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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크 백업_[코너에지]Once upon a time(1)~(5)

2014.07~08



2014년 당시 개인공간에서 연재하고 책으로 냈던 120페이지 가량의 중편 소설입니다. 책으로 나올때는 구매자 분들께 인쇄비만을 받았으며, 모든 내용이 웹에 무료 공개되어있다는 점을 명시한 뒤 뽑았었습니다.


※총 14편 분량. 1~5, 6~9, 10~14로 나눠 올립니다.


-선악과의 공명으로 인해 코너가 에지오의 시대로 떨어졌다는 설정
-선악과의 힘으로 둘이 언어는 다른데 말은 통한다는 설정(십이국기에서 기린의 힘으로 말 통하던 개념과 유사)
-타임라인은 에지오의 경우 브라더후드 체사레 몰락 이후와 레벨레이션 전의 사이, 코너는 3편 본편과 워싱턴왕의 폭정 이후.


1.


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손으로 눌러 펴면서, 에지오 아우디토레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 피투성이인 상태로 나타난 직후 지금까지 내내 시체처럼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영원히 잠들어있을 기세였다. 실제로도 하지만 에지오는 선뜻 그를 깨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그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에지오는 며칠 전의 바로 그 순간을 떠올렸다.


*

에지오는 체사레에게서 되찾은 '사과'에 대한 처우를 고민 중이었다. 사실 저장고로 점 찍어둔 곳은 있었다. 콜로세움 밑. 그곳이라면 사과는 아무도 찾는 이 없이 안식 속에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어느 세월 동안은. 다만 그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몇몇 일들, 예를 들어 그때 교황청 지하에서 처음 들은 이후로 일생의 수수께끼가 된 데스몬드라는 이름 같은 것들에 대한 해답을 혹시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에덴의 사과를 살펴보고 있었다. 물론 이제는 빛나지도 않는 선악과를 노려보고 있다 한들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초조함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에지오는 이 물건을 바깥에 오래 둘수록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또다시 수수께끼인가.'

시선을 거두며 에지오는 또다시 체념의 순간을 겪었다. 근 며칠 사과를 살펴보며 겪어온
무수히 많은 실패의 시간 중 하나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이 위험한 물건을 콜로세움으로 가져가 검은 안식 속에 집어넣는 일뿐이었다. 에지오는 조용히 황금색의 사과에 손을 뻗었다.


*

제 허리에 손을 댄 채로 코너는 경악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어째서 저것이.'

그것은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분명히 코너가 자신의 손으로 몇 달 전 수장시킨 물건이니까.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물건인지는 그 스스로 겪어보았고, 절대로 다시 나타나서는 안 될 물건이라고 결론지은 물건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차가워지는 손끝을 고쳐 움직이며, 코너는 보다 자세하게 물건을 살폈다. 눈앞의 물건은 자신이 수장시켰던 그것과 놀랍도록 비슷했으나 다시 보니 새겨진 문양이 달랐다. 결정적으로 그것은 눈부신 황금색에 섞여 간간이 백은에 가까운 흰빛과 푸르스름한 빛을 뿌렸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코너는 이것이 자신이 잠재운 그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다음 순간, 그런 물건이 하나가 아니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코너는 아찔해졌다.

그 황금색의 구는 그가 급습한 템플러들의 창고 안 깊숙한 곳에 놓여있었다. 코너는 망연한 눈을 했다. 단순히 템플러들의 회합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잠입했는데, 예상외로 경비가 두터웠다. 이 물건 때문이었다면 수긍이 갔다. 코너는 아직 예전의 부상, 찰스 리를 쫓으면서 입었던, 그에게 치명적인 결함을 남기고만 그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고, 이런 전투 또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생각지 못한 피를 흘렸다. 그가 그곳, 뉴욕의 궁전에서 워싱턴을 상대하면서 낼 수 있었던 전사의 힘과 날렵함은 그저 그 황금의 구가 보여준 환상이었을 뿐임을 다시 깨달아야만 했던 가혹한 시간이었다. 입안이 썼다.

상처가 끊임없이 피를 토했고, 출혈 탓에 머리가 띵해졌다. 어떻게든 저것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야 했다. 처분은 그 뒤의 일이었다. 코너의 뒤에서 몰려온 템플러 지원군들의 아우성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암살자다! 그를 죽여!'

낭패다. 그는 빠른 속도로 적을 헤아리며 생각했다. 전투에 적합지 않은 몸 상태, 너무 많은 적의 머릿수…….

거의 본능적으로, 코너는 황급히 구에 손을 뻗었다. 눈앞이 하얗게 날아가고 온몸이 산산이 조각나며 흩어지는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에지오는 충격에 굳은 채로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대는 순간, 사과가 터질 듯한 황금빛을 내뿜었다. 이전에도 몇 번 이런 적은 있었지만, 이번의 빛은 순간적으로 시야를 멀게 할 만큼 강했다.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린 에지오 앞에서 아른거리던 빛이 점차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이윽고 고치에서 나비가 부화하듯 하얀 빛을 가르며 빛 속에서 남자가 나타났다.

꽤나 참혹한 꼴을 한 남자의 까만 눈과 에지오의 눈이 마주쳤고, 에지오는 그가 낯설지 않다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단편적인 기억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 어딘가, 자신의 인식을 넘어선 어느 저편에서 그를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에지오의 감각이 뒤틀렸다.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인데.”

남자가 에지오가 든 선악과를 보고 쥐어짜 내듯 비명을 토했다. 에지오는 깜짝 놀랐고,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남자를 죽일 뻔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남자는 정신을 잃고 차가운 바닥에 나뒹굴었다. 쓰러지며 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에지오의 손에서 미끄러진 선악과가 떨어지며 쨍한 울림을 남겼다.


*

노비스들은 불안해하고 있었고, 큰 소동이 휩쓸고 간 직후의 지부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에지오는 도대체 이 상황을 그들에게 어찌 설명해주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에덴의 사과를 만지는 순간 저 거인이 신기루처럼 등장했다는 설명은 노비스들을 납득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진실인 것을. 마키아벨리가 있다면 함께 의논해 볼 수도 있겠으나, 그는 개인적인 볼 일로 지부를 비웠고 족히 한 달은 더 자리를 비우고 있을 예정이었다. 그랜드마스터로서의 연륜이 무색하게도 에지오는 눈앞에서 일어나버린 비현실적인 일 앞에 무기력함을 느껴야만 했다.

남자는 무장이 해제된 채 침대에 한쪽 손을 사슬로 묶인 상태로 잠들어있었다. 노비스들의 의견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결과였다. 이 정도면 그래도 양반이었다. 처음에 노비스들은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죽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에지오는 그런 섣부른 의견들을 제지했다. 상황을 생각한다면 죽이는 편이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하얀 복장과 양손의 히든블레이드. 결정적으로 그의 무기-날 선 도끼-의 문양을 에지오는 날카롭게 잡아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표식은 분명히.

'암살자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솟아난 자란 말인가. 에지오는 자신의 암살검을 만지작거리며 지금이라도 그를 죽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인지를 생각했다. 남자가 입술을 달싹인 것은 그때였다.

“Ista.”

에지오의 몸이 움찔했다. 남자가 한 말은 에지오가 난생처음 듣는 외국의 언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의미는 에지오의 가슴에 직접 내질러지며 다가와 꽂혔다.

‘어머니.’

암살검을 거두며 남자의 거동을 살폈지만, 한순간의 잠꼬대였던 모양이었다. 남자는 여전히 깨어날 기색이 없었다. 복잡한 얼굴로 남자를 내려다보며, 에지오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2.

코너는 자신을 둘러싼 암흑 속에 서 있었다. 오직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곳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작은 빛의 조각들이 파도의 포말처럼 발치에서 부서졌다. 낯선 곳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몇 번, 환상 속에서나마 와보았던 곳.

