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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크 백업_[유숲에지]키워드 : 첫날밤 for. 화델님

20140813


*2014년에 쓴 글인데 백업하는 2017년에 다시 와서 보자니 참... 굳이 남캐들의 서사를 진행하기 위해 여캐를 희생시킬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도 드네요. 3년 만에 보니까 여러모로 부족하고 감회가 새로운데 백업 자체에 의미가 있으므로 거슬리는 대사 몇 개만 수정하여 올립니다.


첫날밤



 낮부터 그랜드 바자가 소란스러웠다. 이리저리 섞이는 사람들의 물결. 색, 빛, 유영하며 날아다니는 하얀 먼지들. 근처 향신료의 매대에서도 느긋한 향기들이 춤을 추며 공기 중에 흩어졌다. 사람들이 내뱉은 더운 숨이 바자를 좀 더 번잡하게 느껴지게 했다. 그 한쪽 구석에서 시장의 이모저모를 구경하며 유수프는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바자의 떠들썩함에 긴장감이 풀려나갔다. 유수프는 머리가 여물기도 전, 아무 걱정 없이 활개를 치며 한참을 쏘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이곳의 분위기를 좋아했다. 나고 자란 고향이 주는 특유의 공기에서 오는 안정감이란 으레 그런 것이었다. 불현듯 고향을 떠나 이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떠올랐다. 유수프는 내심 그가 여기를 좋아해 주길 바랐다. 이곳의 공기를, 이국적이고 다채로워서 언제나 새로운 그 느낌을 좋아해 주기를. 그래서 좀 더 이곳에 남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자신이 해놓고도 실없는 생각인지라 유수프가 피식 웃었다.

 유수프가 에지오에 대한 마음을 결정한 것은 제법 빠르게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결코 성급한 판단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내는 여유로움이나 느긋함과는 다르게 그는 그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제법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남자였다. 에지오를 처음 만나고, 그가 가진 황금빛의 눈을 뇌리에 새기고 난 지 얼마 안 되어 유수프는 자신이 품은 감정에 대해 차분히 정의를 내렸다. 물론 그것을 에지오에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서지 않아 보류해두고 있던 터였다. 굳이 자신이 말을 하려고 해도 에지오가 그 나름의 일로 분주했기에 터놓고 말할 시간이 없기도 했다.

 암살단의 일을 해내는 와중에도 유수프의 눈은 로마에서 온 중년의 멘토에게 붙박이곤 했다. 그의 가벼운 손짓이나 말, 진중한 울림을 남기는 목소리마저 유수프를 들뜨게 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던 중에 드디어 멀리서 찾던 사람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유수프가 씨익 웃으며 다가오는 이에게 말을 붙였다.

 “늦었군, 멘토.”

 “오면서 일이 좀 있었네. 예니체리를 따돌려야만 했어.”

 에지오가 말하며 엿듣는 사람은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미행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뒷말이 따라 나왔다. 그나저나 단서를 잡았다고. 유수프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며칠째 비잔티움의 뒤를 쫓으며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 도중에 몇 노비스들이 크게 다치거나 암살단과 관련된 사람들이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다음 생각에 이르러 유수프는 쓰게 웃었다.

 “사라졌던 사람 중 하나가 발견되었어.”

 에지오가 계속 하라는 듯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유수프가 말을 이었다. 이건 멘토가 직접 봐야 할 걸세.

 유수프가 에지오를 이끈 곳은 밝은 바자의 분위기와 대비를 이루는 도시의 한구석, 낡은 폐가였다. 해가 쨍하게 떠 있는데도 낡은 천장의 구멍 사이로 새들어오는 빛을 제외하고는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이 쥐죽은 듯한 고요만이 흘렀다. 먼저 도착해있던 암살자들 몇이 들어서는 에지오와 유수프에게 인사를 건넸다. 훅하고 비릿한 냄새가 끼쳐왔다. 난잡하게 뒹구는 잡동사니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가 구석의 벽에 걸려있던 천을 젖히는 순간 에지오가 작게 속삭였다.

 “Requiescat in pace.”

 에지오도 유수프도 잠깐동안 말이 없었다. 현장은 참혹했다. 천의 너머에 있던 공간은 방의 중심에 누워있는 작은 여인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여인의 손에 걸려있는 장신구가 덧없이 빛났다. 입고 있던 화려한 예복 또한 처참하게 찢어발겨 져 있었다. 크게 뜨인 눈이 당시의 공포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에지오가 유수프를 지나쳐 걸어가더니 여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눈을 감겨주었다. 유수프는 씁쓸한 얼굴로 여인의 얼굴에 얹어진 에지오의 손 마디마디를 보고 있었다.

 “암살자를 후원하던 상인의 딸이네. 결혼식을 앞두고 납치되었지.”

