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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날들_[필멸]병자성사

단문. 오늘도 이어지는 선동과 날조의 2차 창작.


병자성사(病者聖事)


 덜컥. 해결사 사무실의 문이 힘 있게 열렸다가 닫혔다. 필은 으레 그래왔듯 왔어? 말하며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눈이 채 마주치기도 전에 멸이 화장실 좀 빌리겠다며 후다닥 뛰어들어가지만 않았어도 얼굴을 보고 제대로 인사를 나눴을 것이다. 

 “하여간. 볼일 좀 미리미리 보고 나오지.”

 짧게 툴툴대곤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의뢰와 관련된 메일을 몇 번 더 살폈다. 체크 완료. 확신이 들자마자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탄복을 여미고 재킷을 걸쳤다. 남은 건 굳게 닫혀있는 화장실 문 하나. 필은 그 문 앞에 서서 인내를 발휘하며 기다렸다. 멸이 나오는 대로 의뢰 업무를 위해 함께 나갈 생각이었다. 끊임없이 수도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렸다. 쏴아아아. 잠깐. 쟤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더라. 

 가벼운 동작으로 해결사 팔찌의 디지털 시계를 들여다보자 희미하게 빛나는 분침이 무소음의 인내력을 지닌 채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5분? 아니야. 그것보단 더 된 거 같은데. 10분? 계속되는 물소리 사이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낮게 가라앉은 채, 들릴 듯 말듯 웅얼웅얼 메아리처럼 퍼지는 소리. 필은 그것을 감지하자마자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윽, 웩….”

 “야.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바닥에 엎어진 멸이 변기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내며 토악질을 하는 중이었다. 더 게워낼 것도 없는지 연신 헛구역질만 터뜨리고 있었다. 다 큰 남자가 몸을 움츠리고선 쪼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볼썽사납기도 했고 괜히 안쓰럽기도 했다. 목이며 눈가가 벌겠다. 반쯤은 속절없이 터지는 구역질 때문, 나머지 반쯤은 필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부끄러움 탓으로 보였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멸은 필에게 투덜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노크 정도는 해주세요.

 “노크 같은 소리를 하네. 그런 꼴을 해서 퍽이나 대답할 기력이 남았겠다.”

 “죄송해요. 화장실 이렇게 써서…. 우욱.” 

 “…사과는 됐어.”

 멸이 어깨를 잘게 떨더니 다시금 토악질을 시작했다. 사이사이에 끊기는 언어들이 들렸다. 여, 기가 아니면, 딱, 히 쓸, 곳도 없, 어서…. 오는 길 내내 쓰린 속을 부여잡고 참고 참으며 온 것이 분명했다. 밖에선 아픈 티를 낼 수가 없으니까. 차가워진 체온 탓에 손톱에 푸른기가 도는 것이 보였다. 힘없이 구기고 앉은 다리와 낮게 숙인 등도. 필은 인상을 구기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더니 금세 방탄복과 재킷을 벗곤 소매를 걷어 올린 셔츠차림으로 되돌아왔다. 멸은 민망함이 서린 얼굴로 말했다. 

 “보, 기 안 좋으실 텐데 그, 냥 나가 계세요.”

 “답지 않게 미련한 짓하긴. 아프면 연락하고 안 나왔어도 됐잖아. 나한테 말 못 할 것도 아니고.”

 “집에서 나올 땐 괜, 찮았, 어요. 거의 다 왔, 을 때 갑, 자기.”

 멸도 나름대로는 억울했다. 아플 때 구박받으니 더. 필이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임은 알고 있었음에도. 뭐가 문제였지? 급하게 기억을 반추하자 유통기한이 지난 식빵이 생각났다. 

 불멸자들 대부분은 흉터의 개념을 몰랐고 병으로 며칠이고 앓아눕는다는 개념조차도 잘 몰랐다. 보통은 질병 바이러스가 침투해 세포를 공격해도 세포 자체의 회복력이 바이러스의 침투력을 웃돌았으니까. 닥터 노스 같은 천재가 의도적으로 만든 바이러스 정도 되거나(혹은 구시대부터 위협적이었던 탄저균 급이던지), 신체에 돌이킬 수 없는 상해를 입어 회복력이 아주 더딘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나마도 이런 일은 모두 드문 경우였고 당연히 멸에게는 전제부터 통하지 않는 이야기다. 

 불멸자가 아니라면 사람은 아주 사소한 일로도 다치고 앓고 죽는다. 멸이 무리해서 상위 구역에 가까운 중간 구역으로 옮겨온 것도, 그 때문에 따로 돌릴 가용 비용이 부족해 상대적으로 부실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부기지수인 것도 모두 다 거기서 기인했다. 같은 이유로 평소라면 멸은 기간이 아슬아슬한 식재료 등은 미련 없이 처분했다. 혹여나 앓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품고 있느니 그편이 나았다. 아프면 곤란하니까. 저와 에킨이 지고 있는 빚을 제외하더라도 필멸자로 사는 것은, 불멸자라면 굳이 나가지 않을 지급 비용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나마 필과 함께 일하고 나서는 꽤 여유로워졌으나, 이번 달은 얘기가 달랐다. 다급한 연락. 빚 독촉. 멸은 아슬아슬하게 남은 수입을 에킨에게 송금했고 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곤 했던 식빵의 유통기한이 지난 것을 오늘에야 발견했다. 식료품을 사고 새롭게 장을 볼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여유가 없다면 별수 없는 일이다. 며칠이고 내리 굶는 것보단 나을 수도 있어. 그래서 멸은 음식이 괜찮을지도 모를 가능성에 걸었고 도박은 처참히 실패했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고 식도를 타고 쓴맛이 느껴졌다. 있는 힘껏 게워냈는데도 발작적으로 구역질이 터졌다. 눈을 꽉 감고 있자 자연스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떡하지. 