"왜 내 애원을 들어주지 않는 거니, 라둔하게둔?"

그때처럼, 찢어질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네가 내 가슴을 부숴놓는구나."

코너는 애타는 심정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어머니를 실망하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어머니를 가슴 아프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절절한 외침은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가 목을 꽉 조이고 그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목에서 비린 쇠 맛이 느껴졌다. 코너는 울고 싶어졌다. 당신을 다시 잃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을 다시 추운 곳에 두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코너는 무릎을 꿇고 고해하고 싶었다. 자신이 걸어온 길들에 대한 짤막한 회한. 아버지와의 일들. 끝내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던 것들. 그 많은 오해, 닿을 수 없었던 용서를 구하는 말. 지켜지지 못한 약속들, 자신이 구할 수 없었던 것들,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빠져나간 것들에 대해서도.

어머니.

"나는 네게 실망했다."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차가운 울림이 귓전을 때렸고, 갑작스레 땅이 쑥 꺼졌다. 코너는 몸을 늘어뜨린 채 밑도 끝도 없는 심연의 아래로 추락하다가, 이내 강한 타격을 느끼며 눈을 떴다.


*

혼비백산해 뛰어든 노비스 하나가 피어나는 장미에 있던 에지오에게 소식을 알려온 것은 그 날 정오였다. 노비스가 너무 당황해 횡설수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지오는 별수 없이 정신 차리라고 외치며 노비스의 어깨를 강하게 내리쳐야만 했다. 지켜보고 있던 클라우디아가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왔다. 그녀는 아직 이 일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클라우디아에게 안심하라는 의미의 짧은 미소를 보낸 뒤, 에지오는 노비스를 바라보았다. 간신히 제정신을 잡은 노비스가 알려온 소식은 간단하고 짧았지만 중대한 소식이었다.

"그가 깨어났습니다."


*

코너는 한동안 당황에 빠진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딱딱한 곳에 부딪히는 느낌을 받으며 깨어났음에도 정작 등에 느껴지는 것은 찬 바닥이 아닌 푹신한 매트리스였다. 한쪽 팔은 침대의 한편에 단단히 묶인 상태였다. 얇은 사슬로 여러 겹, 커다란 자물쇠로 마무리. 묶인 부위가 저릿저릿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어느샌가 갈아입혀 진 옷의 사이로 복부의 상처에 단단히 매인 붕대가 보였다. 여전히 조금씩 피가 번지고 있었다. 그제야 어렴풋이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템플러들의 은신처에서 발견한 황금색의 구체, 예상치 못한 전투와 부상, 몸이 부서지는 충격과 하얀빛. 그 뒤로는 단편적인 악몽들. 그다음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고 싶었으나 주변에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본 사람이라고는 방으로 들어오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무어라 외치며 뛰쳐나간 기묘한 하얀 옷의 사람뿐이었다.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졌으나 낯선 이의 어디서 익숙함을 느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불러 세워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잠긴 목에서는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물 생각이 간절했다. 옆 탁상에 물이 담긴 나무그릇이 보였으나 한 손이 묶인 상태에서는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였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숨을 고르며 코너는 자신을 타일렀다.

'정신 차려, 라둔하게둔.'

머리를 몇 번 젓자 희미하게 남아있던 졸음이 가셨다. 좀 더 맑아진 정신으로 코너는 주변을 제대로 살폈다. 그가 있는 방은 넓지는 않았지만, 감옥의 독방 정도로 좁지도 않았다. 적어도 소박한 침대와 의자, 탁상, 쇠로 만든 삼발이 위 놋쇠 그릇 안에 타오르는 숯이 담긴 간이 난로, 작은 책상과 책장 등이 갖춰질 만한 공간은 충분했다. 창문은 없었다. 문을 제외한 사방을 회색의 차가운 석벽이 막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선가 퀴퀴한 물 냄새가 났다. 뉴욕과 보스턴의 지하에서 맡아보았던 냄새. 자신이 지하에 있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으나 알 길은 없었다. 자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간이 난로가 잔잔한 온기를 전해왔다.

좀 더 자세히 주변을 살피기 위해 몸을 틀자 복부에서 따끔함이 느껴졌다. 부디 너무 큰 상처가 아니길 바랐다. 이전의 부상만으로도 코너에겐 충분히 힘든 시간이었다. 다시 암살검을 들 수 있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분투해야만 했는데…. 그가 입은 깊은 상처는 다리를 약하게나마 절게 하기까지 했고, 코너는 밑바닥을 치는 무력함에 몸을 떨어야했다.

초조한 마음에 상처가 완전히 회복하기도 전에 섣불리 나선 게 화근이었다. 아킬레스가 살아있었다면 한심하다고 한소리 했을 일이었다. 형제단의 사람들은 어쩌지.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단독으로 움직인 탓에 지금쯤 그들은 소식이 끊어진 코너를 애태우며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드디어 일어났군."

코너의 생각을 끊으며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

에지오는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자신에게 제법 놀란 듯했고, 덫에 걸린 야생동물처럼 눈초리에 경계심이 가득 스며있었다.

또다. 그의 눈에서 에지오는 전에 받았던 그 느낌을 다시 받았다. 그는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기묘한 친근감이 들었다. 그의 어느 부분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에지오는 이 느낌에 내심 살짝 놀라며, 남자에게 천천히 물었다.

"그건 그렇고, 상처는 견딜만한가?"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이 없었다. 쯧, 가볍게 혀를 차며 에지오는 한 걸음 더 남자 쪽으로 다가섰다. 남자는 습관적으로 팔목을 들었으나 이내 당황한 듯했다.

"자네 암살검이라면 치워뒀네. 혹시 몰라서 말일세. 꽤 특이한 암살검이더군."

남자의 눈이 흔들렸다. 에지오는 짐짓 안심시키려는 생각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 이야기를 들어보고 돌려줄 테니 걱정은 말게. 무기는 물론이고 옷도 수선해야겠더군. 설마 그 몸으로 나와 싸우려는 건 아니겠지."

쉽게 경계의 눈을 거두지 않는 남자를 보며 에지오는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한숨을 꾹 눌렀다.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싶었다. 비록 대화를 나눠본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니 그도 알아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착각이었던 것일까.

"혹시 내 말을 못 알아듣나? 나는 다른 언어는 프랑스어 정도밖에 모르는데. 자네에게 이게 통할지도 잘 모르겠군. Bonjour?"

"듣고 있습니다."

갈라지는 듯한 나직한 음성이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에지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보기보다 꽤 어린 편 일 거라고 짐작했다. 수렁 같은 검은 눈과 그 안에 일렁이는 것들만으로 봐서는 풍파에 지친 노인의 인상이 떠올랐는데. 그가 젊다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에지오는 그의 눈에서 일렁이는 것들 뒤에 웅크리고 있던 젊은이 특유의 고집이나 강인한 혈기를 볼 수 있었다. 족히 이삼 십여 년 전의 자신이 가지고 있었을 법한 것이었다.

그 한 마디를 내뱉자마자 남자는 몸을 수그리고 크게 기침을 했다. 꽤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제야 탁상 위의 물에 에지오의 생각이 미쳤다.

"미안하군. 자네가 한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못했다는 걸 깜빡 잊었어."

조용히 그릇을 들어서 가져다주자,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봐졌다. 에지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독 같은 건 안 들었다네. 자네 하나 죽인다고 내게 무슨 득이 되겠나. 난 자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정 의심되면 내가 먼저 한 모금 마시지."

남자가 자유로운 한 손으로 그릇을 넘겨받았다. 순간 에지오와 남자의 손끝이 스쳤다. 내내 시체 같던 사람치곤 예상외로 따뜻한 손이군. 에지오는 생각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을 기세로 물을 들이켜는 남자를 등지고, 에지오는 밖의 노비스에게 식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한동안 굶은 사람이니 가벼운 것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에지오는 입을 열었다.

