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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크 백업_[코너에지]Once upon a time(10)~(完)


2014년 당시 개인공간에서 연재하고 책으로 냈던 120페이지 가량의 중편 소설입니다. 책으로 나올때는 구매자 분들께 인쇄비만을 받았으며, 모든 내용이 웹에 무료 공개되어있다는 점을 명시한 뒤 뽑았었습니다.


※총 14편 분량. 1~5, 6~9, 10~14로 나눠 올립니다.



10.


"깨어 있었어?"

클라우디아가 침대에 몸을 기대고 앉은 에지오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새 붕대와 약들이 잔뜩 들려있었다. 에지오가 여동생을 향해 웃었다.

"잠이 안 와서."

클라우디아가 엄청난 기세로 핀잔을 주기 시작했다. 자기가 환자인 건 알고 있는 거야?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에지오가 쓰게 웃었다. 그래.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랬지. 정확히는 잘 수가 없었던 것이지만.

에지오는 새벽 내내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대해 생각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났고(체감하기에는 아주, 아주 긴 시간이었다) 조금 전 일어난 일에 당황하여 얼어붙은 에지오에게서 황급히 떨어지며 코너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도 의도한 일이 아닌 듯했다. 불에라도 덴 것처럼 급하게 에지오에게서 손을 떼고 떨어지더니, 입을 몇 번이고 열었다 닫았다 하다 에지오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엄청난 기세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후드 아래로 슬쩍 보이는 얼굴이 불타오를 듯 후끈하게 달아올라 보였던 것을 기억한다.

달려나가는 코너를 붙잡을 생각도 못 하고 그 자리에 굳은 에지오는 자신이 피곤해서 겪지 않은 일을 겪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계속 생각해야만 했다. 혹시 꿈이었나? 내가 아직도 자고 있는건가? 그러나 닿았던 까칠한 입술의 감촉은 무시하기엔 너무 현실적이고 생생했다. 에지오는 왜 자신이 그를 바로 밀쳐낼 생각을 못 했는지 의아했다. 평소라면 아무리 놀랐다고 해도 반사적으로 밀쳐 냈을 텐데.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순간 온몸이 피로함을 외치며 잠을 호소했고 그는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며 짤막한 잠에 빠졌다. 그러다 얼마 못 가 다시 깨어나고, 했던 고민을 반복하고, 다시 짧은 토막잠에 들고, 다시 일어나 생각하고. 그렇게 이어진 밤이 허옇게 동을 틔우며 아침을 알려올 때까지 에지오는 잠을 설친 것이었다.

"하여간 다음번에도 이러고 돌아오기만 해봐."

클라우디아가 잔뜩 인상을 쓰며 쏘아붙였다. 그러나 날카로운 말과는 달리 에지오의 붕대를 갈고 상처를 보는 손은 한없이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며칠 새 부쩍 수척해진 그녀를 보며 에지오는 크나큰 죄책감을 느꼈다. 에지오는 입을 열었고 그녀에게 약속했다. 다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마. 그가 암살자로 있는 동안에는 아마 지켜지기 힘들겠지만, 지키려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는 약속이기는 했다.

"아, 참."

클라우디아가 말을 이었다.

"밖에 마키아벨리랑 다른 사람들이 와 있어. 오빠가 잠들어 있을까 봐 깨우고 싶지 않다고 들어오진 않았지만….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던데."

에지오가 마키아벨리의 말을 기억해냈다. 조만간 훨씬 더 좋은 소식을 들고 오지. 드디어 불카누스에게 닿는 길이 머지않았네.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정말로 제대로 된 단서를 잡은 모양이었다. 내심 그의 일 처리에 감탄하며 에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를 잡아 선악과를 되찾으면 코너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코너를 떠올리자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청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당장은 그가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
쿵 하고 바닥을 울리며 작은 나무가 쓰러졌다. 다섯 그루? 아니, 일곱 그루째군. 나무에다 대고 적을 베어 넘기듯 암살검과 온갖 무기로 상처를 남기던 코너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목 뒤에선 흥건히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해가 어스름을 남기며 황혼을 알려왔다. 로마의 외곽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며칠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에서 혹사당한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코너가 움직임을 멈추자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러자 다시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귀 끝까지 벌게지는 느낌이 들면서 얼굴이 홧홧했다.

코너는 남성은커녕 여성과도 성적인 접촉을 해본 일이 없었고, 그것이 그의 첫 입맞춤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인식하자 저도 모르게 다리가 풀렸고 그 자리에 주저앉듯 몸을 수그리고 말았다. 손끝이 작게 떨려왔다.

에지오의 입술은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웠고, 입가의 상처와 까끌까끌한 수염이 쓸리며 그 존재를 알려왔다. 자연스레 감촉이 머릿속에 덧그려졌다. 제발. 라둔하게둔. 코너는 저 자신의 이성에다 대고 소리쳤다. 적당히 해. 도대체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종종 동료들이나 아퀼라의 선원들이 자신에게 그런 것-매춘부들과의 일이나 잠깐 정박한 곳에서 만난 여성과의 뜨거운 밤 같은 것들-에 대해선 하나도 모른다며 놀리던 순간에도 이런 부끄러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저 무안했을 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곱아들었다.

온몸을 뒤덮는 순간의 부끄러움이 지나갔다. 갑자기 피가 식었다. 에지오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이었다. 그가 자신을 비난하고 화를 내는 것보다도, 거리를 둘까 봐 두려웠다. 순식간에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 그를 쳐다도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게 두려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젯밤 전까지는 그에게서 거리를 두려던 자신이었다. 더는 그의 시간을, 그의 삶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지금 자신은 에지오가 자신을 내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에지오가 모멸감을 느꼈을까 봐 그것이 무서웠다. 절대 그를 모욕하려던 게 아니었다. 자신은, 자신은 단지….

“나는 어째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신이 멍해졌다. 그것은 정말 충동적인 일이었고 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부디 에지오가 그 일로 마음이 상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자신은? 자신은 적어도 이 일, 자신이 스스로 남성에게 입을 맞춘 일로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부끄러움과 자신을 향한 작은 분노, 알 수 없는 간질거림 같은 감정들이 합쳐져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그 자리에서 감정을 못 견디고 자신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차가운 물이 필요해. 거기까지 생각하자 목이 타오르는 갈증을 호소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식사와 충분한 휴식.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분간 못 하고 그런 일을 벌였을 수도 있었다.

운이 좋으면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피어나는 장미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엌에서 한 끼를 얻어먹을 수 있을지도. 되도록 에지오와 만나지 않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아직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그가 자신을 냉정하게 쳐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외에도, 자신이 그를 보고 간밤의 일과 같은 행동을 또다시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미친것인가? 코너는 몇 번 크게 고개를 저었다.

비록 붉은 노을이 도시를 야금야금 삼키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은 해가 떠 있었고 피어나는 장미가 한창 분주할 시간이었다. 들키지 않고 조용히 들어가기엔 미묘한 때다. 해가 질 때까지 좀 더 먼 거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뒤 코너는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쓰러트린 나무들의 뒤편으로 저 멀리 웅장한 콜로세움의 윤곽이 공기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로마는 뉴욕이나 보스턴의 황폐와는 극명한 화려함과 번영으로 대비를 이루는 도시였다. 그 도시 속에서 코너는 지금 이방인이었고 혼자였다. 자신의 고민이 순간 너무나도 부질없는 일로 느껴져 코너는 허탈해졌다. 자신의 세계에서는 시시각각 비틀린 역사가 자신의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있을 텐데. 자신은 엉겁결에 저질러 버린 일에 대해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이었다. 에지오. 그의 마음에 화상처럼 남는 이름이 발걸음을 옮기는 그를 따라 붙었다.

어느 정도 많이 걸어왔다 싶었을 때쯤 태양이 뉘엿뉘엿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시가지의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코너는 좀 더 시간을 끌다 들어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눈앞에 판테온의 거대한 돔이 보였다. 순찰을 하던 경비병들이 교대를 위해 인사를 나누고 있었고, 곳곳에 등이 밝혀졌다. 가을밤의 선선함을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무심히 거리를 지나치려던 코너의 눈에 그것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그 아이였다. 수로에서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선악과를 들었던 아이. 어린 자신의 환영으로 나타났던, 화상 입은 남자의 아들.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다리가 멈췄고, 눈이 크게 떠졌다. 아이의 검은 머리가 거리의 등잔 밑에서 빛을 발했다. 창백한 피부가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아이와 코너의 눈이 마주쳤다.

아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손에는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던 선악과를 들고 있었다.

코너는 제가 하는 일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빠르게 뛰쳐나가고 있었다. 부딪힌 사람들이 무어라 소리를 쳤지만 코너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온통 아이와 선악과에 쏠려 있었다. 아이는 코너를 봤음에도 꿈쩍 않고 서 있었다. 아이가 입을 열었다. 선악과를 통해 아이의 말이 또렷하게 전해졌다.

“놓아줘.”

무슨 소리지? 순간 멍해짐을 느낀 코너에게 또다시 황금빛이 쇄도했다. 얼핏 유노가 보인 것 같았다. 큰 굉음이 덮쳐왔다.

*
“자네가 저번에 찾아갔다 습격 받은 건 여기. 로마의 밖에 있는 남쪽 수로였네.”

마키아벨리가 입을 뗐고, 그의 손이 지도 위의 작은 점을 짚었다. 그들은 에지오의 방에 들어와 다음 일을 논의 중이었다. 에지오가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곧 여우의 도적 길드와 바르톨로메오의 용병단을 차례로 짚었다.

“그다음 변절자들의 습격이 있었던 것은 여기지. 그리고 그 사이에 몇 번 자잘한 충돌들이 있었네.”

마키아벨리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지도 위에 호를 그렸다. 곁에 서 있던 여우와 에지오가 미심쩍은 얼굴을 했고, 바르톨로메오가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단지 소란들일 뿐인데.”

마키아벨리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노비스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요구했고, 이내 노비스가 깃대와 잉크병을 들고 나타났다. 주저 없이 깃대를 들고 지도 앞으로 다가온 마키아벨리가 제가 그렸던 호를 일이 일어났던 순서대로 덧그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다 같이 찌푸려졌다. 콜로세움을 중심으로 로마의 안과 밖을 거대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며 덧그려진 문양. 에지오가 제일 먼저 그 형태를 알아보았다.

“이건…. 내가 가진 선악과에 새겨진 문양들이군.”

지도 위에 놓인 점들이 하나의 선악과로 떠올랐다. 아직 콜로세움의 저장고에 봉인되지 못하고 지부의 지하에 잠들어 있는 선악과였다.

“뭔진 몰라도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네. 여기, 바로 이곳 로마에서. 남자의 심복은 다음 일이 일어날 장소로 여기를 지목했고.”

마키아벨리의 손이 닿은 곳은 판테온이었다. 일전 에지오가 경비병으로 위장하기 위해 잠시나마 잠입했던 곳. 짧게 말을 끝마친 마키아벨리가 에지오를 바라보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자네를 좀 더 쉬게 하고 싶네. 자네의 상처는 고작 하루 이틀 정도로 완치될만한 것이 아니니까.”

에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마음은 충분히 아네. 걱정만으로도 감사히 받지.”

에지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지도가 작게 바스락거렸다. 절대 최적의 몸 상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여우가 에지오의 의상과 암살검을 집어 그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으며 에지오가 물었다.

“코너는 여전히?”

“소식이 없네. 요즘의 그는 신출귀몰하니까.”

에지오가 멋쩍게 웃으며 그렇군. 하고 대답했다. 마키아벨리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무슨 일 있나? 싸우기라도?

“그건 아닌데…. 그럴 일이 있네.”

말끝을 대충 얼버무리며 에지오가 손을 저었다. 그들에겐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궁금한 표정을 했지만 에지오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호기심을 접고 집중해야 할 일에 관심을 돌렸다.

