 괜찮아요. 차에 가요.”

 “너나 괜찮지. 나는 제대로 된 매트리스 위에 발 쭉 뻗고 쉬고 싶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뭘 어쩌겠어요. 정 싫으시면 저 혼자라도 가 있을게요. 차 키 주세요.”

 이것 봐라. 멸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그건 필에겐 일종의 시위로 받아들여졌다. 어딜 단독으로 움직이려 들어. 주차장에 질이 좋아 보이지 않는 녀석들도 꽤 있던데. 필은 잠자코 서서 뚱한 표정으로 멸을 내려다보다 나직하게 내뱉었다.

 “너처럼 만만한 인상을 해선 고급 차 안에 혼자 앉아 있으면 시비가 안 털리겠냐?” 

 “우와. 폭언….”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데요.” 

 멸이 입을 뾰족 내밀고는 반문했다. 추위 때문인지 내민 입술이 연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필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로비 직원에게서 뜯어낸(어려울 게 없었다. 그가 타고난 얼굴로 활짝 미소 한 번만 지어주면 끝이었으니까) 담요며 쿠키 봉지며 코코아가 든 보온병을 바리바리 챙겨 들고는 멸과 함께 자신의 차가 주차된 바깥으로 나섰다. 그 사이 눈발이 더 굵어져 있었다. 창백한 백색 빛을 내뿜는 모텔 간판이 추위 속에서 깜빡거리며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이례적인 폭설입니다. 차 안에 틀어박혀 튼 라디오에선 차분한 목소리의 여성 디제이가 구역별의 일기예보를 읊어주고 있었다. 이번 폭설은 근 10년간 최고치를 경신하며…. 도로 상황의 악화로 구역 간의 통행이 제한…. 그게 이유였다. 자신들이 평소라면 들리지도 않았을 허름한 드라이브 인에까지 머무르면서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리며 발이 묶인 이유. 

 아까 막 의뢰를 끝마친 참이었다. 사멸교와 관련이 있을까 해서 받았던 의뢰는 결국 허탕으로 끝났으나, 필은 흔쾌히 멸에게 주말 근무 수당을 약속했다. 어쨌든 일한 건 받아야지. 네? 당연히 주셔야죠.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멸은 제 소장의 제안에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풀나풀 내리던 눈발이 점점 험악해지고 굵어지면서 재난 영화의 도입부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더는 운전조차 무리이다 싶어질 즈음 필이 모텔의 간판을 발견했고, 멸은 필이 언젠가 보여준 공포 영화의 첫 장면을 상상하며 느낌이 좋지 않다고 질겁했다. 왜. 꼭 이런 데서 모텔에 연쇄 살인마가 있잖아요. 필은 딱 잘라 말했다. 바보냐? 지금 시대에 살인이 어디 있어. 만약 네 말이 맞으면 일이 재밌어지기야 하겠다만. 이러쿵저러쿵 주고받으며 들어온 모텔은 싸늘하고 창백해 보이는 외관과는 다르게 두 사람과 같은 처지로 발이 묶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붐볐고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결국 다시 이 지점이다. 낡았어도 최소한 제대로 된 난방과 침대가 존재하는 모텔방 대신, 주차장 구석 응달 아래 덩그러니 홀로 세워진 차 안. 히터를 최고 단계로 높이자 추위는 가셨으나 건조한 공기 때문에 얼굴이 버석거렸다.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입술에 푸른빛을 띤 멸이 패딩을 목 끝까지 올려 입고 있었다.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필은 말없이 라디오를 끄곤 보온병을 건네주었다.

 “그러게 나만 믿고 맡겨뒀으면 멀쩡한 방 하나는 얻어냈을걸. 뭐하러 고집부린 거야?”

 “반대에요. 고집을 꺾은 거죠. 저렇게 시끄럽고 사람이 많은데 무슨 수로 방을 구하겠어요. 설령 구한다고 해도 저희보다 돈을 많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쫓겨날지도 모르고.”

 “너 은근히 포기가 빠르다?”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부딪히는 상황 만들어서 좋을 게 없어요.”

 그 말 한마디에 필은 저를 만나기 전의 멸의 생애를 그렸다. 다치고 구르면서 얻어낸 온갖 유연성과 회피력과 체력과…. 위험을 피하려는 자세. 이런 체질로는 이렇게 생각하는 게 보통인가? 별로 의미는 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주차장 구석에서 어른들의 사정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마냥 즐거워하는 아이들이 서로에게 눈을 던져대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

 “넌 어릴 때 눈싸움 안 했어?” 

 “눈싸움이요?”

 “쟤들이 하고 있는 거 있잖아.”

 창밖의 아이들을 무심히 가리키며 필이 말을 맺었다. 

 필로 말할 것 같으면 눈 속에 돌을 뭉쳐 던지는 아이였다. 갈등 상황을 유도하고 그 판에 놀아나는 남들의 꼴을 보고 우스워하는. 남의 피를 보는 것은 개의치 않았으며 많은 경우 즐기기도 했다. 멸은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채도가 낮은 파란 눈을 한 작은 아이가 남들이 뛰어노는 눈밭 멀찍이에서 그것을 구경만 하는 광경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어울려 놀다가 다치거나 동상에라도 걸리면. 남들에겐 치명적이지 않을지라도 그에겐, ‘우리’에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필은 보온병에서 코코아를 따라 마시며 말을 고르는 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아이들의 소리를 들었다.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지금처럼 눈이 오면 책상 위에 이불을 올려서 커튼처럼 만들고 그 아래 기어들어 가서 설산의 베이스캠프에 있는 상상을 했어요.”