"아직 자네 이름도 못 들었군. 여간해선 알려주지도 않을 것 같고. 나부터 소개하겠네. 나는 에지오 아우디토레. 피렌체의 에지오 아우디토레일세."




3.

골목의 사이에서 코너는 조용히 밖을 내다보았다. 광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경비병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복부의 상처가 고통을 호소했고, 그의 다리는 이전 부상 때처럼 다시 약하게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아직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나. 하지만 지금은 다른 것이 훨씬 문제였다.

“…여긴 도대체.”

코너는 당황하고 있었다. 이 도시는 자신이 난생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심지어 이곳이 북아메리카라는 확신조차 들지 않았다. 기회를 틈타 빠져나온 것은 좋았으나 낯선 풍경과 낯선 도시의 냄새, 낯선 사람들에 당황하여 코너는 길을 잃은 미아가 된 심정을 절절히 느껴야만 했다.

더 당황스러운 점은 그의 언어가 이곳에서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모호크 어도, 영어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코너로서는 그가 내뱉는 말들이 이 세계의 언어가 아닌 전혀 다른 언어로 치환되어 들린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들리는 그의 영어는 이미 더는 영어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대번포트 농지로 가는 길을 물었으나 처음 듣는 언어가 되돌아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분명 이탈리아 인은 아닌 것이 분명한 코너에게 쏠렸고, 알 수 없는 수군거림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밀려오는 단어와 문장들에 질식할 수도 있겠다는 기분이 든 건 처음이었다. 갑자기 뱃속이 불편해지면서 숨이 막혔다.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코너는 순간 그가 낯선 곳에서 자제력을 잃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고, 자신이 두려워한다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일을 강인하게 견뎌온 그의 정신이 쉬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오는 느낌이었다. 멀리서 코너를 지켜보던 창을 든 경비병이 다가왔다. 당황한 코너는 길을 묻기 위해 잡고 있던 남자를 밀쳐내고 급하게 도망쳐 나왔다.

광장의 경비병이 점점 늘어났다. 코너는 골목에 몸을 숨긴 채 생각에 잠겼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 사내와는 말이 통했는데. 물론 사내의 얼굴을 다시 보기는 떨떠름했다. 그가 또 어떤 거짓말을 할지 몰라서였다. 누가 그의 말을 믿겠는가? 자신이 에지오 아우디토레라고 말하는 사내를? 코너는 한숨을 쉬며 그와의 대화를 돌이켰다.


*

“에지오 아우디토레. 그가 대신전을 찾은 후로.”

기억 속에서 아킬레스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 망령들이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혔지.”

코너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다짜고짜 나타나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 중년의 남자는, 그에게 이것저것 말을 늘어놓더니 자신을 에지오 아우디토레라고 소개했다.

그를 처음 만난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코너는 무지하지 않았다. 아킬레스의 암살자 수업은 비단 육체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고, 그는 기본적인 교양들과 역사, 문화들을 익히고 당연하게도 암살단의 이력과 선조들에 대해서도 배웠다. 코너는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사내는 자신을 놀리려 드는 것일까? 후드에 반쯤 가린 얼굴 밑으로 보이는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이 보이지 않아 그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입가의 상처가 웃는 입을 따라 휘어지고 있었다.

후드. 그러고 보니 그랬다. 아까 뛰쳐나간 하얀 옷의 남자에게서 익숙함을 느낀 것은 바로 저 후드와 하얀 옷의 색상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눈앞의 사내가 찬 허리띠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것과는 약간 다른 양식을 하고 있긴 해도 확실히 암살단의 증표였다. 그제야 그가 차고 있는 양손의 암살검도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코너는 더욱더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북아메리카의 암살단 지부는 아킬레스가 멘토이던 시절 괴멸했고, 현재로서는 코너가 다시 일으켜 세운 소규모의 암살단 지부가 전부였다. 최소한 그는 북아메리카에 자신들 외에 암살단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암살자를 죽인 뒤 암살자 행세를 하는-자신의 할아버지인 에드워드가 그랬듯- 경우의 수도 고려해야 했다. 이 사내가 암살단을 사칭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에지오 아우디토레는 암살단의 선조 중에서도 레반트의 알테어와 함께 독보적인 존재였다. 암살단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이이기도 했다. 그가 암살단을 사칭하고 있건, 혹여 정말로 암살단이건, 그런 면에서 생각했을 때 그가 에지오 아우디토레를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족히 200년도 더 전에 죽은 사람을 사칭하다니. 코너는 혼돈 속에 내던져진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당장 박차고 일어나 화를 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후자를 택하고 싶었어도 묶인 팔 때문에 불가능했다. 코너는 다만 침묵으로 응수했다.

“방금 대답했던 걸 보면 말을 못하는 건 아닐 테고.”

사내가 나지막이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와 대화하는 것이 싫은가? 하지만 나로서는 자네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 줄 수밖에 없다네.”

그건 그랬다. 하지만 코너는 그를 믿을 수 없었고, 그와의 대화가 온통 거짓의 일색일 것이라고 이미 결론지은 후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이 사내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기엔 떨떠름했다. 사내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상황에선 코너가 불리했다. 이곳은 낯선 환경이었고, 코너는 더욱 신중해져야만 했다.

"뭐. 별수 없군. 자네는 꽤 고집이 센 모양이야."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얘기할 마음이 생기거든 꼭 그래 주게나."

뜻밖에 사내는 순순히 물러났다. 여유로움. 과연 상황의 유리함을 쥐고 있는 사람다운 태도였다.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있는 건 상관없네만 적어도 주는 음식은 받아먹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독 같은 건 안 들었어. 자네가 아무리 젊다고 해도…."

사내가 얼굴에서 장난기를 걷고 짐짓 엄격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런 식으로 몸을 혹사하다간 제 명에 못 죽을 걸세."

코너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제 명에 넘칠만한 일들은 이미 충분히 겪었습니다."

사내가 호오? 소리를 내며 코너를 바라보았고, 코너는 아차 싶었다.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코너는 다시 입을 꾹 닫고 침묵을 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내는 떠보는 듯한 시선으로 코너를 바라보다 이내 등을 돌리고 방을 떠났다.

며칠에 걸친 대치의 시작이었다.


*

에지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눈앞의 노비스들은 그저 어쩔 줄 몰라 하며 죽을상을 했다.
붕대를 갈아주고 식사를 제공해주기 위해 다가간 노비스 둘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달아났다. 팔을 묶고 있던 사슬의 자물쇠 열쇠는 대체 언제 훔친 것인지.

그를 얕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에지오는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남자였던 모양이었다. 그 눈에 어른거리던 것들이 호락호락한 게 아니라는 걸 진작 간파해야 했는데. 그가 입은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면 노비스들은 그저 얻어맞고 뻗는 데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근 며칠 간 그가 얌전했기에 당분간은 더 지켜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 사실 에지오가 그를 얕보게- 정확히는 자기도 모르게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그의 얌전한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의 그 기묘한 친근감 탓이 컸다. 난생처음 보는 남자의 어디에서 유대감과 연결고리를 느낀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곁에 서 있던 노비스가 쓰게 웃고 있던 에지오에게 말을 걸어왔다.

"모두 저희의 불찰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다시 잡아오겠습니다."

에지오가 답했다.

"아니. 자네들로는 아직 힘들 걸세."

아무리 견습생, 노비스들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암살자 훈련을 받던 이들이었다. 그들을 무기도 없이, 그것도 상처를 입은 맨몸으로 순식간에 둘씩이나 제압했다. 빠른 판단력과 실전 경험, 실행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의 몸집. 부상자여도 그 덩치는 그 자체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내가 직접 가지."