“그럼 판테온에서 다시 집결하는 것으로-”

밖이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진 것은 그 때였다. 큰소리에 바르톨로메오가 먼저 비앙카를 들고 방 밖으로 나섰고, 에지오를 비롯한 셋이 뒤따랐다. 쿵쾅거리는 소리와 약한 비명이 들렸다.

“코너?”

뜻밖에 밖의 소란을 일으킨 것은 그였다. 어젯밤 이후로 거의 하루를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청년. 차마 무언가를 따질 겨를도 없이 바르톨로메오가 큰 소리를 냈다.

“이봐- 피가!”

코너의 암살자 정복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달려 나온 클라우디아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에지오가 몸을 굳히며 코너에게 다가갔다. 코너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제 피가 아닙니다. 판테온에서 폭발이 있었습니다.”

에지오가 놀라 입을 벌렸다. 그가 작게 속삭였다. 한발 늦었군. 주위 사람들이 영문을 모른 채 얼굴을 굳히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코너가 말을 이었다.

“큰 폭발은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만…. 너무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미처 피하지 못한 몇몇 사람이 다쳐서 그들을 도와주고 오는 길입니다. 당신의 노비스들이 거기에 가 있을 겁니다. 제가 그곳을 떠나기 전에 현장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코너는 일의 수습 직후에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사안이 사안이니 그럴 수밖에. 에지오가 코너의 말을 옮겨주었을 때 모두의 표정이 경악으로 굳었고 피어나는 장미가 술렁였다. 모든 것이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코너가 숨을 고르다 덧붙였다.

“그곳에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 에지오가 의문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자 코너가 마저 답했다.

“수로에 있을 때 나타났던 그 아이. 남자의 아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선악과와 함께.”

에지오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놓쳤나?”

“붙잡으려 했습니다만…. 다가가자마자 폭발이 일어나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아쉽군. 그런데 어째서 아이가….”

순식간에 많은 생각이 에지오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이 점점 꼬이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턱에 손을 가져다 대는 에지오에게 마키아벨리가 재촉했다. 또 무슨 일인가?

“그곳에 아이가 있었다는군.”

“아이?”

“자네에게 말하는 걸 깜빡했어. 우리가 수로에서 습격받았을 때도 한 번 나타났었다네. 아직 한참 어린 조그마한 사내아이일세. 불카누스의 아들이야.”

마키아벨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를 놓치지 않고 에지오가 물었다. 왜 그러나?

“자네들이 본 게 정말로 그의 아들인가?”

“그자 입으로는 그렇다더군.”

에지오는 그러면서 아이에 대한 간단한 외양묘사를 덧붙였다. 듣고 있던 마키아벨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무언가 문제가 있나?”

“에지오.”

마키아벨리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자 아들은 죽었네. 몇 달 전 에스파냐에서.”

무슨? 에지오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마키아벨리를 바라보았다. 곁에 있던 코너가 그런 에지오를 불안한 눈초리로 흘끗거렸다. 마키아벨리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이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틀림없는 사실일세. 내가 그 애가 죽는 걸 직접 보았어.”



11.



판테온에서 있었던 폭발로 시민 세 사람이 크게 다치고 여러 명의 자잘한 부상자가 나왔다. 로마는 어수선함으로 술렁였고, 거리에는 평소보다 경비병들이 증강되었다. 암살자 지부는 에지오의 생환과 함께 가라앉은 분위기를 회복하고, 다시 철저한 자세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대비를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접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에지오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그에게 마키아벨리는 침착하게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풀어놓았다.

“내가 그자 때문에 에스파냐에서 발이 묶여 돌아오지 못했던 일을 기억할걸세.”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덕분에 암살자 지부의 몇몇 일 처리들까지 늦어졌었지.

“나는 그 봉쇄된 항구에서 몇 달을 체류했다네.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어. 나는 되도록 적은 인원만을 대동한 채였고 그자의 병력이 압도적이었으니까 말일세. 그러다가 오스만의 암살자 지부에 연락이 닿았고, 그곳의 형제들이 정예 몇을 모아 나를 지원하러 왔었네.”

마키아벨리가 착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꽤 치열했지. 그쪽도 우리도 큰 손실을 보았어. 오스만에는 빚을 지고 말았네만. 거의 반나절 정도를 대치했을걸세. 그러다가 전투가 일어났고….”

말끝이 흐려졌다. 마키아벨리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그자가 자기 아들을 종종 데리고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아이가 안전한 곳에서 빠져나와 전장에 끼어들 줄은 누가 알았겠나. 아무도 거기에 아이가 있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지. 심지어 그자조차도 말일세.”

이어지는 짧은 침묵.

“내가 본 것은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칼날에 맞아 쓰러지는 작은 아이였지. 누가 베었는지도 모르겠네. 그만큼 혼전이었으니까. 날이 밝았을 때…. 그자가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에스파냐를 탈출했다네.”

에지오는 저도 모르게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마키아벨리가 일전에도 말했듯 그들이 무고한 피를 흘려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절대적인 선이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희생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묵직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를 보았네. 분명 거기 있었어. 코너도 아까 판테온에서 보았다고 하지 않나.”

다음 순간 에지오가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을 했다. 멍하던 얼굴이 차츰 굳어지며 저도 모르게 천천히 말이 흘러나왔다.

“그 선악과는 시간을 지배한다고 했었지….”

마키아벨리의 얼굴이 덩달아 굳어졌다.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사람의 시간을 지배하고, 역사를 바꾸며, 미래의 사람을 200년 전의 과거로 보내버리는 힘을 가진 선악과라면.

“죽은 사람의 시간 또한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인가.”

대화가 끝난 직후 마키아벨리는 좀 더 알아보아야겠다며 몇 노비스를 이끌고 심복이 갇혀있는 지부로 달려갔다. 여우와 바르톨로메오는 판테온을 살펴보러 떠났다. 에지오가 같이 나서려 하자 어차피 한발 늦은 일 조금만 쉬라며 만류해오는 것이었다. 자네가 나설 곳은 마지막 결전이 되어도 늦지 않아. 담담한 말투로 말한 여우가 쏜살같이 달려나갔고 바르톨로메오가 따라 나섰다. 코너 또한 혹시 모를 위협이 있지는 않을지 피어나는 장미 주변을 둘러보겠다며 나간 지가 한참이었다. 에지오는 다시 홀로 남겨졌다. 이미 자취를 감춘 태양 대신 어스름한 초승달이 미약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갔다.

과연 무서운 존재였다. 선악과, 에덴의 조각, 사과. 어떤 이름으로 불리던 그것은 사람의 손에 있기에는 너무나 강대한 것이었고, 지금처럼 잘못된 손에 들어가 있다면 인류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말 것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남자의 손에서 선악과를 되찾아야 했다.

그다음 든 의문은 어째서 지도에 그려진 선악과의 문양이 자신이 가진 선악과의 문양인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남자는 에지오가 가진 선악과도 노리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아니, 그럴 이유가 충분했다. 지부는 아직까지는 안전했다. 대대적인 변절자 축출 이후로 믿을만한 자들이 교대로 선악과가 잠든 지하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에지오는 선악과를 직접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자신이 지켜야만 했다. 그럼으로써 혹시 모를 지부를 향한 공격도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선악과를 가지고 온다면 표적은 자신이 될 테니까.

무엇보다도 선악과를 가진 남자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맞대응할 수 있는 것은 에지오의 선악과였다. 그것을 쓰는 것은 떨떠름한 일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어쩔 수 없이 꺼내들어야 할 것이다. 창백한 어린아이가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 아이는-

상념을 끊고 조용히 방에 발을 디디는 존재가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코너였다.

*
코너는 몇 번이고 피어나는 장미 주변을 확인했다. 아무리 확인해도 모자랐다. 에지오의 부상을 생각했을 때 지금의 그는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다시는 그 어떤 것도 그를 위협해서는 안 되었다. 에지오의 죽음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이 아니라, 몇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여야 했다. 치열한 암살자의 길에서 은퇴한, 아내와 아이들이 함께하는 평화로운 마지막. 그가 이루는 가정을 생각하자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을 두드리며 코너는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에야 코너는 돌아왔다. 오는 길에 익숙한 얼굴의 매춘부가 다가와 그에게 물과 간단한 음식을 건넸다. 그제야 코너는 제가 지금까지 제대로 먹은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몸짓으로 가볍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자신이 홀로 남겨진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종종 이렇게 곳곳에서 코너의 존재를 잊지 않고 따뜻한 친절을 베풀었다. 에지오, 클라우디아, 그리고 이 여인들…. 그는 형제단과 농지의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멘토, 그가 그의 삶을 살도록 두고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의 세계에서 그는 이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 사람이니까. 돌아가고 나면 그의 어깨를 붙잡던 따뜻한 손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겠지.

주변의 안전을 보고하기 위해 에지오의 방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코너는 간밤의 일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너무 많은 일이 휩쓸고 지나갔고 경황이 없었던 나머지 그 일을 따질 겨를조차 없었다.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다시 부끄러움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혹여 지금이라도 에지오가 자신을 차갑게 내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하자 손끝이 식었다. 창가에 서 있던 에지오가 자신을 향해 뒤를 돌았다. 달빛이 역광으로 들어오는 탓에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것을 느끼며 코너가 입을 열었다.

“…피어나는 장미 주변은 안전합니다.”

말끝이 조금 떨려 나왔다. 코너는 자신을 붙잡고 왜 그랬냐고 다그치고 싶었다. 에지오가 답이 없었다. 초조함이 엄습해왔다.

“…….”

코너가 이대로 나갈지 말지를 갈등하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야 에지오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일세.”

“예?”

“폭발에 가까이 있었잖나. 자네 옷에 묻은 게 죄다 자네 피인 줄 알았지.”

코너가 움츠리며 자신의 암살자 정복을 내려다봤다. 사람들이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흘린 피가 옷에 흔적을 잔뜩 남기고 있었다. 폭발의 순간이 떠올랐다. 분명 코너는 폭발의 중심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선악과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겠지. 얼핏 보였던 유노의 잔상을 털어내며 코너가 씁쓸한 표정을 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이지. 판테온에서 홀로 애써주었어.”

코너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고, 이제야 에지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코너를 질책하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화를 내지도, 그에게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당장 나가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그의 얼굴에 청년을 향한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코너는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그 일 이후에도 에지오는 자신을 내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간밤의 일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기로 결정한 듯한 태도였다. 자신은 또다시 이 사람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오."

갑작스럽게 나온 에지오의 한마디에 코너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에지오의 미소가 환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웃을 줄도 아는군. 여기 와서 자네 웃는 건 처음 본 것 같은데.”

자신이 방금 웃었던가. 저도 모르게 입가가 올라간 것만이 느껴졌다. 에지오가 그의 얼굴에 화답하여 웃어주는 것이 좋았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다시금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에지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 아이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었네.”

코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너도 아이의 정체에 대해 전해 들었을 때 경악으로 온몸이 작게 떨려왔다. 남자는 자신의 죽은 아이에게 선악과의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사정은 안타까웠으나 무모한 짓이었다. 한편으로 코너는 자신이 선악과에 사로잡혔던 일이 떠올라 입안이 썼다. 자신은 선악과가 보여준 환영 속에서 점점 그 힘에 집착했다.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지막지한 힘. 환상 속에서 나눈 워싱턴과의 대화가 뇌리에 맴돌았다. 코너는 자신이 워싱턴에게 반박할 때 주저했던 것을 떠올렸다. 왕좌에 앉은 자신이 선악과를 집으라고 외쳐댔던 것도. 부끄러운 과거였지만 잊어서도 안 될 과거였다. 코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선악과의 힘에 사로잡힌 적이 있습니다.”

무덤덤한 고백이었다. 에지오가 눈을 크게 떴다. 환상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은 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선악과에 집착했던 일까지 털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쉽지 않은 고백이었으나 일전 언성을 높였을 때 나눴던 에지오와의 대화 이후로 코너는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털어놓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그는 이미 이전에 헤이덤의 일까지 그에게 고해했다.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그 힘이 주는 충족감에 저는 집요하게 매달렸습니다. 처음엔 분명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코너가 똑바로 에지오의 눈을 마주 봐왔다.