 에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옷은 신부의 옷이군. 에지오의 말에 유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차갑게 식은 신부의 몸에 입혀진 망가진 예복이 서럽고 처연해 보였다.

 “신랑은 이미 반쯤 미쳐서 이런 짓을 한 자들을 잡겠다고 나섰다네. 원래대로라면 지금 신혼의 달콤함을 즐기고 있었어야 할 사람인데…. 무모한 짓을 할지도 몰라서 지부의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지.”

 “지금은 어디에 있나?”

 “수도교의 근처에 있을 걸세. 이 일로 타격을 입은 상인은 암살단에의 후원을 끊었고.”

 별수 없는 일이지만. 유수프의 말을 들으며 에지오가 대답했다.

 “내 나이쯤 되면 세상의 사악함을 모두 보게 된 기분이 든다네.”

 담담한 목소리였다. 유수프는 에지오의 눈을 건너다보았다. 강렬하게 빛나는 호박색의 눈. 전설로 회자되는 숱한 일들을 넘겨오며 강인해진 노장의 눈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시간, 경험을 얻어오며 굳건해진 눈. 유수프는 에지오의 눈을 볼 때마다 그 눈이 자신을 빨아들이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저 황금빛이 자신의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생각. 자신이 다른 곳을 볼 수 없게 만든다는 생각. 에지오는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런 것을 보고나니…. 사람의 악이란 매번 더 나쁜 쪽으로 나아가는 것 같군.”

 유수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러니까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나?”

 유수프의 대답에 에지오가 조용히 유수프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마주침. 유수프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맞는 말일세. 우리의 신조는 그렇기에 존재하지. 적어도 우리는 좋은 쪽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이런 일을 벌인 자들을 잡아보세. 말을 던지며 에지오가 폐가를 나섰다. 유수프는 조용히 에지오의 뒤를 따랐다. 다음으로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꽤 힘든 일이 되겠지. 앞서는 멘토의 잿빛 등을 바라보며 유수프는 상념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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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죽여 버리겠어!”

 신랑을 찾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대낮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의 한복판에서 저러고 있는데 아직 경비병이 달려오지 않았다는 것이 더 용할 지경이었다.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결혼 예복이 여기저기 더러워지고 구겨져 있었다. 남자의 눈이 형형한 살의로 빛났다. 한눈에 봐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손에 들린 무딘 흉기가 계속해서 공중을 갈랐다.

 “숨어 있는 거 다 알아! 나와! 나오란 말이야!”

 갈라지는 목소리가 쨍하고 울렸다. 유수프가 고개를 저었다. 이젠 아예 미쳐버렸군. 작게 혀를 차며 유수프는 에지오를 돌아봤다. 어쩌겠나, 멘토? 경비병들이 오기 전에 제압하는 게 낫겠군. 에지오가 끄덕했다. 신호를 받은 암살자 하나가 빠르게 대로를 가로지르며 남자의 뒤로 접근했다. 흥분한 남자가 암살자를 발견하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유수프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 나왔다.

 “네놈들 때문이야!”

 살기등등한 기세와는 다르게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검은 어설펐다. 몇 번 남자의 검을 피해낸 암살자가 남자의 명치를 가격했다. 남자가 들고 있던 검이 떨어지며 육중한 금속의 소리가 울렸다. 멀리서 경비병들이 뒤늦게 달려오고 있었다. 암살자를 잡아! 자욱한 연기와 함께 연막탄 몇 개가 펑 소리를 내며 터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소란스러운 비명.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발소리.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들이 남자를 끌고 간 곳은 멀지 않은 골목의 한구석이었다. 주변의 로마니들이 다가와 그들의 기척을 가려주었다.

 “네놈들이.”

 남자가 여전히 씩씩거렸지만 기세가 한 풀 꺾여있었다. 유수프가 으쓱하며 에지오의 팔을 가볍게 쳤다. 저래서는 설득은커녕 말 한마디도 못 붙이겠네만. 에지오는 그저 조용히 앞으로 나서며 자신에게 맡기라는 동작을 취했다. 유수프는 아직도 팔을 휘젓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우선 좀 진정하게. 그렇게 눈에 띄게 굴다간 그런 짓을 한 사람들을 잡기도 전에 자네가 먼저 잡혀 들어갈 테니.”

 신랑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악문 잇새에서 알 수 없는 신음이 쏟아졌다. 입술 이곳저곳은 이미 뜯어져 피를 쏟고 있었다. 유수프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소중한 것을 영원히 잃고만 사람의 언어였다.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저 한숨으로, 비명으로, 탄식으로 흘러나오는 말들.

 “나는 그녀를 잃었어.”

 떨리는 동공을 에지오에게 고정하며 젊은 남자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잃었어. 그녀를 잃었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아. 에지오가 천천히 답했다. 알고 있네.