*

한낮의 태양 빛이 뜨겁게 내리꽂혔고, 코너는 흐르는 땀을 대충 닦아내곤 다시 주위를 살폈다. 간신히 고지대로 올라와 주위를 살폈음에도 여전히 이곳을 알 수가 없었다. 코너는 뛰어난 사냥꾼이었고 그에 걸맞은 끈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아까부터 찾아온 상처의 통증과 두통이 코너의 몸을 갉아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 발작처럼 자신을 덮쳐왔던 공황이 무의식의 틈새에서 시시각각 코너를 노리고 있었다. 자신이 무리하고 있단 걸 알고 있음에도 코너는 다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어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이쯤 되면 형제단의 사람들도 이상을 감지했을 것이다. 더는 괜한 걱정을 끼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보았던 황금색의 구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그는 반드시 돌아가야 했다.

골목을 돌아 나오던 코너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이미 늦은 듯했다. 아까의 경비병이었다. 코너는 이곳에서 돌아다니기엔 너무 눈에 띄었다. 옷을 훔쳐 입는다고 해도 그의 덩치와 피부색, 확연히 외국인임을 강조하는 그을린 그 색이 그가 자연스럽게 이곳에 녹아드는 것을 막았다. 불필요한 목격자는 많았고 그새 경비는 늘어났다. 코너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몸 상태로 여럿의 경비를 상대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급하게 몸을 숨긴 곳은 항해 도구를 비롯한 잡동사니를 파는 노점이었다. 엄청난 구식의 물건들이 즐비했다. 코너의 할아버지 시절에도 쓰지 않았을법한 고물도 보였다. 주인은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조용히 노점의 안쪽으로 파고들며 몸을 숙이던 코너가 순간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그가 마주한 것은 세계 지도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대강 비슷했다. 하지만 지도의 북아메리카는 달랐다. 마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묘사하듯 뭉뚱그려진 지도에는 보스턴도, 뉴욕도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살고 숨 쉬어 왔던 땅덩어리가 그저 하나의 덩어리로, 그림자 같은 존재로 묘사되어 있었다. 이건 마치…. 신대륙, 정확히는 북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전의 지도 같았다….

그냥 옛날 지도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너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반짝이던 황금빛이 눈앞에 다시금 나타났고, 갑작스레 진실을 속삭이려 했다. 한낮의 대로변에서 그는 선악과가 보여주는 환상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그가 비켜나갈 수 없는 진실이 보이는 듯했다. 유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무어라 말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나약함이 느껴졌다. 갑자기 덮쳐오는 현기증에 코너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면 제 명에 못 죽는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

부상당한 몸이라 멀리 가지 못했으리란 에지오의 짐작은 맞았다. 눈에 띄는 외모 탓인지 주변에 주렁주렁 경비병들까지 매달고서, 남자는 지친 기색이 완연함에도 여전히 강인한 눈으로 에지오를 바라보았다. 역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얼마 못 가 다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에지오는 그가 쓰러졌을 때 자신이 혼자 그의 육중해 보이는 몸을 옮길 수 있을지를 가늠했다가 이내 포기했다. 남자의 상처가 터진듯 복부의 옷에 약하게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객사하는 건 자네도 원치 않으리라 생각하네. 물론 나도 원치 않고."

남자가 반항심을 담은 시선으로 에지오를 바라보았고, 에지오는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 고집불통 같으니. 여간내기가 아니군. 내가 젊었을 때도 이랬던가. 그러는 사이에 경비병들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에지오가 재빠르게 동전이 든 주머니를 근처의 용병 무리에게 던졌다.

"마음껏 날뛰어주게."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한바탕 소란이 시작되었다. 당황한 표정을 한 남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에지오는 남자의 앞에서는 처음으로 후드를 벗었다. 부드럽게 휘는 호박색의 눈과 일렁이는 검은 눈이 마주쳤다.

"자네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할 이유를 나로서는 알 수가 없네. 자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이유를,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이런 곳에서 무너지면 억울하지 않겠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병을 남자에게 던지듯 건네며, 에지오가 말을 이었다.

“자네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겠군. 나도 그렇다네. 따라오게, 자네에게 지금 필요한 건 이런 길바닥을 헤매는 게 아니라 따뜻한 음식과 쾌적한 휴식처야.”

말하면서도 그가 따라올 지 반신반의했으나, 남자는 에지오를 가만히 바라보다 뜻밖에 순순히 뒤를 따랐다. 성품이 나쁜 것 같진 않은데. 혹여 남자가 다시 도망갈까 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에지오가 앞섰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몇 걸음 정도 발을 옮기고 나서였다.

“라둔하게둔.”

의아한 눈으로 에지오가 바라보자,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편하게 코너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에지오의 눈꼬리가 다시 부드럽게 휘었다. 식기 시작하는 태양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4.

“나는 네게 실망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눈을 떠보니 다시 그곳이었다. 발치에 부서지는 빛의 포말들이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의 얼굴이 워싱턴의 얼굴로, 아버지의 얼굴로, 아킬레스의 얼굴로, 형제단의 얼굴로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었다. 자신을 덮쳐오는 만화경의 악몽. 그리고 다음 순간, 늘 그러했듯 수많은 얼굴이 단 하나의 얼굴로 바뀌었다. 유노.

“-를 -봉인-... 신전에-”

오늘도 그녀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어떠한 장벽이 있어 그녀의 말을 걸러내는 듯했다. 잡음이 낀 목소리가 코너의 귓전을 둥둥 울렸다. 유노는 코너를 향해 손가락을 뻗어 그를 가리켰다. 머리가 점점 아파왔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숨어있던 자기 자신을 향한 악의들. 스스로에게 느꼈던 책망과 노여움, 실망감이 몸을 옥죄어왔다.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깨에 뜨거운 불길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헛숨을 들이켜며 다음 순간 코너는 잠에서 깼다. 고개를 들자 머쓱한 표정을 하고서 에지오가 한 손을 들어 올린 채 서있었다. 어깨에 닿은 것은 그의 손이었던 모양이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번들거렸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코너는 그대로 굳어있었다. 잠시 간의 정적이 이어졌다.

“클라우디아가 당장 내려오지 않으면 우리 몫의 식사는 없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더군.”

무어라고 물어볼 법도 한데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단지 ‘그러니 어서 내려오게’ 하며 천연덕스럽게 말을 덧붙이곤 방에서 나갔을 뿐이었다. 코너는 그게 그 나름의 배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지오가 악몽에 시달리는 그를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매번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을 대하는 그에게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농지의 저택에서는 늘 홀로 잠에서 깼다. 워싱턴과 함께 겪은 환영 이후로 줄곧 이어진 악몽은 코너를 괴롭혔고, 농지의 사람들은 그를 걱정했다. 그가 말없이 우울해하는 날이면 농지 전체가 우울함을 겪는 듯했다. 때로는 그 걱정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생각해주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는 스스로를 몇 번이고 다그쳐야만 했다.
악몽은 여전했다. 다만 이곳에 와서 달라진 점은 유노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그가 처음 로마의 대로변에서 선악과의 환상을 마주한 이후로 꾸준히 악몽의 대단원을 마무리 짓는 존재였다. 코너는 마른세수를 하며, 몸을 씻는 용도로 준비되어 있던 대야에 손을 뻗었다. 클라우디아는 부드러운 여성이었지만 이럴 때는 가차 없었다. 여성을 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코너에게 있어서 클라우디아는 에지오보다도 무서운 존재였다. 코너는 대충 씻은 뒤 서둘러 천으로 떨어지는 물기를 닦아내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


그가 이곳에 머무른지도 제법 시일이 흘렀다. 그동안에 소소한 변화들이 생겼다. 가장 큰 변화는 코너의 거처가 옮겨진 것이었다. 코너의 탈출 이후로 로마 지부의 분위기는 크게 어수선해졌고 노비스들의 불안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연륜 있는 그랜드마스터답게 에지오는 그 어수선함을 빠르게 정리했지만, 코너를 계속 지부에 두기에는 우려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나중에야 상황을 알게 된 ‘여우’나 바르톨로메오마저 근심어린 의견을 전해 왔고, 에지오는 멘토로서 그들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지금 코너의 거처는 피어나는 장미의 위쪽 다락방 중 한 군데가 되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휴식을 취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에지오가 처음 코너를 피어나는 장미로 데려 왔을 때 코너는 새로 맞은 자신의 거처에 매우 당황한 눈치였다. 장난기를 가득 담아 달려드는 매춘부들에게 그는 놀라울 정도로 수줍음을 탔다. 코너가 어쩔 줄 모르고 잔뜩 굳어서는 구원을 바라는 어린아이의 눈빛으로 에지오를 바라보았을 때, 에지오는 저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전의 날카로운 전사는 온데간데없고 쩔쩔매는 소년이 있을 뿐이었다.