“제안에 있던 나약함이 말하더군요. 그걸 가지면 힘을 얻게 될 거라고. 제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비록 환상이었습니다만, 그 감정만큼은 너무나도 생생했습니다.”

처음엔 분명 화상의 남자, 불카누스도 그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그것이 주는 미래의 환영.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측정할 수 없는 힘과 다른 사람들을 정복하고 무릎 꿇리는 것에 대한 쾌감. 거기서 나아가 그는 그 힘으로 죽은 아들을 붙잡아둠으로써 필사적으로 선악과에 매달려 있는 것이겠지.

“처음 템플러들의 창고에서 선악과를 보았을 때, 저는 한편으로는 두려웠습니다. 제가 그것의 힘에 다시 사로잡힐까 봐. 당장 가지고 나가고 처분은 나중에 고민하자고 결론 내렸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이걸 처분하지 못하고 가지고 있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다. 에지오가 자신에게 실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그는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받은 영향과 그로 인한 변화를.

“마지막까지 바다속에 그것을 버리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결국, 해내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아직도 제안에 그것을 탐하는 마음이 남아있을까 봐 두렵습니다.”

코너의 말을 듣고 있던 에지오가 천천히 팔짱을 꼈다.

“자네만 그런 것이 아닐세. 아마 그것의 힘을 아는 누구나 다 그런 유혹과 충동을 느끼겠지.”

차분하고 담담한 말투였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지금보다는 좀 더 젊은 나에게 시간을 되돌려 열일곱의 그때로 돌아가 가족들을 살릴 수 있는 힘을 주겠다고 한다면- 나라도 쉽사리 거절하기는 힘들 걸세.”

코너가 약간 움찔했다. 그도 그런 생각을 하는가. 이전에도 그랬듯이 에지오는 종종 이렇게 멘토로서의 태도를 내려놓은 채 코너에게 이야기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걸 지금의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네.”

에지오가 쓰게 웃더니 덧붙였다.

“그리고 자네도 결국엔 그 환상을 이겨냈지 않나? 그것을 버리는 데도 성공했지.”

코너가 끄덕였고 에지오가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자네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이 사람의 말은 이리도 안정을 주는 것인지, 모든 것을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인지. 어쩌면 그렇기에 그가 이곳의 그랜드마스터로 인정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밀려오는 안도감에 코너는 숨을 삼켰다.

“그는 선악과를 빼앗기려 들지 않겠지요.”

“그렇지. 게다가 지금은 아들의 목숨이 걸려있어. 이런 표현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이미 죽은 사람의 목숨도,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면 살아있는 목숨으로 쳐야 하는 것인가. 코너 또한 마음속의 갈등을 느꼈다.

“그에게서 선악과를 빼앗는다면.”

“아이도 다시 죽겠지.”

코너의 말을 에지오가 자연스레 이어받았다. 무거운 울림이었다. 코너는 아이의 작은 몸집을 떠올렸다. 연약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팔다리와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
그들은 결국 아이를 또다시 죽음의 손에 인도해야 할 것이었다.

*
그날 밤에 코너는 유노와 다시 조우했다.

에지오의 방을 나와 제 방으로 돌아온 후, 코너는 착잡함에 잠 못 이루며 암살검의 날을 점검하고 있었다. 에지오는 곧 결전이 다가올 거라며 푹 쉬라고 말했다. 마키아벨리가 좋은 소식을 다시 가져올 것이라는 거였다. 코너도 에지오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떠나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로마에서 겪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역시 에지오와의 일들이었다.

아이에 대한 생각이 떠돌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섞여서 알 수 없는 구체를 만들어내더니 코너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이리 굴렀다가 저리 굴렀다가 하며 코너의 마음을 끊임없이 심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검의 날에 손가락을 베었고, 아차 싶어 손을 쥐는 순간 전의 그 느낌이 다시 코너를 덮쳤다. 살짝 소름이 돋았다. 코너는 최대한 담담하게 고개를 들어 눈앞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정령이여.”

오래간만에 보는 존재였다. 유노. 꽤 오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갑자기 나타난 것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그대가 선악과와 접촉하는 것이 늦어져서이다. 전사여.’

마치 코너의 마음을 읽은 듯이 유노가 답해왔다. 그녀의 말로 미루어보아 코너가 문제의 선악과와 접촉한 이후에만 그 힘을 빌려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고지가 눈앞입니다.”

‘서둘러야 한다. 전사여. 그대는 이미 늦을 만큼 늦었다. 조금만 더 늦는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대의 세계가 무너져내리겠지. 그대의 세계를 둘러싼 모든 인과 또한.’

감정 없는 목소리가 위협처럼 전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인과라. 그러고 보니. 코너가 물었다.

“저는 이미 이곳에서 역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보았습니다.”

판테온에서 있었던 폭발이나 에지오가 받은 습격, 그 밖에도 자잘한 사건들. 코너로 인해 바뀌기 시작한 에지오의 삶이 걱정이었다. 에지오의 삶에 변화가 생겨버린다면. 그리고 만약 그것들이 이후에도 영향을 미쳐, 자신이 있는 미래까지 바꿀 수 있는 일들이라면.

‘그것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째서입니까? 이미 벌어진 일들은-”

‘그 조각은 시간을 다스리는 조각이지. 전사여.’

차가운 선고가 뒤를 이었다.

‘그대가 그 조각을 봉인하는 순간, 그것은 시간을 되돌릴 것이다.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그대가 이곳에 오기 전의 시간으로.’

그녀는 지금 말하고 있었다. 에지오와 그가 함께했던 시간 모두가 없었던 일이 될 것이라고.




12.



방에 들어서자 에지오가 암살자 정복을 갖춰 입는 중이었다. 부상이 회복되기 전이어서인지 옷매무새를 만지다가도 몸을 자주 움찔거렸다. 들어오는 기척에 돌아본 에지오가 머쓱한 표정을 했다.

“이런 말 하기엔 자존심 상하네만…. 나도 예전 같지가 않아서 말일세.”

“아닙니다.”

아직 정정하십니다. 코너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에지오를 바라보았다. 억지로 옷에 끼워 넣어진 팔이 불편해 보였다. 풀린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게 어깨에서 바스락거렸다. 저도 모르게 코너가 두 손으로 에지오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공손한 손놀림이었다. 에지오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맙네. 하고 말을 건네 왔다.

“괜찮다면 잠깐만 붙잡고 있어주게. 아무래도 거치적거려서 말이지.”

손에 닿는 머리카락이 서늘했다. 에지오의 머리카락은 코너의 것보다 살짝 더 길었다.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섞이기 시작한 머리칼은 여성의 것처럼 부드럽거나 가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와 닿는 것이었다. 군데군데 거칠어진 머리카락의 끝이 손바닥을 가볍게 스쳤다. 코너는 그 감촉을 통해 에지오가 바로 곁에 있음을 실감하고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정적 속에 에지오의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이어졌다.

“이제 되었네.”

코너는 에지오의 목소리가 들리고도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 채 머리카락을 잡고 있다가, 에지오가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나서야 아차 싶어 손을 뗐다. 에지오의 굴곡진 손가락이 능숙하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고 끈을 매듭지었다.

“조만간 자를까 한다네.”

“머리카락 말씀이십니까?”

“젊었을 때 나름 멋을 부려보겠다고 기르기 시작한 건데, 이 나이가 되니 아무래도 거슬리고. 요새는 전투에도 방해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어쩐지 제가 더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에지오가 멋쩍게 웃었다. 코너는 잠깐 자신이 일전에 모호크 식으로 머리를 삭발했을 때를 떠올렸다. 자신은 에지오와는 다른 이유로 머리카락을 잘라냈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아깝지 않았다. 그에 걸맞은 이유도, 각오도 있었고. 하지만 에지오의 것은 왠지 아까웠다.

“그럼 가지.”

마키아벨리의 부름이었다. 결국, 심복에게서 무언가를 더 얻어낸 모양으로, 동이 트자마자 노비스를 보내 급하게 에지오를 호출했다. 앞서가는 에지오에게 코너가 다가서며 말을 꺼냈다.

“정령이 찾아왔었습니다.”

에지오가 멈춰 섰다. 고대의 그들 말인가? 코너가 대답했다. 예. 어제 제가 선악과와 접촉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어젯밤 유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소식을 하나 더 알렸다. 굳어있는 코너에게 그를 이곳으로 보낸 선악과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선악과의 힘을 쓰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손상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그 선악과가 한계에 도달해 있으니,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회수해 봉인하라며 유노가 말을 이었다.

'서두르게, 전사여.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유노는 그렇게 말했었다. 말을 전해 들은 에지오가 입을 일자로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 외에 더 알려온 것은 없나? 코너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들은 건 이게 답니다. 에지오는 그런 코너의 말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청년이 자신에게 많이 솔직해졌으니 더는 숨기는 게 없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코너는 되도록 그에게 감추는 것이 없게 하려 했다. 그래도 어제 그가 들었던 선고를 에지오에게 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대가 그 조각을 봉인하는 순간, 그것은 시간을 되돌릴 것이다.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그대가 이곳에 오기 전의 시간으로.’

왠지 모를 무력감에 코너는 몸을 떨었다. 과연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은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자신이 겪었던 일들과 그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없었던 일이 된다니. 물론 역사와 인과를 따진다면 그편이 옳았다. 그러나 마음 한편이 외쳤다. 그 시간들을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겠다니. 그 마음도, 기억도, 감정도. 더는 중요하지 않은 편린이 되어 흩어진다니.

“잔인하군요.”

“무엇이?”

에지오가 되묻고 나서야 움찔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코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이에게 생길 일이라면 어쩔 수 없다네.”

에지오는 코너의 말을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들이 선악과를 회수함으로써 두 번 죽어야 할 아이. 코너 또한 아이를 떠올리고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생명이 애처로웠다. 그러나 별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지부를 향해 지하수로를 통과하면서 에지오가 종종 몸을 움찔했다. 지하도의 한기가 상처에 시리게 느껴지는 탓이겠지. 코너는 에지오가 염려스러웠다. 평소라면 절대로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에지오의 노련함은 자신의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상처를 입은 상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저도 모르게 부축하려 몇 번이고 뻗은 손에 에지오는 괜찮다며 고개를 젓다가, 결국 마지막으로 뻗어온 손에 팔을 내미는 것이었다. 닿아오는 체온이 따뜻했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했다.

노비스들이 반갑게 에지오를 맞이했다. 에지오가 깨어나면서 코너를 향해 수군대던 악의들도 잠잠해지고 있었다. 노비스들과 가볍게 목례를 주고받으며 코너는 에지오를 따라 움직였다. 붙잡은 팔은 여전했다.

마키아벨리가 에지오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며 손짓해왔다. 마키아벨리가 서 있는 곳은 심복을 가둬둔 독방이었다. 한때는 코너가 갇혀있던 곳이기도 했다. 발치에 심복이 쓰러져있었다. 죽었나? 에지오가 묻자 마키아벨리가 답했다.

“그건 아닐세. 의식이 없어.”

에지오가 혀를 찼다.

“얻을 단서는 얻었지만…. 말하고 나서 자신이 불카누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혀 죽임 당할 거라 생각했는지 제 머리를 있는 힘껏 벽에 부딪히더군. 우리를 향한 저주는 덤이었네.”

“감사히 받아주도록 하지.”

에지오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그래서 다음은? 에지오가 물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콜로세움.”

“저장고가 있는 곳 말인가?”

“아무래도 그곳에서 일을 벌일 모양이네. 이자 말로는 돌아오는 만월이라고 해.”

“내일이군.”

이번을 놓친다면 다음 기회는 없을 것이다. 코너에게 마키아벨리의 말을 옮겨주며 에지오는 몸을 긴장시켰다. 어떻게 되었든 반드시 불카누스에게서 선악과를 회수해야 했다. 그리고 이 청년을 그의 세계로 돌려보내야 한다.