 “뜬금없는 소리네. 그래서 실내 파였다고? 나가서 노는 건 안 했고?”

 “아예 놀지 않았던 건 아닌데…. 왜, 있잖아요. 폭설이 온 산속에서 조난되거나 하는 상상. 가끔 그런 걸 하면서 앉아 있었어요. 식량 문제는 어떻게 하고, 휴식처는 어떻게 만들고. 근데 꼭 그러다 보면 도착하는 결론이 같은 거예요. 제가 불멸자였다면 애초에 할 필요가 없는 걱정이 너무 많다고. 불멸자였다면 조난되어서 몇 날 며칠을 굶건, 추위 속을 떠돌건….”

 죽지 않으니까요. 거기까지 내뱉고서 멸은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하곤 입을 닫았다. 비밀을 공유하는 동족이 생기면 이게 문제였다. 남들, 그러니까 불멸자들에게는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필 앞에서는 불현듯 툭툭 튀어나왔다. 제 체질을 알고 있는 에킨 외에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고 나눌 수 없었던 말들. 그래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필은 답이 없었다. 머쓱했다.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멸은 뒤늦게 변명하듯 이어 붙였다.

 “물론 구조가 금방 되지 않으면 큰일이죠. 내장 기능이 저하될 테고 동상이 치료되지 않으면 몸을 절단해야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어떻게든 살아남겠죠, 불멸자라면.” 

 “당연하지. 그래서 그들이 만드는 이야기가 재미없는 거야.”

 “이야기요?” 

 “필멸자들의 시대엔 목숨을 건 조난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았어. 대부분 서로 눈물 짜며 희생하는 이야기고, 혹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서로를 잡아먹는 이야기도 있고.”

 멸이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고 필이 여상히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안 먹으면 죽잖아.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 했다는 이야기야. 이것들은 그런 절박함이 없어.”

 “절박함이라니. 소장님은 만약 그런 상황이고 저랑 소장님밖에 없으면 저 먹을 거예요? 아니, 아니. 됐어요.”

 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꺼림칙한 기분에 멸은 손사래를 쳤다. 답은 주지 마세요. 묻지 않는 게 나았겠어요. 필이 툴툴댔다. 네가 물어봐 놓고 왜 혼자 기분 나빠해. 밖에서 다시 소란스러운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불처럼 일어났다가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에 사그라졌다. 짙은 정적이 깔렸다. 너무 조용해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침묵을 깨고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그런 상상은 왜 했는데?”

 “…….”

 멸은 아직 미적지근한 따뜻함이 남아있는 컵을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처음엔 그저 탐험 이야기나 모험 이야기처럼 어린아이의 공상 놀이에 불과했던 것이, 언젠가부터 고립과 외로움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어 반복되었다고. 그래서 어느 순간 관둬버렸다고. 왜냐하면….

 “굳이 그렇게 안 해도 우린 언제나 조난된 거나 마찬가지야.”

 필이 담담하게 얘기했고 멸은 제가 하려던 말이 타인의 입에서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의 유일한 동족, 그가 느끼는 기분을 알 수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 자신이 해야 할 말. 다른 이가 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기분을 아는 척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기분이 상했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멸은 조용히 세상과 자신들이 분리되는 것을 느꼈다. 다른 이들과 외따로 떨어져 주차된 이 좁은 공간에 필과 자신만이 조난되어 갇혀있다고. 사위가 너무나도 조용해서 그런 착각이 들었다. 영원히 사는 이들 사이를 소리 없이 지나쳐 가는 눈밭의 은둔자들. 적어도 전처럼 혼자는 아니었다. 숨통을 막고 세상을 뒤덮어 온데간데없이 흔적을 지워버릴 것처럼 내리는 이 거대한 눈의 바다 앞에서. 

 어릴 적 조난으로 시작한 공상은 종종 쏟아지는 눈사태 속에 홀로 몸을 맡기고 저를 눈 속에 파묻어 버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렇게 지워버리면 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 남자가 그렇게 되도록 놔둘 리가 없으니까. 저항할 수 없이 격렬히 쏟아지는 눈사태 앞에 서 있는 자신에게 손을 뻗고 지층처럼 쌓인 눈을 파내 저를 건져낼 이가 곁에 있었다.

 멸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필을 바라보았고 필은 그 시선을 마주하다 제 담요를 멸에게로 내밀었다. 너 아까부터 입술이 너무 파랗잖아. 멸은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었다. 방금 전까지 필이 덮고 있던 것인지라 상대의 온기가 옮겨왔다.  

 “돌아가면 영화나 보자.”

 카시트를 부드럽게 젖혀 누우면서 필이 말했고, 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의 정적에 귀 기울였다. 차곡차곡 쌓이는 눈의 소리, 결정을 얼리고 조각하는 차가운 공기의 소리에.

 필이 엄선한 영화 때문에 멸이 한동안 눈 내린 호텔에서 등장하는 쌍둥이 소녀와 도끼든 남자의 이미지에 시달리게 된 것은 며칠 후의 일이다.


마노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