충분히 젊은 나이이니 주변에 여성들을 꿰차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는 태어나서 처음 여자를 대하듯 매춘부들을 대했다. 매춘부들은 그런 코너를 좋아했다. 때로는 그녀들의 장난이 도를 지나쳐 에지오나 클라우디아가 저지해야 할 때도 있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는 부드러운 몸짓과 태도로 그녀들을 대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서 그녀들을 매춘부이기 이전에 사람으로 대해주는 것이 우러났다. 에지오나 클라우디아가 매춘부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코너의 태도에는 어딘지 모를 순수함이 묻어있었다. 그녀들의 성적인 접근을 코너는 수도하는 승려처럼 피해냈고, 매춘부들은 그의 그런 점을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에지오는 코너를 그 길바닥에서 다시 데려온 후 거의 그와 같이 행동했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와 말이 통하는 것이 오직 에지오 뿐이었기 때문이다. 코너와 대화를 나누는 에지오를 다른 이들은 마치 별세계 사람을 보듯 바라보며, 어떻게 코너의 말을 알아듣느냐고 물어왔다. 그는 딱히 답할 말이 없었다. 코너와 대화할 때 그는 청각에 의존해 알아듣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코너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직접 마음에 와 닿는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처음 그가 잠꼬대로 ‘어머니’라고 말해왔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그것은 코너 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같은 이탈리아 어라도 에지오가 하는 말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에지오가 지부 대신 피어나는 장미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 클라우디아는 내색은 안 해도 제법 좋아하는 것 같았고 에지오는 내심 자신이 그녀에게 그렇게나 소홀했는지를 돌이키며 씁쓸해졌다.

처음에 클라우디아는 에지오에게 크게 화를 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에겐 아무런 사정도 이야기해주지 않다가 난데없이 낯선 남자를 데려왔으니. 그녀는 코너를 꽤 경계했으나, 그를 지켜보고 그와 짤막하게나마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물론 둘이 말이 통하지 않으니 에지오가 중간에 껴서 서로의 말을 전해주어야만 했다), 코너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결론내린 것 같았다. 에지오는 종종 남자가 필요한 일, 장작을 패거나 뜯어진 천장을 보수하거나 하는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코너를 보았다. 코너가 피어나는 장미에 들어온 이후로 추태를 부리는 취객도 많이 줄었다고 매춘부들이 말했다. 적어도 코너는 소일이라도 하면서 무료하지 않을 테고, 클라우디아에겐 여러모로 도움이 되니 지부에 있기 보단 이곳에 계속 머물게 하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리라고 에지오는 생각했다. 이게 자기합리화라도 별수 없는 일이었다.

지부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아졌다고 해서 그가 그랜드마스터로서의 책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에지오의 하루는 전에 비해 바빠졌다. 때때로 코너가 로마에 익숙해지게 하기 위해 코너를 데리고 움직일 때도 있었다. 처음의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 비교적 안정을 찾은 코너는 헤매던 때와는 다르게 노련한 사냥꾼의 감으로 빠르게 로마를 파악해나갔다.

때로 그들은 로마의 경계까지 나가서 지는 해를 보고 돌아오기도 했고, 야심한 밤중에도 숲을 헤치며 여전히 숨어있는 보르지아의 잔당을 제거하기도 했다. 에지오는 코너의 몸집에서 나오는 육중하고 힘 있는 공격에 순수한 감탄을 보냈고, 코너는 에지오의 날렵하면서도 노련한 몸짓에 경의의 눈빛을 보냈다. 이런 때만큼은 현실의 문제를 제쳐놓고 둘 다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코너는 가끔 눈에 띄게 초조해했으나 지금으로써는 에지오도 코너도 별도리가 없었다.


*


함께 지낸 시간에 비해서 두 사람이 많은 말을 나눴던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그들이 길고 진지하게 나눈 대화는 코너가 어떻게 여기로 왔고, 어떤 경로로 암살자가 되었는지(그 마저도 아주 간략한 이야기여서 에지오는 이 젊은이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코너는 처음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밝히기를 꺼렸다. 말해도 에지오가 믿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에지오는 그런 코너에게 고개를 저으며, 지금 상황에서 못 믿을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코너는 수긍했고, 에지오는 단편적으로나마 코너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 짐작대로 코너는 암살단의 일원이었다. 그것도 꽤 숙련된. 동시에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와 시간을 사는 남자였다. 미래에서 왔다고? 에지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되는지 물으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그러는 편이 옳다는 확신이 들었다.

코너는 반신반의하며 이곳이 1500년대의 로마이고, 에지오가 정말로 그 ‘에지오 아우디토레’임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마음을 바꿨군. 에지오가 피식 웃으며 묻자 코너가 답했다. 더한 일도 겪어보았으니까요. 그리고 머뭇거리다 답을 덧붙였다.

“그녀의 뜻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말하는 그녀는 신전의 그들 중 하나였다. 에지오도 만난 적이 있었다. 다만 코너가 만난 이와는 다른 이였다. 그때 교황청의 지하에서 자신에게 데스몬드라는 이름을 속삭였던, 일생일대의 수수께끼만을 준 존재들. 에지오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코너가 이것을 그녀의 뜻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코너는 때때로 그녀의 환상을 보았다. 길을 걷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심지어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도 에지오는 코너가 고통스러워하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지켜보고는 했다. 때로는 그 말들 속에 ‘어머니’나 ‘아버지’같은 단어가 섞여 있기도 했다. 발작 같은 환영은 코너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에지오는 그때마다 이 젊은이가 안쓰러웠다. 어쩐지 자신의 커다란 몸보다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지오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곁에서 코너가 혼자 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강하게 그의 몸을 붙들어 잡고 지탱해주는 일뿐이었다.

“어쩌면.”

어느 때는 코너가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제가 겪고 있는 또 하나의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이전에도 겪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마치 눈앞에 벌어지는 모든 것들이 현실 같았습니다만, 결국엔 모두 선악과의 환영이었습니다.”

“자네가 지금 환상 속에 빠져 있고, 자네가 보는 모든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

코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빠진 눈을 했다. 실제로 선악과의 환영을 뼈저리게 겪었던 그의 입장에서라면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일이었다. 가만히 입술을 두드리며 생각에 빠진듯했던 에지오가 갑자기 코너의 팔을 낚아챘고, 코너는 소스라쳤다.

“그래도 나는 분명 여기에 있네만.”

하얗게 세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기며, 중년의 멘토는 부드럽게 웃었다.

“자네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내 삶을 진짜가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나는 좀 슬플 걸세.”