에지오는 천천히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우직할 정도로 곧은 눈매, 고집 있게 다물린 입. 그 입이 자신에게 닿았었다. 왠지 모를 어색함에 저도 모르게 웃으며 더욱 찬찬히 그를 살폈다. 많은 것을 짊어진 어깨와 무너질 줄을 모르는 신의. 청년이 돌아가고 나면 그리워질 것들이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은 몇 달 전 이곳에서였다. 감회가 새로웠다. 에지오가 코너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지막 기회일세.”

코너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웃으라고 몇 번 더 툭툭 쳐주고는 홀로 독방을 나왔다. 따라 나서려는 코너에게 여기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지금 가야 할 곳은 저 홀로 가야 하는 곳이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노비스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해왔다. 에지오에게서 가장 큰 신뢰를 받아온 사람들이었다. 절로 느껴지는 고마움에 노비스들의 어깨를 도닥이고 문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황금빛이 방 안을 메우고 있었다.

사보나롤라, 로드리고, 체사레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다시 에지오에게 돌아온 선악과였다. 하지만 주인은 내가 아니지. 에지오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 누구도 이것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돼. 손을 가져다 대자 공명하는 듯한 음이 몇 번 울리더니 잠잠해졌다. 가벼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고작 이렇게나 작은 물건일 뿐인데. 이것이 일으킬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하자 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부디 마지막에 도움이 되어주었으면 좋겠군. 에지오는 준비해 온 천 주머니 안에 그것을 조심스럽게 굴려 넣었다.

*
하루가 고요하게 지나갔다. 전투도, 피도, 죽음도 없을 듯이 흘러가는 평화로운 하루였다. 아무것도 바뀌는 것 없이 이대로 계속될 것만 같은 가을의 하루. 묘한 이질감이 긴장한 사람들의 몸을 훑었다.

다음날, 밤의 콜로세움에서는 공연이 한창이었다. 옛 희극이었다.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공연을 보며 웃기도 하고 손뼉을 치기도 했다. 물론 알아듣지 못하는 코너에게 그것은 그저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몸짓에 불과했다. 하긴 자신의 세계에서도 코너는 이런 공연을 즐겨본 적이 거의 없었다. 즐길 시간이 없었다고 해야 맞는 것이겠지. 비록 임무 때문이지만 공연장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이상했다.

헤이덤이 떠올랐다. 거지의 오페라.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보여 주었던 공연. 공연을 보면서, 그도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에 즐거워했을까. 자신의 곁에 수그리고 앉은 이의 온기가 느껴졌다. 에지오가 지루하다는 듯 몸을 비틀더니 코너에게 말을 걸어왔다. 시시한 공연이군. 코너가 답했다. 그런가요.

“나도 어릴 땐 피렌체에서 몇 번 연극을 보기도 했다네.”

좀 더 에지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하지만 정작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코너는 에지오가 말하는 단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귀를 기울였다. 이 목소리를, 자신의 곁에 기대오던 온기를 잊게 된다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심란해졌다. 물론 자신은 잊었다는 사실마저 잊겠지.

“다 옛날 일이네만.”

에지오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왔다. 코너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생각했다. 가슴 아파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완수해야 했다. 자신의 시간과 에지오의 시간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 이 사람을 더는 상처 입게 하지 않기 위해서.

“만약 이대로 일이 벌어진다면 쉽지 않겠어.”

에지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코너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콜로세움의 입구부터
중앙까지 사람들로 복작이고 있었다. 유혈사태가 벌어진다면 죄 없는 사람들이 피를 보고 말 것이다. 코너는 날카롭게 콜로세움의 이곳저곳을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사람들을 대피시킨다면 어느 쪽이 빠를지를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직은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짧은 평화. 짧은 유예였다.

“자네와 계속 이렇게 노닥거릴 수 있으면 좋겠군.”

뜻밖의 말에 코너가 에지오를 바라보았다. 마주 봐오는 호박색 눈이 다정했다.
그때 그들의 위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비스가 신호를 보냈다. 남자가 보인다는 신호였다. 동시에 에지오가 지니고 있던 선악과가 빛나며 주머니 사이로 황금빛이 옅게 새어나왔다. 몸이 긴장했다. 코너는 마지막으로 에지오에게 말하고 싶었다. 멘토. 저는. 그러나 에지오가 한발 빨랐다.

벌어진 일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코너가 굳었다. 코너의 이마 위에 짧게 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수염의 까칠한 감촉이 선명했다. 아직도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갑자기 불타올랐다. 그저 가벼운 접촉이었을 뿐인데. 저도 모르게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코너가 에지오를 바라보았다.

“행운을 비네.”

그들의 위에 있던 노비스는 이미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 뛰어 나가고 있었다. 콜로세움의 입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자신의 행동을 깨달을 겨를도 없이 코너의 큰 손이 에지오의 뒤통수를 빠르게 감쌌다. 전처럼 입술이 맞닿았다. 이번엔 짧지 않았다. 입맞춤이 끝나고 이마가 맞대어졌다. 에지오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했다. 입술이 얼얼했다.

“자네가 되려 나를 놀라게 하는군.”

그 말을 듣고도 코너는 부끄러워하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에지오의 뒤통수에 올린 손에 강하게 힘을 주며 말해오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 당신을 만나게 된 일, 당신과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있을 수 있었던 일, 그 밖의 모든 일에도. 청년의 마음이 온몸으로 전해져왔기에 에지오 또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닿은 이마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다치지 마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코너가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제치며 입구 쪽을 향해 달려나갔다. 에지오도 자세를 가다듬으며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다친 곳이 아려왔다. 속으로 혀를 차며 에지오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노력해보도록 하지.”

전해지지 않은 대답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
치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어. 코너가 생각했다. 이렇게나 사람이 밀집된 곳에서 일이 터지면 한두 사람이 다치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판테온에서는 정말 운이 좋았던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운이 따르리란 보장이 없었다.

달려나가던 코너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멀리 익숙한 윤곽이 먼지 구름 속에 보였다. 불카누스였다. 다만 그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달랐다….

그를 보지 못했던 동안에 그는 눈에 띄게 늙어 있었다. 기골이 장대하던 전과 달리 허리가 살짝 굽어 있었고 팔목이 앙상했다. 헐거워진 안대가 주름으로 처진 눈을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그것은 노인의 몸이었다. 선악과 때문이군. 유노의 말이 떠올랐다. 선악과가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던. 저 남자는 선악과가 망가지기 직전까지, 자신의 수명을 갉아 먹으며 선악과에 의존해 온 것이다. 남자도 코너를 발견한 눈치였다. 남자가 악의를 담은 시선으로 코너의 눈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덜덜 떠는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높이 올려진 팔 끝에서 선악과가 빛나고 있었다. 코너가 반사적으로 소리 질렀다.

“다들 여기서 나가십시오!”

코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이 코너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몇몇은 공연을 방해하지 말라는 듯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것이었다. 안 되겠군. 코너는 화살을 꺼내 들고 강하게 활시위를 당겼고, 그의 무기를 보고 놀란 사람들이 즉각 흩어졌다. 콜로세움 안에 서 있던 로마의 경비병들이 무어라 외치며 달려오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남자의 팔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선악과를 명중했고, 떨어진 선악과가 바닥을 굴렀다. 남자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뒤에서 남자의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수가 제법 많았다.

대기하고 있던 노비스들이 공중에서부터 뛰어 내려와 병사들을 찍어 눌렀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였다. 사람들의 비명과 동시에 혼전이 벌어졌다. 마키아벨리가 여우와 바르톨로메오를 이끌고 나타났다. 용병단도 함께였다. 바르톨로메오는 비앙카를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며 전투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의 검이 곧 피로 물들었다. 곳곳에서 쨍하고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마키아벨리와 여우는 조금이라도 무고한 사람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도망치는 시민들에게 길을 안내했다. 콜로세움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곳곳에서 피가 흘렀다. 굴러떨어진 선악과가 보이질 않았다. 몰려오는 병사들을 차근차근 베어 넘기며 코너는 초조하게 땅을 훑었다.

“멘토!”

시야의 가장자리에 잡힌 장면에 저도 모르게 외치며 코너의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시선의 끝에 에지오가 있었다. 여러 명의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였다. 에지오가 쥐고 있던 검이 중갑병이 휘두르는 묵직한 창끝에 멀리 날아갔다. 역시나 부상이 에지오의 발목을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변의 노비스들이 고함을 지르며 병사에게 달려들었고, 코너 또한 몸을 움직였다. 다가오는 코너를 에지오가 만류한 것은 그때였다.

“받게!”

에지오가 무언가를 던졌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주머니. 선악과가 담긴 것이었다.

“같은 선악과끼리라면 반응이 있을걸세!”

코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선악과는 코너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빛이 약해졌다가 강해지기를 반복하며 명멸했다. 코너가 뒤돌아보자 에지오가 다시 한 번 손짓했다. 자네는 자네의 일을 하게! 뒤에서 다가오던 병사의 목을 능숙하게 베어 가르며 에지오가 말했다. 어서!

코너는 에지오가 걱정되었지만 그를 믿기로 했다. 노비스들이 에지오의 주변에 합세하고 있었다. 그는 괜찮을 것이다…. 불안감으로 심장이 세게 쿵쾅거렸다. 코너가 앞을 향해 빠르게 걸어나가자 들고 있던 선악과의 빛이 점점 강해졌다. 그 반응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마침내 멀리 땅바닥에 놓여있는 또 다른 선악과가 보였다. 특유의 황금색이 섞인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동시에 불카누스도 선악과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급하게 달려오는 몸짓에 코너도 덩달아 뛰었다.

두 사람의 손이 동시에 선악과에 닿은 순간, 굉음과 함께 강렬한 빛이 엄습했다.



13.


등에 닿는 딱딱함을 느끼며 코너는 눈을 떴다. 멀리 위쪽에 뚫린 큰 동공으로 콜로세움의 불빛과 달빛이 어우러져 들어왔다. 판테온에서처럼 폭발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폭발로 지반이 무너졌고, 자신은 지반 아래 있던 지하도에 구겨지듯 처박혀 있었다. 제법 높은 곳에서 떨어진 몸이 잔잔한 통증을 호소했다. 큰 부상을 당한 건 아닌 듯, 몇 번 몸을 풀어주듯이 움직이니 다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졌다. 그때 위쪽의 구멍을 통해 에지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코너?”

“멘토.”

코너가 큰 목소리로 답했고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자네가 죽은 줄 알았잖나. 에지오의 목소리가 지하도를 우렁우렁 울리며 코너에게 전해졌다. 코너가 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도 곧 내려가지! 시간을 끌고 있게!”

그제야 선악과와 불카누스가 떠올랐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남자도 선악과도 보이질 않았다. 낭패였다. 에지오에게서 넘겨받은 것은? 코너는 급하게 허리춤을 더듬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아직 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약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다시 한 번 이것의 도움을 받아 남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코너는 주머니를 꺼내 들고 선악과의 빛에 의지해 길을 찾기 시작했다. 바닥의 돌부리들이 발을 걸어왔다. 몸이 약간 비틀거렸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이곳저곳으로 통하는 비밀입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길들 중 선악과가 반응하는 곳으로 다가섰다. 다음 순간 코너는 낭패를 느꼈다. 선악과가 두 개의 갈림길 모두에 반응하고 있었다. 남자의 속임수인가? 어느 쪽이지? 코너는 생각하다가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왼편의 길로 들어섰다.

축축하고 퀴퀴한 지하도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사방이 고요했다. 오직 자신의 발소리만이 크게 반사되어 들려올 뿐이었다. 코너는 걷다가도 종종 발걸음을 멈추고 혹시 다른 이의 기척이 들리지는 않는지 귀를 기울였다.