 “당신들이 뭘 알아?”

 분노에 찬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을 죽이는 법만 아는 암살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안다고? 유수프가 탁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짚었다. 역시나,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긴 글렀구만. 에지오의 낮은 목소리가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아주 잘 알고 있네. 나도 그랬으니까.”

 천천히 유수프의 고개가 에지오에게로 돌아갔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긴 멘토의 과거는, 보통 말해지는 그의 업적이나 행적-그가 이탈리아에서 해왔던 모든 일들-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알 길이 없기는 했다. 기껏해야 그가 17살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제외한 가족을 잃었다는 것 정도. 유수프는 처음엔 에지오가 가족을 잃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지오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그녀는 내 품 안에서 죽었다네.”

 에지오가 담담하게 말했고 남자가 굳었다. 에지오는 딱 한마디를 덧붙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지. 자네의 신부가 그러했듯이. 진정 유감일세.”

 남자가 에지오의 말을 곱씹듯 내뱉었다. 그렇게 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어. 맞아. 그렇게 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어. 이내 남자가 숨통에서부터 올라오는 오열을 쏟아냈다. 그녀는, 그녀는.

 “나는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진정으로, 나의 모든 것을 바쳐도 좋을 만큼. 에지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알고 있네. 내가 그러했듯이, 자네도 그러했으리란 것을. 유수프는 더 이상 남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수그리고 앉은 멘토를 보고 있었다. 잠시나마 과거에 잠식되어 그 때를 헤매는 듯 가라앉은 황금색의 눈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가 모든 것을 바쳐도 좋을 만큼 사랑했다고 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저도 모르게 유수프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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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동안 지부는 분주했다. 비잔티움 세력의 첩자들을 잡아냄에 따라 일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수프 또한 그의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빴으나 짬이 나서 몸을 쉬게 하는 순간순간마다 그 날이 떠오르곤 했다. 침잠된 에지오의 눈과 자신은 알 수 없는 빛바랜 과거의 조각.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하는 여인의 일이. 어떤 사람이었을지, 그와 같은 눈을 한 강인한 여인이었을지, 혹은 그를 보듬어 안는 다정한 여인이었을지. 이미 과거의 일임을 알았음에도 유수프는 그 모든 것들이 괜스레 궁금했다. 그때 이후로 유수프뿐만 아니라 에지오 또한 본인의 일-레반트의 스승이 남긴 자취를 추적하는 일-로 바빴으므로 에지오의 얼굴을 보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생각이 점점 커지며 뿌리를 내렸다. 유수프는 이름 모를 여인이 부러웠다. 그 황금빛 눈을 온전히 가질 수 있었던 사람. 멘토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둔 사람.

 그와 동시에 죽은 신부의 예복이 마음속을 어지러이 떠돌았다. 에지오의 품에서 죽은 그녀가 에지오의 신부였다면. 때로는 정갈하게 신랑의 예복을 갖춰 입은 에지오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의 예식이니 여기의 것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하지만 유수프는 일전의 협정 때 외에는 주로 이스탄불에만 머물렀으므로 이탈리아에서의 혼인이 정확히 어떤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에지오의 모습은 늘 콘스탄티노플의 예복을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가끔은 신랑의 예복이 아닌 신부의 예복이 떠오르기도 했다. 유수프는 피식하며 그것이 굉장히 우스꽝스러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무의식적으로 에지오의 신부 예복을 떠올리던 날에 유수프는 입을 꽉 다물었다. 요란할 정도로 화려하고 눈이 부실 정도로 다채로운 색조의 옷들을 갖춰 입었음에도, 특유의 분위기에서 나오는 진중한 무채색을 간직한 모습. 되려 그의 무채색이 다른 색조들을 압도하며 담담히 하얀 여백을 남겨놓고야 마는 모습. 비록 상상이었을 뿐이었음에도 품이 넓은 옷자락이 조용히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착란처럼 들려왔다. 장신구가 걸린 하얀 목덜미가 아른거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소란스러운 잔상들이 가슴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유수프의 상념을 깨뜨린 것은 정찰에서 돌아온 노비스였다. 다급하게 들어온 노비스는 유수프에게 말을 전했다. 하기아 소피아입니다. 놈들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멘토는?”

 “먼저 출발하시겠다며 그곳에서 보자고 하셨습니다.”

 끝까지 들러붙는 생각들을 도리질로 떨쳐내며 유수프는 호탕하게 양손을 맞댔다. 부딪힌 손바닥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럼 나도 늦을 수야 없지.