*


그 날은 유독 날이 더웠다. 한여름 로마의 작열하는 태양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했고, 사람들은 밖에 나오기보다 그늘 밑이나 실내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코너는 자신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제법 나아진 상태였고, 이제는 흉터만이 그 흔적을 남겼다. 어차피 그가 몸에 지닌 무수히 많은 상흔 중 하나로 남을 것이었다. 상처보다는 때때로 찾아오는 공황이 걱정이었다.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유노의 망령도.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그는 원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버티고 선, 자신이 숨을 쉬었던, 자신의 손으로 부수고 다시 일으켜야 했던 세계. 에지오에게 이곳이 극명한 현실이듯 코너에겐 그곳이 현실이었다. 비록 앞으로 나아갈 길이 더 많은 불완전한 곳이라고 해도. 자신의 손으로 망가뜨려 버린 것이 많다고 해도.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로마는 봄의 끝자락이었고, 지금은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이러다가 이곳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코너는 생각했다. 순간 마음 한쪽에서 ‘그게 뭐 어때서?’ 하는 질문이 튀어나왔고 코너는 그 질문에 놀랐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차가움이 코너를 감쌌다.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있었던 게 아닐까. 이곳의 안락함,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안락함이 그를 타성에 젖게 만든 것 같아 불안해졌다. 그의 지친 정신이 편안함에 길드는 것이 두려웠다. 어찌 되었든 이곳은 자신의 현실이 아니었다. 익숙해져서 좋을 것이 없었다.

“---!!!!”

무어라 외치는 고함이 코너의 생각을 비집고 들려왔다. 피어나는 장미에 커다란 비명이 울렸다.


*


눈앞의 노비스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아찔해졌다. 자신이 암살단에 들어온 이후로 숱한 피를 보았고 숱한 죽음을 보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그는 아침에 에지오와 함께 길을 나섰던 노비스 중 한 사람이었다.
침착하려 애썼지만 떨리는 입술에서 발음이 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불길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클라우디아가 노비스를 붙잡았다. 주변의 매춘부들이 의사를 부르기 위해 뛰쳐나갔고, 손님들은 혼비백산하며 달아났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할 수 있나요?”

노비스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의 상처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클라우디아는 되뇌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잘못되었을 리가 없어. 그녀는 자신의 오빠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강인한 투사였고, 쓰러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피어나는 불안이 클라우디아의 마음을 좀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15살에 아버지와 큰오빠, 그리고 동생을 잃었다. 그 사실은 그녀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그 이후로 그녀의 삶은 상실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집을 잃었고, 가족을 잃었고, 자신의 삶을 잃었고, 나중 가선 몸을 의탁하고 있던 곳마저 잃었다. 내색하지 않아도(딱히 내색할만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녀는 또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상실에 몸을 떨며 숨을 죽여야 했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기다림의 연속을 살아야 했다. 그녀가 집안의 진실을 알고 에지오와 다시 가까워지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둘은 예전의 사이를 회복했고, 클라우디아는 보다 굳건해진 마음으로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을 또다시 기다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커다란 손이 등을 두드려와 클라우디아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눈을 돌리니 이제는 익숙해진 남자가 서 있었다. 그녀가 수선해준 암살자 정복을 갖춰 입은 채였다. 피를 흘리던 노비스가 쥐어짜 내듯 말을 뱉어냈다.

“도시의 밖… 남쪽의 수로입니다….”

클라우디아는 코너에게 말을 전해 주려다 잠시 당황했다. 그와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에지오가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정작 상황이 상황이니…. 그때 클라우디아의 눈초리를 읽은 듯, 코너가 벽에 붙어있던 얇은 지도를 뜯어냈다. 암살자들의 임무를 파악하기 위해 만들어둔 간단한 약식 지도였다. 클라우디아가 노비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노비스는 피 묻은 손을 떨며 지도에 흔적을 남겼다. 클라우디아가 매여오는 목으로 코너에게 말했다.

“부탁해요.”

그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클라우디아는 간절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부탁해요. 코너는 대답 대신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정한 눈으로 클라우디아를 바라보았고, 자신의 도끼를 고쳐 잡고는 피어나는 장미를 나섰다.



5.



“정신 단단히 잡게.”

에지오는 붙잡고 있던 노비스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가 들었는지 의문이었다. 축 처진 몸을 에지오에게 의탁한 노비스의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었고, 그의 피가 에지오의 옷을 적셔왔다. 혀를 차며, 에지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지금 옛 수로의 지하 구조물에 은신해 있었다. 곳곳에 제각각 상처를 입은 다른 노비스 몇이 웅크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잃은 사람은 없었다. 다만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전투 중에 피신시킨 노비스였다. 에지오는 그가 부디 적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돌아갔기를 바랐다. 에지오는 그들의 멘토였고 그들의 생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에지오는 구멍이 뚫린 천장 새로 희미하게 비쳐오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흰 김이 그의 날숨에 섞여 퍼졌다.

남쪽 수로에 보르지아의 잔당이 남아있다는 소문이 시작이었다. 이 이야기가 믿을만한 소문인지에 대해 조사한 뒤 어느 정도 확신 한 에지오는 실전 경험을 익히게 할 겸 아직 수습단계의 노비스들을 이끌고 수로를 찾아왔다. 도시의 경계에 버려진 낡은 수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흘러가는 세월을 감내하고 있었다. 주변을 조사하던 노비스 중 한 사람이 구석에 숨겨져 있던 비밀 문을 발견했다. 최근까지 이용된 듯, 다른 곳에는 잔뜩 앉아있는 먼지가 문의 주변에는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체크메이트. 이제 왕을 잡으러 가보실까. 에지오는 문을 열고 통로의 안쪽으로 앞서 걸었다. 거기까지는 예정대로였다. 다만 그 뒤에 에지오를 경악시킨 일이 일어났다는 점이 문제였다.

여기에 은신 한지도 여러 시간이 흘렀고 해가 졌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에지오는 자신에게 기대고 있던 노비스를 조심스레 눕히고, 그나마 상처가 덜한 자에게 그의 지혈을 마저 부탁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몰라도 이들까지 온전히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에지오는 날이 부러진 자신의 암살검을 노비스의 것과 바꿔 착용했다. 늘 쓰던 익숙한 것이 아닌 탓에 약간 어색함이 느껴졌다. 헐거운 암살검의 고정끈을 최대한 조인 뒤, 에지오는 그들 중 그래도 가장 경험이 많은 편인 노비스에게 일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아까 탈출한 형제가 지원을 데리고 올 때까지. 만약 동이 트도록 지원이 오지 않고 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수로를 왼편에 끼고 탈출을 시도하게. 되도록 바람을 등지도록 하고.”

에지오는 노비스의 어깨를 힘주어 두드렸다. 걱정 어린 눈을 하고 있던 노비스가 멘토의 격려에 기운을 차린 듯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지오는 홀로 적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바깥으로 발을 디뎠다.


*

코너는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길을 찾았다. 얼마간 에지오가 그를 데리고 로마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탓에 코너는 이제 어느 정도 로마의 지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수풀을 토마호크로 쳐내며 코너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에지오가 강한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굳이 아킬레스에게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그의 무용담과 그에 대해 남겨진 전설 같은 일화들이 아니어도, 옆에서 그의 전투만 몇 번 지켜보아도 알 수 있었다. 에지오는 순수하게 강했다. 타고난 체격이나 몸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오랜 세월 쌓인 노련한 경험과 판단력, 거기에서 나오는 순발력이 에지오의 가장 큰 무기였다. 노비스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긴 했지만, 그는 에지오가 다치지 않았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죽을 정도로 상처를 입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가 여기서 죽었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도 바뀌어야 했을 테니까. 불안감이 덮쳐온 것은 그때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가 정말 그 미래일까? 모를 일이었다. 최소한 코너가 난데없이 200여 년 전의 로마로 떨어지는 미래는 거기에 적혀있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옴으로써 역사가 바뀔 가능성은? 자신이 하는 사소한 행동 하나가 역사를 바꾸었고, 무언가가 변할 수도 있다면? 만약, 만약에… 그로 인해 에지오가 자신이 아는 시기가 아닌 다른 시기에 죽을 수도 있다면?