콜로세움에서의 작전이 있기 전 에지오가 귀띔해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콜로세움 지하의 비밀입구 중 신전으로 향하는 곳이 있네.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라는 대성당의 밑에 있는 곳이지. 어쩌면 화상의 남자가 그리로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곳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다음 순간 넓게 트인 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코너는 당황했다. 성당의 내부에 들어가 본 적이 많지는 않았지만, 농지의 교회나 로마의 몇몇 성당을 떠올렸을 때 자신이 보는 이곳은 분명히 성당은 아니었다. 성당이라기보다 일종의 제단같았다. 고대의 조각상들이 원형으로 둘러 서 있는 홀의 중앙에 양의 머리가 새겨진 크고 하얀 대리석이 놓여있었다. 코너 정도의 장정 하나쯤은 거뜬히 누울 수 있는 크기였다. 제단의 위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아직 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피였다.

코너가 긴장하며 몸을 낮췄다. 이 근처 어딘가에 남자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허리춤의 선악과가 강하고 밝은 황금빛을 뿌리고 있었다. 코너를 집어삼킬 듯한 정적이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악!”

굵직한 비명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코너가 토마호크를 꺼내 들고 바로 쥐었다. 뛰쳐나갈 준비를 기하며 정면을 주시하는 코너의 시야에 나타난 것은 역시나 화상의 남자, 불카누스였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손아귀 끝에 그의 병사가 허우적거리며 붙잡혀 있었다. 이미 크게 다친 듯 엄청나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불카누스는 폭삭 늙어버린 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제 몸집만 한 남자를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비록 겉모습은 노인이어도 그 힘은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제단의 피는 저 사람의 것인가.’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무엇을 하려는 거지? 무기를 쥔 손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대의 희생을 기억하지. 이해의 아버지와 성령의 어머니께서 그대를 인도하실걸세.”

제단에 끌려온 병사를 던지듯 눕히며 불카누스가 낮게 읊조렸다. 그 순간 병사가 갑자기 얌전해졌고, 그의 눈에 신의와 경건함이 가득 차오르는 것이었다. 불카누스가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일종의 기도문 같았다. 그가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단검이 들려있었다. 이상하게 빛나는 단검이었다. 마치 이 세계의 것이 아닌듯한…. 코너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우리의 인도자시여.”


낮게 깔리는 한 마디와 함께 불카누스의 손에 들려있던 단검이 빠른 속도로 내리쳐졌고, 병사의 피가 사방에 흩어졌다. 쿨럭거리며 뿜어져 나오는 피에 불카누스가 무언가를 꺼내 들이댔다. 선악과였다.

*

에지오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갑작스러운 폭발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몇몇 병사들이 무너져 내린 무대의 아래 깔려 신음하고 있었다. 에지오는 재빠르게 아직 서 있는 노비스들을 수습했다. 몇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투 중에 잃은 모양이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애도를 표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에지오가 자신에게 속삭였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

저 멀리서 폭발의 여파에 누워있던 바르톨로메오가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자신에게 여분의 검을 건넸다. 자네건 아까 날아갔잖나. 맞붙었던 병사에게서 빼앗은 검인 모양이었다. 에지오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고마움을 전했다.

"내려갈 건가?"

"그래야지."

물어오는 마키아벨리에게 답한 뒤 에지오는 천천히 구멍을 살폈다. 다른 길로 돌아가기보다 여기로 내려가는 게 빠르기야 하겠지만…. 구멍이 얼마나 깊을지 모르는 일이었고, 지금의 몸 상태로 위험을 부담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이건 포기하지. 가볍게 고개를 저은 에지오가 몸을 돌렸다. 그는 이미 이곳에 연결된 저장고를 알고 있었고, 지하로 내려가는 길 또한 알고 있었다. 코너와 엇갈릴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긴 했지만, 코너가 길을 잃지 않고 대성당과 그 아래의 신전만 잘 찾아온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자네들은 이곳에서 수습을 부탁하네.”

마키아벨리와 바르톨로메오, 노비스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 빠른 자들은 이미 다친 시민들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한 노비스가 다가와 콜로세움에 걸려있던 횃불 중 하나를 에지오에게 건넸다.

"무사하게."

뒤편에서 여우가 말해왔다. 동료들과 노비스들이 에지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조용히 끄덕인 뒤 에지오는 신전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콜로세움의 지하는 일종의 미로 같은 구성이었다. 원형의 콜로세움 밑에 잠들어 있는 고대의 미궁. 각기의 통로는 비밀 입구로 가는 길이기도 했고, 만에 하나 들어올 수도 있는 침입자를 대비하기 위한 수렁이기도 했다. 에지오는 부디 코너가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찾아오기를 바랐다.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에겐 자신이 넘겨준 선악과가 있으니. 한기에 상처가 시렸다. 횃불에 의지해 에지오는 앞을 향해 나아갔다.

얼마 가지 않아 코너가 떨어진 구멍이 보였다. 위에서 떨어져 내린 각종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싸움의 흔적 역시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에지오는 주변을 차분하게 둘러보았다. 남자와 코너가 남긴듯한 발자국이 이곳저곳에서 끊겨 있었다. 달빛 아래 오래된 먼지들이 춤추었다.

에지오는 코너가 나아갔던 갈림길로 향했다. 검은 구멍처럼 열린 두 개의 입구가 음산한 바람 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대성당으로 가는 길은 오른편이었다. 에지오는 조용히 방향을 틀어 대성당으로 향했다. 코너가 제대로 길을 찾았기만을 바랐다.

한동안 걷던 에지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이 정도 걸었으면 대성당이 나와야했다. 약한 당혹감을 느끼며 에지오가 여기저기에 횃불을 비췄다. 분명 눈에 익은, 익숙한 길이었다. 단지 길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진작 도착했어야 하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자기도 모르게 선악과의 환영에 사로잡힌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에지오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계속 나아갈지 혹은 되돌아갈지를 고민했다. 만약 되돌아가도 자신이 들어왔던 입구로 나갈 수 없다면?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한시가 급한 때에 이곳에 갇히고 말았다. 어쩌면, 코너가 선악과를 찾아 봉인하지 못한다면. 그는 여기에 영원히 갇혀 있을 수도 있었다. 다시 아려오는 상처를 움켜쥐며 에지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코너가 해내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그는 코너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 청년은 어떤 방해가 있어도 자신의 책임을 해내고야 말 사람이었다. 에지오는 그를 믿었다.

다만 자신이 이대로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최후의 결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초조함이 에지오의 마음속에서 슬금슬금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단은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슬슬 지치기 시작하는 다리를 앞으로 내디뎠다. 다음 순간 에지오는 가슴이 철렁했다.

저 앞에 유령처럼 아이가 서 있었다. 그들이 몇 번이고 생각했던 아이가 창백한 피부를 빛내며 가만히 에지오를 바라봐오는 것이었다. 하마터면 놀라 소스라칠 뻔했다. 아이는 그저 얌전히 서 있을 뿐, 에지오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에지오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추었다. 아이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작은 손과 발끝이 검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에지오는 한숨을 삼켰다. 아이의 몸은 이미 예전에 죽은 것이었다. 선악과의 힘이 오래갈수록 아이는 분명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얘야.”

에지오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최대한 친절하게, 적대적이지 않게 다가가고 싶었다. 겁을 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건 상대는 어린아이였다.

“너도 길을 잃었니?”

다음 순간 아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단단하게 막힌 길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구나.”

아이가 다시 한 번 강조하듯 손을 뻗어 막힌 길을 가리켰다. 에지오가 반응이 없자, 아이는 이내 막힌 길 쪽을 향해 작은 몸을 던졌다. 에지오는 놀란 눈을 했다.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통과해 사라졌다. 정말 유령이라도 된 것 마냥. 에지오는 천천히 일어나 방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곳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살펴보았으나 오랜 흙벽에 가로막힌 길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에지오가 천천히 손을 뻗었고, 아 하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자신의 팔이 자연스럽게 벽을 통과했다. 아무래도 이 벽 자체도 선악과의 환영인 모양이었다. 겉으로만 이렇게 보일 뿐, 사실은 뚫려있는 길일 것이다. 아이는 에지오를 안내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에지오는 천천히 벽의 너머로 들어갔다.

*

피로 물든 선악과가 이상한 빛을 내고 있었다. 경악한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코너가 불카누스를 바라보았다. 늙은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광기로 물들어 일그러져 있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다음 순간 노인이 코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들켰군.’

재빠르게 몸을 굴리자 코너가 있던 곳에 벼락같은 빛이 떨어졌다. 자세를 고쳐잡자 선악과와 단검을 손에 든 불카누스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죽어, 죽어!”

코너는 다시 한 번 선악과의 공격을 능숙하게 피해냈다. 그는 이미 워싱턴과의 결전에서 선악과의 힘을 지닌 워싱턴과 싸워본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자신에겐 선악과에 대항할 또 다른 선악과가 있었다. 다만 섣불리 쓰기가 껄끄러웠다.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야!”

“아니, 나는 가장 강대하고 위대한 자다! 신의 뜻을 이어받아 왕좌를 차지할 자이지!”

코너가 혀를 찼다. 노인의 손에 들린 선악과가 푸른빛에서 붉은빛으로 변하는 기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유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선악과가 한계에 도달했다고. 혹여 선악과가 견뎌내지 못하고 부서질까 봐 코너는 조마조마했다. 단검이 날아왔고 간발의 차로 코너가 그것을 피해냈다. 날아온 검이 옆에 있던 기둥에 강하게 박혔다. 땅이 울리고 천장이 무너질 듯 우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너 같은 이단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이해의 아버지와 성령의 어머니가 전하신 뜻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서!”

노인이 피를 토할 듯이 외쳐댔다. 제단의 곳곳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코너가 자신의 암살검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길게 대치할수록 좋지 않았다. 외치는 노인에게서 선악과에 홀렸을 때의 워싱턴과 자신이 겹쳐 보였다. 이 사람도 원래는 이러지 않았겠지. 씁쓸함이 훑고 지나갔으나 잠시였을 뿐이었다.

코너가 단검을 집어 날렸으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떨어졌다. 불카누스의 선악과가 그를 보호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엔 자신도 선악과를 꺼내야만 했다. 코너는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에지오가 건네주었던 선악과를 꺼내 들었다. 그것이 혹시 자신을 현혹하지는 않을까 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코너는 온전히 선악과를 들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잠시 전율이 느껴졌다.

다시 쇄도해오는 푸른빛에 코너가 황금빛으로 받아쳤다. 지잉하는 공명음이 울렸고, 제단을 둘러싼 지반이 또 한 번 흔들렸다. 빙 둘러 서 있던 조각상 몇 개가 힘없이 무너졌다. 불카누스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네가, 네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니!”

코너가 들고 있는 선악과를 향한 탐욕으로 늙은 눈이 번들거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추악한 욕망이었다.

“오랫동안 그것을 찾아다녔지.”

낮은 목소리가 코너를 위협해왔다. 내가 가진 것은 불완전한 것이야. 그게 있으면 완벽해질 수 있어. 속삭여오는 목소리가 음험했다. 아마도 그가 최종적으로 노리고 있었던 것은 에지오가 가지고 있었던 선악과인 모양이었다. 그도 자신이 가진 선악과가 영구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몇 번의 빛이 더 번쩍였다. 두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는 와중에 남자의 선악과가 이제는 완전한 붉은빛을 내고 있었다. 선악과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코너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만둬!”

“코너!”

낯익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급하게 고개를 돌린 코너를 붉은빛이 강하게 때렸다.

*

아이는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그 와중에도 종종 뒤를 돌아보며 에지오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얘야.”

에지오는 계속해서 아이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일까? 횃불의 빛을 받아 빛나는 아이의 검은 고수머리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다음 순간 아이가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정확히는 비명이라기보다는 높은 고주파음 같은 것이었다. 에지오가 소스라치며 귀를 틀어막았다.

“잠깐!”

비명이 끝나자마자 아이가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분명 어린아이인데도 무시할 수 없는 속력이었다. 에지오는 통증을 호소하는 상처를 눌러 쥐고 급하게 아이를 따랐다. 벌써 숨이 차올랐다. 정말이지, 이 정도 부상 정도는 감내하라고. 스스로를 책망하며 에지오는 아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검은 벽을 지나친 순간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그만둬!”