 갑작스레 등 위에 올라온 커다란 손 때문에 멸은 놀라 자빠질 뻔했다. 가죽장갑을 낀, 차가워진 제 몸보다 살짝 더 뜨겁게 느껴지는 손. 고개를 살짝 돌리자 필이 무덤덤한 표정을 한 채 힘을 주어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손놀림에 명치께에 꽉 틀어막혀있던 것이 다시금 쏟아졌다. 부끄러움이 더해졌다. 이런 꼴 그다지 보이고 싶지 않은데. 비위가 상할 만 한데도 필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버티고 앉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멸의 등을 두들겼다. 쿵, 쿵. 일정한 박자를 가지고 산발적으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듯 토닥여주는 손.

 그 규칙적인 박자 속에서 에킨이 어디선가 구해오곤 하던 백신이 떠올랐다.

 불멸의 시대가 되어 질병과 상해로 인한 생명의 위협이 줄자 백신도 덩달아 줄었다. 효용이 없어 팔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 상황에서 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에킨은 멸이 한창 어렸을 때 몇 번 백신을 가져와 신중한 손으로 놔주곤 했다. 이렇게 놓는 게 맞을까? 잘못 찌를 수도 있겠는데. 어머. 얘 얼굴 좀 봐. 농담이야. 조금 따끔할 거야. 괜찮아. 이제 항체가 생기도록 놔두자. 어린 멸이 항체라거나 면역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물으면 언제나 시원하게 웃으며 답해주곤 했다. 좀 더 자라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될 거야. 너한테는 중요한 문제거든. 

 에킨은 백신을 놓기 전이면 어디선가 보고 들은 의학지식을 총동원해 멸의 맥박과 열을 재곤 했다. 그녀로서는 알 필요가 없는, 옛날엔 유효했던 구시대의 방책들을 찾아서. 때로는 빌려왔다는 청진기로 제 맥박의 소리를 들려준 적도 있다. 멸아. 들어봐. 네 심장 소리야. 쿵, 쿵. 뛰는 것이 너무나 미약해서 제 치부를 들킨 것만 같아 부끄러웠지만 에킨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모든 준비과정 끝에 살갗을 꿰뚫고 들어오는 주삿바늘은 날카롭고 차가웠지만 수고했다며 달래주는 말과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에킨이 그것들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엄청나게 애를 썼다는 걸, 그녀보다 먼저 늙거나 병들거나 다치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심지어는 강도질을 하는 열 살짜리 어린애의 칼에 맞아서거나 어떤 이유로도 죽을 수 있는 자신을 그만큼 걱정하고 사랑한다는 걸 멸은 알았다.  


 그러니까 자신을 두드려오는 그 큰 손에는 비슷한 상냥함이 어려있었다. 자신 외에 유일하게 아플 수 있는 상대를 걱정하는 손길.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서 전해지는 위로. 그게 어느 정도 필 자신을 위해서, 그러니까 혼자 남겨지는 게 싫어 멸이 저보다 먼저 죽는 꼴을 보지 않기 위함이거나 멸의 존재를 통해 위안을 얻기 위함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이기적인 상냥함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다시금 눈물이 돌았다. 이어진 구토 끝에 나온 생리적 현상인지 혹은 아려오는 마음 한구석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채로 멸은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흐르게 내버려 두었다. 

 필은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를 내주곤 창백하게 질려 누워있는 멸을 들여다보았다. 커튼이 만들어낸 음영 사이에 조용히 기대서서. 멸은 흐린 눈을 하고서는 맥이 빠진 채 새근거렸다. 

 “혼자 있을 수 있어? 닥터 노스한테 가서 약이라도 받아올 테니까.”

 무어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일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듯도 했다. 저절로 핀잔이 나갔다. 이런 꼴을 해가지고 무슨 일을 해. 필은 그대로 외투를 챙겨 나가는 대신 공간이 남은 침대가에 걸터앉아 손을 뻗어 멸의 눈을 가려주었다. 좀 자.

 “너 잘 때까진 여기 있을게.”

 또다시 작은 웅얼거림이 울리더니 잠잠해졌다. 불규칙한 숨이 고르게 바뀌고 좀 더 느슨해질 때까지, 필은 그렇게 죽 우두커니 앉아 표정 없이 벽 모서리의 한 면을 응시했다. 손 아래의 눈이 떨리고 얕게 움직이는 것을 느끼면서. 구원이나 안식 따윈 바란 적도 행할 생각도 없는 제 손이 뜻밖의 온유한 병자성사를 내려 멸을 낫게 해줄 것을 믿는 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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