갑자기 덜컥하고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단지 짐작일 뿐인데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템플러들을 처단하면서 아킬레스에게서 몇 번이고 들었던 이야기였다. 지금의 승자는 그를 이곳으로 날려 보낸 선악과였고, 그 선악과의 의지에 따라 역사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비록 환상이긴 하지만 선악과는 자신에게 바뀐 미래, 폭정을 휘두르는 워싱턴의 역사를 보여준 적도 있었다. 가슴이 묵직해졌다.

노비스가 지도에 표시해 준 곳 근처에서 길이 끊겼다. 코너는 날카로운 눈으로 발자국과 핏자국 같은 흔적들을 잡아냈다. 핏자국은 군데군데 희미하게 점점이 찍혀있었다. 그를 좇아 좀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별들이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더 어두워지면 추적은 어려워질 것이다. 뒤를 성큼 쫓아와 목덜미를 낚아채는 초조함을 떨치며, 코너는 신중하게 발을 디뎠다. 깊숙이 들어가자 잠들어있는 옛 수로가 나타났다.

고요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곳곳에 검붉은 피가 튀어있었고, 땅이 움푹 패여 있었다. 그 위로 기둥 몇 개가 쓰러져 있었다. 세월 때문이 아니라, 최근에 무언가 강한 충격을 받고 무너져 내린 모양새였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장면에 코너의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에지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코너는 소리를 내 에지오의 이름을 불러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 순간 정적을 깨고 말소리가 들려와 코너는 몸을 낮췄다.

"그 얼빠진 표정을 네놈들도 봤어야 했는데."

코너가 그대로 굳었다.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

코너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 코너는 오직 에지오와만 소통이 가능했다. 언어를 배우고 배우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코너의 영어는 내뱉어지는 순간 아예 다른 세계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들리는 듯했고, 그가 글씨를 써도 마찬가지여서 필담조차 불가능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내뱉는 언어들도 코너에게는 아예 엉뚱하고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들렸다. 이탈리아 어를 배워 소통하려다가 번번이 실패한 이유였다. 오직 에지오가 말하는 것만이 가슴을 타고 직접 전해져왔다. 둘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선악과의 힘으로 코너가 이곳에 올 때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어림짐작해 결론을 내렸다. 어찌 되었건 코너가 보았던 선악과와 에지오의 선악과-그것은 코너의 일 때문에 아직도 콜로세움의 저장고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지오의 수중에 있었다-의 공명으로 이곳에 코너가 불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코너가 이곳에 온 지 수개월 만에 에지오 외의 다른 사람의 말이 문장이 되어 코너에게 전해졌다. 심장이 크게 울렸다. 이것은 어쩌면 단서가 될지도 몰랐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몸을 감추고 있던 무너져 내린 기둥 밖으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자, 문제의 남자가 보였다. 다른 무장한 몇 사람과 함께 서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코너는 본능적으로 사람들 속에서 그 남자를 가려냈다. 남자의 무리가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코너는 조용히 뒤를 밟았다. 이윽고 트인 광장 같은 곳이 나왔다. 주변의 나무들이 원형을 그리며 감싸고 있는 형태의 작은 공간으로, 중심에선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남자는 크게 웃으며 자신의 무용담을 떠들어댔고, 주변의 병사들은 무어라 중얼거리며 동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꼴이라니! 천하의 암살자들께서 말이지!"

에지오의 이야기다. 코너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에지오가 무사할지 걱정스러웠다.

"어차피 독 안에 든 쥐들이야. 지하수로에 불을 놓을 준비를 해. 산 채로 익혀버리자고. 그런 뒤에 건배를 하는 거야. 에지오 아우디토레와- 그의 하얀 쥐새끼들을 위해!"

다음 순간 남자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고, 코너는 경악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이 남자의 손목을 꿰뚫고 비명과 고함이 높게 울려 퍼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

에지오는 능숙하게 단검을 꽂아 넣는 데 성공했고, 다음 순간 가뿐하게 적들의 사이로 내려앉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암살검의 고정끈이 자꾸만 덜걱거렸지만, 에지오는 수월하게 세 명째를 베는 데 성공했다. 경악에 물든 채 꿰뚫린 손목을 감싸 쥐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낮에 에지오를 당황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불빛 아래 선명히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의 반이 일그러진 화상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화상에 그을린 오른쪽 눈에는 안대를 차고 있었다. 남자의 가슴께에서 템플러의 문장, 붉은 십자가가 절걱거렸다. 남자의 손을 떠난 것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에지오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주변의 적을 빠르게 헤아려보았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적의 수는 예상보다 많았다. 어쩌면 조금 고생할지도 모르겠는걸.

"뒤가 비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에지오의 뒤에서 다가오던 적을 베며 끼어들었다. 뒤를 돌아 그의 정체를 확인한 에지오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늦었군."

코너, 하고 부르려던 말은 묵직한 갑주를 입은 중갑병의 공격으로 잠시 끊어졌다.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 중갑병의 공격을 쉽게 흘려낸 뒤 그의 뒷목에 암살검을 꽂아넣으며, 에지오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용케 찾아와줬어. 고맙네."

전설이나 다름없는 그랜드마스터의 말에는 그 나름대로의 진심이 담겨있어서 코너는 왠지 가슴 한 편이 뿌듯하니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에지오는 진정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코너는 든든한 아군이었다. 자신의 등을 맡기기에는 더더욱 그랬다. 주변을 둘러싼 병사의 수가 차츰 줄었다. 둘의 시선은 이내 땅에 뒹구는 물체를 찾으려 움직였으나, 화상을 입은 남자가 좀 더 빨랐다. 그는 아직 멀쩡한 한쪽 손을 뻗어 물건을 잡아 올리기 직전이었다. 물건이 푸르스름한 빛을 냈다. 코너가 혀를 차며 자리를 박차고 성큼 뛰었고, 남자를 향해 온 힘을 실어 몸을 던졌다. 다음 순간 남자와 코너는 동시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코너가 남자의 멱살을 잡았고, 빠른 속도로 암살검을 들이밀었다. 곧 느껴질 살을 파고드는 감각을 예상하던 코너의 뒤통수를 절규하는 울음소리가 강하게 때려왔고, 울음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코너와 에지오는 그 자세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작은 어린아이였다.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하고서, 어느샌가 어린아이는 땅에 떨어져 있던 물체를 주워든 후였다. 아이의 손에 들어간 것이 황금색과 백색, 푸른 빛을 있는 대로 쏟아냈다. 당황에서 제일 먼저 벗어난 에지오가 잽싸게 아이를 향해 움직였고, 다음 순간 화상의 남자가 찢어질 듯 큰소리로 외쳤다.

"아들은 건들지 마!"

코너의 속이 뒤집혔다. 갑작스레 찾아온 선악과의 환상이 또다시 그를 짓눌렀다.
다음 순간 아이는 코너 자신이 되어있었다. 어머니를 잃기 전의 어린 자신이었다. 자신이 서럽도록 눈물을 쏟아내며 선악과를 들고 있었다. 자신을 로마로 보낸, 북아메리카의 템플러 창고에서 보았던 바로 그 선악과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자신이 멱살을 잡고 있는 것은….

"네게 실망했다, 코너."

코너는 긴 신음을 흘렸다. 헤이덤이,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버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목에서 피가 진득하게 흘러나왔다. 자신이 낸 상처였다. 그를 죽이기 위한 일격으로 입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

"나는 너와 잘해보려 노력했었다."

코너도 알고 있었다. 뒤늦게 발견한 헤이담의 일지. 코너는 그 일지 앞에서 몇 번이고 아버지에게 닿지 않을 용서를 빌었다. 오해를 조금만 빨리 풀 수 있었더라면, 우리가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눴더라면.

"너는 늘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갑작스레 정신이 멍해졌다. 선악과의 황금빛이 그를 잔인하게 난도질했다. 다음 순간 코너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암흑 속으로 잠겨 들었다.