코너와 남자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코너!”

에지오의 부름에 코너가 돌아봤다. 아니, 지금은 아니지! 에지오가 생각하는 순간 불카누스의 공격이 코너를 때렸고 코너가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손에 들고 있던 황금빛 선악과가 쨍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그건 내 것이다!”

미친 듯이 달려오는 노인이 있었다. 불카누스였다. 그의 선악과가 언제 그런 것인지 붉은빛으로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에지오가 단검을 던졌지만 통하지 않았다. 혀를 차며 에지오가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는 순간 노인을 붙잡는 존재가 있었다.

“어째서!”

노인이 노여워했고 아이는 답이 없었다. 그저 어디서 나온 힘인지 모를 힘으로 강하게 노인을 붙잡는 것이었다. 그 때를 틈타 에지오가 코너의 곁으로 달려가 선악과를 집어 들었다. 코너? 엎드려 있는 청년의 어깨를 세게 흔들자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코너. 다시금 부르자 괜찮습니다. 하고 답해오며 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그만 좀 놀라게 하게. 자네 때문에 제 명에 못 죽겠군. 에지오가 코너의 팔을 단단히 붙잡으며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이 모든 게 다 너를 위한 예비인데!”

불카누스, 노인은 여전히 아이와 실랑이 중이었다. 아이의 검게 변한 손이 노인을 절대 놓지 않을 기세로 붙들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다 우리가 이어받을 왕좌를 위해서다! 너와 내가 함께 이 세상의 모든 영화를 손에 넣게 될 거야! 모든 힘과 위엄을 갖추고 세상을 호령할 거다!”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만 노인과 같은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이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비통을 담고 있었다.

“놓아줘.”

아이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고 코너와 에지오가 몸을 움찔했다. 코너는 판테온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아이는 말했었다. 놓아줘. 코너는 아이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놓아줘.

아이의 목소리가 가슴을 울려왔다. 그러나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준 권능을 포기하려 하다니! 그러고도 내 자식이란 말이냐!”

길길이 날뛰던 노인이 충혈된 눈으로 에지오의 선악과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에게도 내가 가진 것처럼 저것을 하나 주마. 그러면 너도 더는 불만이 없겠지. 낮고 위험한 목소리가 속삭여왔다. 에지오가 지지 않고 말했다.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보시지.”

에지오의 선악과가 황금빛을 뿜었다. 남자가 으르렁대며 자신의 붉은 선악과를 높이 들었다. 선악과에 점점 크게 금이 가고 있었다.

“에지오!”

코너가 다급하게 외쳤고 에지오가 자신의 선악과를 거두었다. 이대로 대치하게 되면, 그가 들고 있는 선악과가-

노인은 알 수 없는 단말마를 내지르며 부들거리는 손으로 선악과를 쥐고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이 점점 강해졌다. 공격이 연달아 쉴 새 없이 밀려왔고 간신히 피해낸 두 사람이 정신을 차렸을 때 노인의 선악과는 이미 두 동강 나기 직전이었다. 노인이 서 있던 하얀 제단은 이미 박살 나 있었다. 그때 아이가 노인의 몸을 끌어안고 무어라 속삭였다. 선악과가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빛을 쏟아냈다.

“안 돼!”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노인이 급하게 몸을 숙여 선악과를 끌어안았다. 마지막 남은 힘이라도 쥐어짜겠다는 듯한 몸놀림이었다. 꺼지기 전의 촛불처럼 선악과가 강하게 타올랐다.

“안 돼, 안 돼….”

노인이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그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작아진 노인은 이내 앙상하게 말라 들었다. 그의 살갗이 천천히 먼지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다음 순간 노인이 한 줌의 재처럼 흩어졌다. 경악한 에지오와 코너를 남겨둔 채로.

제단 위에 남겨진 선악과가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더 이상 빛은 나오지 않았다.




完.



코너와 에지오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선악과가 파괴된 것이다. 오만가지 단상이 두 사람의 뇌리를 훑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코너가 답을 구하듯 에지오에게 물어왔으나 에지오라고해서 답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저 멍하니 코너를 마주 볼 뿐이었다. 청년은, 청년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자신의 세계는? 아이가 천천히 다가왔다.

“놓아줘.”

아이가 말해왔고 에지오는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놓아 달라고 말하는 아이. 순간 깨달음이 에지오를 스쳤다. 아이는 선악과의 힘으로 살아 있다. 지금처럼 선악과가 파괴되었다면.

“너는 왜 죽지 않은 거지?”

에지오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는 그저 놓아달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의 눈이 매달려왔다. 놓아줘. 옆에서 코너 또한 당황한 몸짓을 했다.

“선악과가 파괴된 이상, 이 아이도….”

코너가 말을 하다 말고 에지오를 툭툭 쳤다. 정확히는 에지오의 허리춤이었다. 선악과가 빛을 내고 있었다. 에지오가 그것을 꺼내 들자, 아이에게 다가갈수록 빛이 점점 강해졌다.

“…지금 자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며 에지오가 말했다.

아이는 강한 선악과의 힘에 계속 노출되어 있었다. 죽은 몸이 썩어들어갈 때까지, 스스로 육체를 벗어나고 싶어 절규할 때까지. 그 과정에서 이변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지금 상태로 보았을 때-

“이 아이가 일종의…. 에덴의 조각이 된 것 같네.”

가능한 일인가? 에지오의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지금까지 봐왔던 선악과의 힘이라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알테어의 기록을 생각해보면 실제로 성배가 물건이 아닌 여성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사람의 신체가 에덴의 조각이 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대답을 돌려준 것은 자신들이나 아이가 아니었다.

‘대성당으로 돌아가게, 선지자여, 전사여.’

에지오와 코너가 놀란 표정으로 굳어졌다.

‘아이를 데리고.’

유노가 있었다. 공중에서 감정 없는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에지오는 유노를 처음 보았다. 그가 일전에 만난 것은 미네르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노를 보자마자 에지오는 그녀가 미네르바와 같은 일족임을 확신했다. 그 비인간성은 코너에게서 전해 들은 것과 다른 점이 없었다.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그 초월적 태도도. 어쩐지 오싹했다.

코너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아까 노인이 코너에게 던졌다가 기둥에 꽂혔던 그 단검이었다.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기묘한 빛을 시시각각 뿌리고 있는 단검. 이것의 용도는 아마도. 이후를 생각한 코너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뒤따라오는 에지오와 아이의 발소리가 자박자박 울렸다.

아이는 에지오가 직접 인도하고 있었다. 가만히 내민 손은 시리도록 차가웠지만 에지오의 손을 아프지 않게 잡아오는 것이었다. 숙연한 분위기가 성당으로 가는 길을 가득 채웠다.

“그러니까, 진짜 마지막이로군.”

에지오가 먼저 침묵을 깼다. 코너는 무어라 할지 몰라 말을 삼켰다. 에지오가 다시 말했다.

“흠. 정 대화하고 싶지 않으면-”

“아, 아닙니다.”

계속 해주세요. 코너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당신의 목소리를 귀에 새겨둘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코너의 입에서 떨리는 한숨이 샜다.

“그렇게 처져있지 말게. 돌아가면 자네의 삶을 살아. 자네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에지오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아직 한창 젊고, 해야 할 일도 해보고 싶은 일들도 많겠지. 과거에 발이 묶이기엔 아까운 사람이야.”

에지오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의 현재는 자네의 과거지. 그렇다면 그게 자네를 묶어두게 할 수는 없네. 저도 모르게 담긴 아쉬움이 말끝에 녹아 나왔다. 코너 또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코너는 고심 끝에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만난 것,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 그리고 죄송합니다.”

무엇이? 에지오가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제가 여기에 오면서 당신이 겪어야만 했었던 일들은 당신껜 옳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고.”

코너는 슬쩍 뒤돌아보며 에지오의 상처를, 정확히는 옷으로 가려진 그 부분을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그것이 에지오를 죽일 뻔했다는 걸 떠올리자 아찔해졌다. 에지오의 상처를 떠올릴 때마다 코너는 진득한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에지오가 답이 없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앞의 감사 인사는 받겠네. 뒤의 사과는 받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코너가 돌아보자 언제나 그가 짓던 미소가 되돌아왔다. 부드럽게 휘어지며 입가의 상처마저 온화해 보이는 미소.

"일이야 어찌 되었건 나는 살아서 여기 있네."

설마 내가 선악과의 환영으로 보이나? 에지오가 다시 한 번 장난기를 담은 질문을 던져왔고 코너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에지오가 아이의 손을 잡은 상태에서 코너의 손을 잡았다. 언제나 따뜻하고 강한 손이었다. 자신이 잃어버릴 온기이기도 했다. 코끝이 찡했다. 코너가 제일 선두에, 에지오와 아이가 줄줄이 뒤를 잇는 일렬종대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걸으니 꼭."

"꼭?"

가족 같군요. 코너가 뒷말을 삼켰다. 당신과 가족이 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하고 싶은 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주체가 되지 않았다. 하마터면 몰려오는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코너는 입을 여는 대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에지오의 손을 아프도록 세게 움켜쥐었다. 에지오는 순간적인 통증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자신의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저 코너가 잡아오는 것 못지않게 강한 힘으로 그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을 뿐이었다. 당신의 손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코너는 속으로 되뇌었다. 에지오의 손이 자신도 그렇다는 듯 코너의 손을 세게 잡아왔다. 코너는 이것이 자신만의 착각이 아니길 바랐다. 에지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거 아나? 자네는 처음 왔을 땐 꽤 경계가 심해서, 누가 자네 몸에 손을 대는 것도 싫어했지.”

그건 코너의 천성이었다. 에지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어울리는 법을 알게 되더니…. 이젠 이런 것도 피하지 않고, 자네가 먼저 다가오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혹시 아까 같은 격정적인 작별 인사가 또 필요한가?”

에지오가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콜로세움에서 전투 직전에 일어난 입맞춤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코너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뜨거워진 얼굴로 입을 닫았다. 에지오가 말했다. 농담일세. 설마 진짜로 필요한가? 코너가 급하게 도리질을 했다. 결례를 범할 수는 없습니다. 에지오가 웃었다. 지금까지 잘 범하지 않았나? 그것도 두 번이나. 코너의 얼굴이 귀까지 새빨개졌다. 에지오는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인사도 하지 않고 갔다고 클라우디아가 꽤 섭섭해하겠군.”

아닐 겁니다. 하고 코너가 말을 이으려다 삼켰다. 에지오는 선악과를, 정확히는 아이를 봉인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는 끝까지 모르는 편이 나았다. 코너는 진실을 밝히는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저 대신 안부 전해주십시오. 에지오가 그러지. 하고 웃었다.

대성당의 아래에 잠든 저장고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코너는 갑자기 에지오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그대로 실행했다. 에지오가 약간 놀란 기색을 비쳤다. 코너? 코너는 그저 조용히 에지오의 손을 자신의 쪽으로 가져왔고, 짧은 입맞춤을 에지오의 손등에 떨어뜨렸다. 코너가 헤이덤에 관한 일을 고백했을 때처럼. 코너는 자신이 느낀 감정들을 말하는 대신 한 번의 입맞춤으로 정리했고, 에지오는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회랑의 중심에 다가가자 다시금 유노가 나타났다.

‘때가 되었다. 전사여.’

코너는 조용히 유노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에지오의 선악과가 놓일 자리와 마주 보는 곳에, 또 다른 홈이 팬 곳이 있었다. 바닥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가 조용히 다가와 홈에 가슴을 대고 웅크리듯 누웠다.

“놓아줘.”

아이가 다시 말해왔다. 어느 때보다도 강한 음성이었다. 코너는 손에 단검을 든 채로 잠시 갈등했다. 봉인은 결국 아이의 죽음을 의미했다. 에지오가 옆에서 보더니 마음이 불편하다면 내가 하겠네. 하고 말을 걸어왔고 코너는 강하게 아니오. 하고 대답했다.

“이 일은 제가 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끝까지 자기 책임에 대한 신념이 대단한 청년이었다. 에지오는 코너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정말 이별이군. 자네가 그리울걸세. 그러더니 조용히 몸을 숙여 아이의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네게는 원래 아무 일도 없었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

에지오는 조용히 아이의 눈을 감겨주며 말했다. 금방 끝날 거다. 아프지 않을 거야.

“…Requiescat in pace.”

에지오의 말이 끝맺어짐과 동시에 코너는 부드럽게 아이의 몸을 눌렀다. 코너는 절대 눈을 돌리지 않기로 했다. 미안하다. 속삭이는 말과 함께 빛나는 단검이 아이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긴 한숨만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흐르는 아이의 피가 푸른빛을 내며 주변을 타고 흘렀고, 아이의 밑에 깔려있던 홈에도 가득 넘치기 시작했다. 단검이 녹아내려 아이의 몸과 하나가 되었다. 이내 아이의 몸이 점점 작아지더니 빛나는 푸른 구체로 변했다. 주변이 흔들리고 하얀빛들이 춤추었다. 코너는 에지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보지 못할, 떠올리지도 못할 따뜻한 황금빛의 눈. 코너는 에지오의 모습을 하나하나 새겼다. 가슴 아프리만치 새겨져서 잊지 않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코너, 코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농지와 형제단, 아퀼라의 사람들이었다. 정말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이 사람을 남겨둔 채로. 코너는 결국 참지 못하고 외쳤다.

“에지오, 저는 당신을-”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하얗게 채워오는 빛이 소리마저 없애버린 듯 정적이 몰려왔다. 하지만 에지오는 코너의 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만들어 내는 말에서, 결코 소리가 되어 내뱉어지지 못한 언어들에서.

코너가 말을 마쳤고 에지오가 환하게 웃었다. 다음 순간 넘치는 빛이 두 사람을 가득 메웠다.

*

에지오는 체사레에게서 되찾은 '사과'에 대한 처우를 고민 중이었다. 사실 저장고로 점 찍어둔 곳은 있었다. 콜로세움 밑. 그곳이라면 사과는 아무도 찾는 이 없이 안식 속에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어느 세월 동안은. 다만 그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몇몇 일들, 예를 들어 그때 교황청 지하에서 처음 들은 이후로 일생의 수수께끼가 된 데스몬드라는 이름 같은 것들에 대한 해답을 혹시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에덴의 사과를 살펴보고 있었다. 물론 이제는 빛나지도 않는 선악과를 노려보고 있다 한들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초조함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에지오는 이 물건을 바깥에 오래 둘수록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또다시 수수께끼인가.'

시선을 거두며 에지오는 또다시 체념의 순간을 겪었다. 근 며칠 사과를 살펴보며 겪어온 무수히 많은 실패의 시간 중 하나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이 위험한 물건을 콜로세움으로 가져가 검은 안식 속에 집어넣는 일뿐이었다. 에지오는 조용히 황금색의 사과에 손을 뻗었다.

선악과는 잠시 빛을 내더니 잠잠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에지오는 조용히 그것을 집어 들고 보관함에 넣었다. 그가 그것을 들고 가서 신전의 저장고에, 안식의 틈바귀에 잠들 도록 봉인할 때까지 선악과는 조용했다. 선악과를 저장고에 내려놓는 순간, 무언가의 씁쓸함이 에지오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금세 잊히고 말았다.

*

제 허리에 손을 댄 채로 코너는 경악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도대체가.’

창고의 문을 연 채 코너는 아연실색했다.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않은 상태로 함부로 움직인 몸이 시위하듯 삐걱거렸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꽤 많은 템플러 경비병들을 쓰러뜨려야 했고, 코너는 이곳에 무언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만큼의 경비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코너는 그런 생각으로 조용히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창고만이 코너를 맞이했을 뿐이었다.

‘그 많은 경비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어쩌면 일종의 연막작전일 수도 있었다. 일부러 이쪽에 경비를 집중시켜 시선을 끌어모은 다음 다른 곳에서 템플러의 회담이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찰스 리를 마지막으로 북아메리카의 템플러들을 거의 괴멸시킨 코너였지만 아직 남은 잔당들은 안심할 수 없었다. 제법 깊게 입은 자상이 쑤셨다. 지금은 우선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았다. 돌아가서 상처를 살펴야 했다. 부디 심한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가 행방을 미리 알리지 않고 홀로 움직인 탓에 형제단의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코너는 다시 한 번 창고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흔적 없이 깨끗한 곳을.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은 것 같은데, 무엇을 잊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코너는 조용히 뒤를 돌아 창고를 빠져나왔다. 하얀 달이 그의 뒤를 비추고 있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200여 년 전의 로마와 200여 년 후의 북아메리카에서 자신의 일을 하나 더 완수해 낸 두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 모든 일들을 머금은 채로 시간만이 조용히 흘러갔다. 그렇게, 또 그렇게.


Epilogue

봉인된 선악과-아이-는 완전한 형태가 아니었고, 덕분에 일종의 부작용을 남겼다. 깨끗이 잊혔어야 하는 것들이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그것이었다. 예를 들어 에지오가 저도 모르게 그의 노비스를 ‘코너’라고 부른다든지-그의 노비스 중엔 그런 이름을 한 사람이 없었다- 코너가 무의식적으로 저택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때때로 코너는 자신의 저택을 피어나는 장미라고 불렀고, 그걸 들은 농지 사람들이 싸구려 선술집의 이름 같다며 너털웃음을 짓는 일이 있기도 했다.

두 사람은 종종 이상함이나 허전함, 쓸쓸함을 느꼈지만 그들의 일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흘러갈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어느 날은 에지오가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가 콘스탄티노플로 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클라우디아는 놀란 눈치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꽤 오랫동안 길렀었잖아.

“전부터 생각은 했었지. 거치적거려서 말이다.”

이제는 주름이 지고 눈에 띄게 흰머리가 늘어난 오빠의 모습을 보며 클라우디아는 웃었다. 오빠도 늙긴 늙었나 봐. 발끈한 에지오가 아직 한창이니 무시하지 말라고 말하면 또다시 꽃망울이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클라우디아가 이제는 회색으로 바뀐 에지오의 암살자 정복을 내밀었다.

“꼬박꼬박 편지하는 거 잊으면 안 돼.”

그러도록 하마. 에지오가 대답했고 클라우디아가 덧붙였다.

“그리고 가기 전에 나한테 한 번 와. 내가 다시 다듬어줘야겠어.”

클라우디아가 어린 소녀일때처럼 혀를 내밀었다.

“오빠 이발 솜씨 아주 엉망이야.”

“네가 내 가슴에 못을 박는구나.”

에지오가 웃으며 화답했다.

“그러고 보니 코너가-”

“또 그런다.”

클라우디아가 지적하고 나서야 에지오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말해놓고도 누군지 모를 사람의 이름, 그 이름을 또 부른 모양이었다. 선악과를 저장고에 봉인한 이후로 종종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클라우디아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에지오를 놀렸다. 나이를 먹어서 기억력이 안 좋아진 거 아니야? 때로 에지오는 정말 클라우디아의 말이 맞는 것인지 고민하고 자존심 상해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이름엔 강한 울림이 있었다. 코너. 자신에게 남겨진 수수께끼인 데스몬드와는 또 다른 울림이었다. 이 이름을 말할 때마다 에지오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구나.”

클라우디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그랬다. 언젠가 어느 곳에서. 내 생애가 아닌 앞으로 펼쳐질 시간 동안, 다가올 미래에서. 조용히 에지오의 마음을 두드리며 찾아온 그리움이 똬리를 틀었다. 누군가가 있었다. 잊혀지고 만 기억의 편린들, 그 가장자리 어디엔가.

“누구긴 누구겠어. 지부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지.”

클라우디아가 재촉했다. 콘스탄티노플로 떠나는 에지오를 환송하기 위해 지부에 암살단의 형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에게 인사를 해야만 했다. 현실을 떠올리자 에지오는 금방 그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었다. 언젠가는.

*

그 날은 엘렌이 대번포트 저택에 와있었다. 전투로 너덜너덜해진 코너의 암살자 정복을 더는 못 봐주겠다며 온갖 수선 도구를 들고 찾아온 참이었다. 내친김에 코너의 옷장도 점검해주겠다며. 그녀의 친절을 감히 무시할 수 없어서 코너는 순순히 엘렌이 말하는 대로 얌전히 줄자를 든 그녀의 손에 몸을 맡겼다. 엘렌은 평소와는 다르게 엄격할 정도로 까다롭게 코너의 치수를 재고 몇 벌 없는 코너의 옷들을 살폈고, 코너는 오전 내내 시달린 끝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코너는 아킬레스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가족들 곁에서 영면을 취하게 된 자신의 스승 앞에. 때로 그가 보고 싶었다. 자신에게 투덜거리고 자주 대립하기는 했어도 아킬레스는 코너에게 있어 실질적인 아버지 노릇을 했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코너에게 주었다. 상념 속에서 코너가 입을 뗐다.

“아킬레스, 당신은.”

제 멘토였어요. 말하려던 순간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코너는 당황했다. 멘토. 그 단어에 저도 수습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의 파고가 다짜고짜 코너를 덮치고 있었다. 대항할 길이 없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고, 숨이 턱턱 막혔다. 코너는 저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진정해, 라둔하게둔. 쉽사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코너, 다음은 당신 선장복을-”

뒤에서 엘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코너가 침착하려 노력하면서 뒤를 돌았다. 엘렌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코너, 당신 지금….”

울고 있잖아요. 엘렌이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코너는 눈가로 손을 가져다 댔다. 정말이었다. 눈물이 마치 제 의지를 떠난 듯이 그의 볼과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엘렌도, 코너도 크게 당황했다. 코너는 제가 마지막으로 울었던 게 언제인지 떠올렸다. 이내 엘렌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는 당혹감과 자신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자신도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움 때문에 코너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엘렌이었다.

“억지로 보려던 건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코너는 되려 자신이 미안했다. 그러나 여전히 몸이 진정되지 않았고,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느라 황급히 자리를 뜨는 엘렌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어깨가 여전히 들썩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영원히 잃은 기분이었다. 답답했다. 눈물은 여전히 흘렀다.

*

에지오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멀리서 그의 소피아와 플라비아가 길가의 매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마침내 얻은 행복이었다. 그는 그의 생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완수해 냈고, 그에게 있었던 수수께끼도 모두 해결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는.

“푹 쉬시오, 늙은이.”

곁의 청년이 떠나갔다. 에지오의 눈이 천천히 감기고 있었다.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코너.”

그 순간 무언가의 깨달음이 에지오의 내부를 채웠고 에지오는 작게 웃었다. 그랬군. 앉아있던 청년이 떠난 자리에 또 다른 청년이 와서 앉는 느낌이었다. 실제로는 아무도 없었으나 에지오는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에지오는 그의 커다란 어깨를, 우직한 손을, 일렁이는 눈동자를 느꼈다.

“자네였군.”

에지오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영원한 안식이었다.

*

엘렌과의 일이 있은 지 며칠 안 되어 농지에서 축제가 열렸다. 농지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꽤 큰 축제였다. 사람들이 즐겁게 웃고 떠들며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코너의 마음도 살짝 들떴다.

축제의 명목은 조만간 태어날 미리암과 노리스의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미리암은 작년 겨울부터 입덧을 시작했다. 보통 입덧은 고기에는 더욱 심해지기 마련인데 미리암은 오히려 다른 것에 입덧을 하느라 고기만을 먹었다. 주변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 애가 나올 거야. 노리스는 싱글벙글했다.

그러나 코너는 내심 두 사람의 아이를 위한다는 목적이 축제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둘러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아이를 위한 축제는 고작 일주일 전에 끝난 참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을 위한 것이겠지.