*

에지오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코너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에지오는 코너가 깨어있을지 혹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시체처럼 누워있을지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노비스들과 함께 찾았던 수로에서, 통로의 끝 넓은 공간에 도달한 에지오는 이내 보르지아의 잔당으로 추정되는 병사들과 맞닥뜨렸다. 되는 대로 그들을 베어 넘기며 전투는 점점 치열해졌고, 잔당은 에지오의 일행이 지나온 통로를 다시 되돌아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승리에 도취한 몇몇 노비스들이 앞서 나갔다. 비밀 문 입구의 밝은 빛이 보였고, 그 직후 굉음과 함께 노비스들이 나가떨어졌다.

다시 되돌아 나온 비밀 문의 입구에서 에지오와 노비스들을 맞이한 것은 화상을 입은 남자였다. 에지오는 그가 꺼내 든 물건 앞에 머릿속에서 소리 없는 고함이 들려오는 것을 인지했다.

선악과였다. 또 다른 에덴의 조각. 다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그 선악과는 황
금빛에 섞인 은색과 푸른색의 빛을 뿜었다. 노비스들이 가까이 다가가 검을 내리치면 그는 어느샌가 멀찍이 서서 그들의 헛손질을 비웃고 있거나, 혹은 노비스들이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그들을 후려치며 내팽개치고 있었다. 당혹스러웠다. 직접 선악과를 만지고 그것의 힘도 사용해본 에지오였지만 그 남자가 쓰는 그런 힘, 마치 자신의 손에 시간을 두고 놀리는 듯한 힘을 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노련한 에지오여도 갑자기 튀어나온 선악과와 그 힘 앞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부상에 하나둘씩 쓰러져가는 노비스들의 모습을 보다 못해 황급히 그들을 수습하여 지하로 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부터는 모든 일이 빠르게 일어났다. 에지오가 혈혈단신으로 화상의 남자를 급습했고, 도우러 온 코너가 끼어들었고, 선악과가 바닥에 떨어졌고….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의 아들을 본 코너가 발작을 일으키다 쓰러졌다. 에지오가 당황하여 코너에게 다가가는 사이 남자는 제 아들을 붙잡았고, 아차 하는 사이에 강한 빛과 함께 두 사람이 사라져버렸다.
휑한 공터에 남은 것은 무수히 많은 시체와 쓰러진 젊은 암살자 하나, 그리고 그 모든 소란 뒤에 홀로 서 있는 중년의 멘토뿐이었다.

처음에 쓰러진 코너가 숨조차 쉬지 않았기에 에지오는 그가 선악과의 영향을 받아 정말로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철렁했다. 다행히도 얼마 후에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지만, 안색은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노비스들을 수습하고 그들의 부상을 봐준 뒤 멘토답게 격려를 보내고, 그들을 북돋아 주고. 피어나는 장미로 돌아와 얼굴이 벌게진 클라우디아에게 실컷 혼이 나고 나니 이미 멀리서 동이 트기 시작할 때였다. 그는 걱정 때문에 잠조차 자지 못하고 자신을 기다렸을 여동생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그제야 화가 풀린 클라우디아가 코너는 그의 방에 있으니 한 번쯤 살펴보라는 말을 하고는 몸을 누이러 갔다. 코너의 방문 앞에 선 채, 피로한 몸짓으로 에지오가 뒷목을 주물렀다. 확실히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며칠 동안 푹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새로운 선악과가 나타난 이상 그것도 이미 튼 일이었다.

에지오는 거무죽죽한 안색으로 쓰러져있던 코너를 다시 떠올렸다. 종종 발작을 일으키긴 했지만 이렇게 정신을 잃는 것은 그가 맨 처음 지부에 나타난 이후로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는 처음 이곳에 와서 긴 잠을 자던 코너를 떠올렸다. 그때 에지오는 한편으로 그가 깨어나지 않길 바랐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실없이 자조했다. 그때와는 달리 지금 에지오는 그가 깨어있길 바랐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그의 안색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잠들어 있는 게 당연했다. 어차피 들어가도 자는 얼굴만 보고 나올 텐데. 긴 고민 끝에 에지오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코너.”

예상외로 그는 깨어있었다. 틔어오는 새벽의 어스름한 빛을 받은 채, 침대에 반쯤 몸을 일으키고 앉아 탁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청년의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간 듯 했다. 어깨가 축 쳐져있었다. 그 모습이 까닭 없이 처량하여 에지오는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그러고 있어도 괜찮겠나? 일단은 푹 자두는 게 어떤가.”

코너는 묵묵부답이었다. 에지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네는 오늘 너무 무리했어. 이건 부탁이 아니라 멘토로서 하는 명령일세. 좀 더 자두게.”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뜬금없이 내뱉어진 말에 에지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코너가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
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에 관련된 정보를 밝힐 때에도 되도록 필요한 정보만을 밝혔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아 왔다. 에지오가 그에게서 어머니나 아버지에 관련된 단어를 들을 수 있는 순간은 그가 경황없는 발작에 빠져든 처절한 순간뿐이었다. 그런 그가 에지오의 앞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게 실망했다고 하시더군요.”

에지오가 고개를 저었다.

“선악과가 보여준 환상에 연연하지 말게.”

그리고 강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일찍 결혼했다면 자네만한 아들이 있었겠지. 그리고 나라면, 자네 같은 아들을 둔 걸 자랑스러워 했을 걸세.”

코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에지오는 그의 눈과 마주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위태로움, 폭풍전야의 일렁임이 그 눈에 비치고 있었다. 코너가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에지오의 말이 그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빈 껍데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의 눈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몰라. 에지오는 오롯이 그의 시선을 받아내기 위해 미간이 절로 모일 정도로 힘주어 그를 바라보았다.

“제 아버지는 템플러의 그랜드마스터였습니다.”

이건 또 놀라운 이야기였다. 에지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무어라고 답을 해야 할지 황망했다. 묻고 싶은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한바탕 난장을 피우며 에지오의 속을 긁고 지나갔다. 그의 아버지가 템플러인데, 어떻게 코너가 암살자가 된 거지? 그가 이야기 하지 않은 엄청난 속사정이 검은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내며 에지오를 위협하는 듯했다. 당신은 나를 몰라.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몰라. 에지오는 주먹을 꽉 쥔 채로 그 시선에 응수했다. 그렇다면 말해주게나. 내가 자네를 이해할 수 있게. 모든 것을 말하라는 것은 아니네. 그것이 자네의 목을 그렇게나 조른다면, 털어놓아서 편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저는 어쩌면 그와 화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코너가 말끝을 얼버무렸고, 그의 시선이 흐려졌다. 그의 눈은 에지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서 헤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에지오는 코너가 하려는 뒷이야기를 깨달았다. 에지오의 마음 한편이 경악의 목소리를 냈고, 갈 곳을 잃은 말들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그는, 코너는, 자신의 아버지를.

“여전히 제가 신조를 짊어지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지막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었다. 매달리는 절규였다. 벼랑 끝에 몰린 짐승이 내는 고통스러운 비명이었다. 에지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을 부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청년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에지오는 까만 눈을 가득 물들이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켜보았다. 그다음 순간 에지오는 조용히 코너에게 다가섰고, 그의 어깨를 힘주어 붙잡았다. 긴 정적 끝에 에지오는 단 한마디만을 남겼다.

“괜찮네.”

짤막한 한 마디에는 모든 것들에 대한 대답이 들어있었다. 자네가 짊어진 것도, 자네가 해왔던 일도, 자네의 신념도 모두, 모두 괜찮다고.
코너는 무너지듯이 몸을 수그리며 떨었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던 에지오의 몸도 덩달아 내려갔다. 처음에 에지오는 코너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코너는 그저 억센 손길로 에지오의 손을 맞잡아 왔다.

온갖 감정이 담긴 채로, 청년의 입술이 에지오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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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크 백업_[코너에지]Once upon a time(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