엘렌이 코너의 눈물을 목격한 다음 날부터 농지의 사람들이 끝없이 코너를 찾아왔다. 들릴 일이 없는데도 공연히 저택에 와서 코너에게 안부를 묻기도 했고, 작물이나 새로 잡은 가축의 고기 등을 떠넘겨주고 가거나 다짜고짜 술병을 잔뜩 안고 들어와서는 한바탕 크게 벌리자며 코너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물론 코너는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기에 나중의 난장판을 홀로 치우는 입장이 되고는 했지만. 저택의 창고는 이젠 혼자 먹기엔 너무 많은 음식이 쌓여 몇 가지는 천천히 상하고 있기까지 했다. 그런 일들이 계속 이어지더니 결국엔 이렇게 축제가 열렸다. 사람들은 저택에 있겠다는 코너를 끌고 오며 즐기자고 외쳤다. 그것은 농지 사람들 나름의 배려였다. 그것을 알았기에 코너는 그저 모든 것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아킬레스는 좋은 분이었지요.”

축제의 구석에서 조용히 사람들을 지켜보던 코너에게 티모시 신부가 말을 걸어왔다.

“전에도 말했지만, 코너. 그는 당신을 정말 자랑스러워 했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가 아킬레스 때문에 눈물을 보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코너는 머쓱해졌다. 물론 그도 아킬레스가 그리웠다. 그러나 그때의 눈물은 좀 다른 것이었다. 어디가 다르냐고 물어온다면 그도 설명할 길이 없기는 했지만.

“우리가 좀 늦었나?”

고개를 돌리자 폴크너가 보였다. 아퀼라의 선원들을 뒤에 주렁주렁 매단 채였다. 그들은 뒤늦게나마 요란하게 판을 벌이며 끼어들었다. 이미 어디서 거나하게 한탕 하고 온 모양인 듯 선원 몇이 비틀거렸다. 코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폴크너.

“저들이 좀 거칠어도 여기에서까지 사고 칠 일은 절대 없으니 걱정 말게. 만약 그런다면 내가 녀석들을 아주 작살을 내놓지.”

폴크너가 호탕하게 웃었고, 젊은이가 걱정도 많다며 코너의 등을 약하게 쳤다. 그러더니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코너에게 말해왔다.

“자네를 위해 늘 아퀼라가 준비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었네. 자네가 원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항해하지. 길고 험난하고 뭣 같은 여정이겠지만, 재미는 있을 걸세.”

폴크너의 눈이 코너를 향한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애정 섞인 염려였다. 어느새 코너가 눈물을 흘렸다는 소문이 거기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코너가 멋쩍은 듯 코를 긁었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우울해 하지 말고…. 오, 그러고 보니.”

말을 잇던 폴크너가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여기 있을 텐데. 끙 소리를 내며 폴크너가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코너의 손바닥에 꼭 맞게 들어올 정도의 작은 나무 상자였다.

“재밌는 걸 찾아내서 말이지. 지난번 항해 때 이탈리아에서 온 암살단원을 만났네. 무역을 하면서 지부의 일을 돕던 남자였는데, 자기들이 새로운 유물을 찾아냈다고 하더군.”

그러면서 폴크너가 목소리를 낮췄다.

“에지오 아우디토레 말일세.”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코너의 심장이 철렁하고 떨어졌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코너에겐 아주 익숙한 이름이었다. 암살단의 선조, 아킬레스에게서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름. 그런데 지금은 와 닿는 느낌이 달랐다. 아프도록 처연하게 코너의 마음을 때리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폴크너는 아직 아킬레스의 북미 암살단 지부가 건재하던 시절 아퀼라와 함께 암살단의 일을 도왔고, 그 자신도 암살자로 일했다. 에지오 아우디토레를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코너와 함께 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후대를 위해 남겨두었던 것들이 차오 윤에게 간 것 말고도 몇 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고 말하더라고. 물론 내 생각엔 거짓말도 그런 거짓말이 따로 없네만. 실제로도 정말 별거 아닌 잡동사니까지 에지오 아우디토레의 것이라고 우기고 있더군. 200년은커녕 30년은 될까 말까 해 보이는 물건이었는데도 말이야.”

폴크너가 넉살 좋게 웃었다. 그 치들도 참 입술에 침 하나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한단 말이지.

“그런데 개중에 진짜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몇 개 있었어. 어떤 건 암살단을 위해 남겨진 거고, 어떤 건 그냥 일개 개인을 위해 남겨진 것이었지.”

이것처럼 말이야. 폴크너가 들고 있던 낡은 상자를 가볍게 흔들었다. 상자에선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여는 부분이 봉인되어 있었다. 코너의 눈이 상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모르겠네. 이게 과연 정말 그의 유산일지. 진짜라면 아마 그의 암살자 동료에게 보내는 것일지도. 그런데 퍽 재밌지 뭔가. 보자마자 자네밖에 생각이 안 나더군.”

폴크너가 상자를 가까이 들이댔다. 코너는 집중하며 상자의 뚜껑을 바라보았다. 작게 음각된 글자가 쓰여있었다. 이탈리아 어였다.

“글자의 뜻은 이렇다네. ‘더는-’”

“‘더는 상처받는 삶이 아니길 바라며, 코너’.”

폴크너가 놀란 눈을 했다. 자네 이탈리아어도 할 줄 아나? 코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이탈리아어를 알지 못했다. 그저 저도 모르게 그 뜻이 마음에 떠올랐을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음 순간 가슴이 내리 앉았다. 저도 모르게 눈가에 뜨거움이 몰려왔고 코너는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다. 폴크너가 물어왔다. 자네 괜찮나? 작게 끄덕이며 코너가 간신히 마음을 추슬렀다. 폴크너는 코너의 손을 내밀게 하더니 다짜고짜 상자를 건네주었다.

“당신의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니. 애초에 내가 가지려고 받아온 것도 아니고, 자네에게 주려고 가져온 거야.”

폴크너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걸 얻어내려고 그 단원을 얼마나 구슬렸는지 아나? 잘은 몰라도 내가 모은 재산의 절반 정도는 주었을걸?”

과장을 보태 말하며 폴크너가 눈을 찡긋했고 상자를 들고 있는 코너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말아 쥐었다. 그러니 받게. 이건 자네를 위한 내 선물이야.

“그냥 보자마자 자네에게 와야 할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뭐, 그 ‘코너’가 자네가 아니면 어떤가. 어딘가에 있을 코너라는 사람을 위해 자네가 보관해주고 있다가 그 사람이 나타나면 줘도 늦지는 않겠지.”

언제든 필요하면 아퀼라로 오게. 폴크너가 말을 맺었다. 코너는 그에게 마음 깊숙이 고개 숙여 감사했다. 폴크너는 그저 코너의 어깨를 몇 번 툭툭 두드리더니 흥에 취해 농지 사람들과 섞여 춤추는 선원들의 틈 사이로 끼어드는 것이었다. 나를 빼놓고 자네들끼리만 신 나게 놀아볼 생각인가? 고함이 들려왔고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들이 공기를 밝은색으로 채웠다.

*

코너는 로마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즈음에 에지오에게서 잠깐이나마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결국, 제대로 익혀지지가 않고 끝까지 말이 통하지 않아 포기하기는 했지만. 배우기 시작할 무렵에 코너는 에지오에게 물었었다.

“정작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소용은 없을 겁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지 않겠나? 갑자기 말이 통하게 될지도 모르고.”

에지오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난 꽤 바쁜 사람이라네. 내가 시간을 내서 이 정도라도 봐 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실은 코너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뿐이라서 말을 가르칠 수 있는 것도 그 뿐이었다. 별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뭐 할 줄 아는 다른 언어가 있나?”

“제 부족의 언어를 씁니다.”

“라둔하게둔은 그곳에서의 이름인가?”

에지오는 저번 코너가 통성명을 해왔을 때를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코너는 말했었다. 라둔하게둔. 아니면 편하게 코너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렇습니다.”

코너가 담담히 말했다. 에지오가 손끝을 턱밑에 가져다 댔다.

“힘든 발음이군. 라- 라둔-”

발음을 가다듬는 에지오를 코너가 무심히 바라보았다. 에지오가 다시 물어왔다. 무슨 의미가 있나? 코너는 그에게 답하지 않으려 했다. 실제로 답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제 목소리가 저보다도 앞서 말하고 있었다.

“상처받은 삶.”

정적이 이어졌고, 에지오가 머쓱해하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도 그냥 코너라고 부르지. 코너는 후회했다. 어째서 이 사람에게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게 되는 것인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인데도. 나중에 헤이덤의 일과 다른 일도 고해하게 될 것이었지만 그것은 아직 코너도 모르는 훗날의 일이었다. 에지오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다음 단어로 넘어가지.”

*

밤이 깊은 후에 코너는 조용히 저택으로 돌아왔다. 축제의 열기가 가신 농지는 단잠에 빠져있었다. 여관 근처에서 해후를 즐기며 노닥거리는 몇 사람만이 깨어있을 뿐이었다. 코너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저택에 들어온 뒤 코너는 천천히 아킬레스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안쪽 주머니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던 작은 상자가 코너를 깨어있게 했다. 다시 꺼내 살펴보니 꽤 낡은 것이었다. 정말로 200년이 넘은 물건일지도 모른다.

코너는 상자를 마치 유리처럼 조심히 다루었다. 봉인은 다 닳아 있었다. 코너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상자를 열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자세히 보니, 작은 종이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잔뜩 색이 바랜 것이었다. 그 아래에 무언가가 또 있었다.

“이건?”

코너는 천천히 안의 내용물을 들어 올렸다. 짧은 머리카락이었다. 낡은 붉은 천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어 매듭짓고 있었다. 군데군데 흰머리가 섞인, 약간은 거친 머리칼. 엘렌이나 미리암이 옆에서 봤다면 기분 나쁘다며 무어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코너에겐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아까부터 몰려오는 감정의 파도가 주체되질 않아 코너는 잠시 동안 몸에 힘을 빼고 늘어뜨린 채 감정들이 자신을 지배하게 내버려두었다. 손에 들린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감싸쥔 채였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고 나서야 코너는 쪽지를 열었다. 쪽지 역시 이탈리아어였지만 코너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저 그 뜻이 마음에 떠올랐다. 이것이 정말로 그 뜻일지는 몰랐으나, 코너는 자신이 맞게 이해하고 있다는 왠지 모를 강한 확신이 들었다.

자네가 누군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내가 이러는 이유도 모르겠네.
그냥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았네.

-에지오 아우디토레.


*

코너는 상자에서 나온 머리카락을 다른 재료들과 엮어 작은 장신구를 만들었다. 허리춤에 달 수 있는 것이었다. 꼼꼼하고 섬세한 손놀림으로 만든 장신구는 제법 눈에 띄는 것이어서 보는 사람마다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그때마다 코너는 어쩌다 얻은 것이라며 얼버무리고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저 폴크너만이 알겠다는 눈초리를 보내왔을 뿐이었다.

장신구는 코너의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언제까지고, 언제까지나.

*

마지막에 서서 코너는 자신의 삶을 돌이켰다. 미련이 하나도 남지 않은 삶이냐고 물어본다면 코너는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했던 일 중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하는 일이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코너는 그렇지는 않다고 답할 것이다. 헤이덤과의 일과는 별개로, 그는 생애를 치열하게 완수해냈고, 결국 여기까지 도달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자신이 이룩한 일, 할 수밖에 없었던 일, 지나간 시간과 사랑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코너의 손이 장신구를 꼭 쥐었다. 따뜻한 빛에 둘러싸이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 순간 코너는 하얀 물결이 넘실대는 바닷가에 서 있었다.

저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머니, 카나도곤, 아킬레스… 그리고 아버지. 그때였다. 그들 틈에 섞여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사람이 보였다. 코너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이제야.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이제야, 이제야.

코너는 천천히 걸었다. 그다음엔 달리고 있었다. 달리면서 점점 자신의 몸이 그때의 청년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 길의 끝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리고 자신이 처음으로 마음에 담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아마도 줄곧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더는 잊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기억해냈으니까. 드디어 다시 만났으니까.


환하게 웃는 그의 따뜻한 손을 잡으며 코너는 눈을 감았다.



Once upon a time(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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