 이리저리 미로처럼 가로놓인 집라인과 골목을 타고 도착한 하기아 소피아에서 잿빛 그림자가 유수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지오에게 말을 걸기 전에 유수프는 다시 한 번 에지오의 모습 위에 저도 모르게 예복을 덧그렸다가 지워냈다. 한 번쯤 입은 걸 보면 좋기야 하겠지만. 저의 실없는 생각에 자조하며 유수프는 에지오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렸다.

 “그래, 멘토. 무엇을 잡은 건가?”

 “이곳에서 놈들의 접선이 있을 거라고 소식통이 전해왔네.”

 여기 머무른 그 짧은 시간 동안 벌써 소식통을 만들었나? 유수프가 짐짓 놀란 반응을 보였다. 역시 우습게 볼 사람이 아니었다. 과연 멘토라니까. 추켜세우며 어깨를 치는 동작에 에지오는 난감하다는 듯 웃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에지오가 몸을 긴장시키며 손짓을 했다. 저기군.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비쩍 마른 남자가 비잔티움 병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유수프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 망할 놈. 저 자식을 알고 있지.”

 “어떻게?”

 “내가 말했잖나. 죽은 신부가 암살단을 후원하던 상인의 딸이었다고. 그 상인하고 약간의 친분 정도는 있었네.”

 저 작자는 그 상인의 양자야. 괘씸한 놈. 마음을 담아 키운 녀석이 주인의 심장을 물었군. 유수프가 험악하게 말했고 에지오도 눈가를 찌푸렸다. 입가의 상처를 가볍게 매만지며 에지오가 말을 이었다.

 “전에도 말했네만, 이럴 때만큼은 인간에 대해 회의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네.”

 그 순간 유수프의 눈에 에지오는 몹시 지쳐 보였다.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에지오의 눈이 다시 강렬하게 빛났다. 언제나 유수프를 이끌고 사로잡고 마는 그 눈이었다. 유수프가 씩 웃었다.

 “그럼, 멘토. 저 배은망덕한 놈을 작살을 내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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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의 반항은 제법 거셌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시작된 추적은 결국 북쪽의 항구까지 도달해서야 끝이 났다. 몰이 사냥을 하듯 몰아넣은 건물 사이의 구석에서 비쩍 마른 남자가 절규했다. 그녀는 원래 내 신부가 돼야 했었다고! 내가 먼저 배신당했는데 그걸 되갚아주지 않을 건 뭐지?

 “진부한 이야기 잘 들었네, 개자식아.”

 유수프는 과장되게 하품을 하는 동작을 취하고는 망설임 없이 남자의 목에 암살검을 꽂았다. 뒤늦게 따라온 에지오가 뒤에 서 있었다. 유수프는 자신에게 튄 피를 가볍게 닦아내고는 말했다. 이 남자는 그저 개인적인 복수를 하곤 겁이 나서 비잔티움에 의탁한 것이더군. 암살단의 정보를 넘겨 주겠다 운운하면서 말이야. 아쉽게도 우리의 원래 목적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네. 에지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손에 넣지 못한다고 사랑했던 이를 죽일 수 있는 비정함을 나는 잘 알 수가 없군.”

 “멘토가 이해할 필요도 없지. 원래 세상엔 온갖 사악함이 판치는 것 아니겠나.”

 유수프가 에지오를 바라보았다. 에지오는 평소보다도 가라앉아 있었다. 레반트 스승의 자취를 찾는 일 때문인지, 아니면 그 자신이 지금껏 걸어온 길들에 대한 피로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그 나이가 되도록 강인하게 지켜온 신념과 믿음만큼은 아까처럼 황금빛의 눈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유수프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 사람.”

 음? 하고 에지오가 의문을 담은 눈으로 바라봐왔다. 유수프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그 사람은 적어도 편안했을 테지.”

 마지막을 멘토가 지켜주었으니까. 그 사람이 그렇게 죽는 것이 부당했다고 해도, 멘토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 아닌가. 서툰 위로의 말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뒤늦게야 에지오가 어떤 이야기인지 간파하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자네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네만.”

 유수프가 뜨끔했다. 평소의 여유로움과 뻔뻔함이 자취를 감춰버리는 느낌이었다. 다른 때보다도 더 늙어 보이는 멘토의 입매가 서글프게 휘어졌다.

 “그녀는 내 신부는 아니었네. 하지만….”

 그것이 옳은 일이었지.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 했을 테니까. 짧은 말이 끝나자마자 유수프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 그렇지 않네.

 “장담하지, 멘토. 내 말을 그냥 흘려들어도 좋네만. 내가 진심이란 것만 알아주게.”

 유수프는 에지오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바다의 빛을 닮은 푸른색이 에지오의 모습을 담고서 마음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행복했을걸세.”

 에지오는 먼저 돌아가겠다며 등을 돌려 떠나갔다. 유수프는 다시 왁자지껄한 거리로 나왔다. 분명 며칠간 신경을 쏟은 일 하나가 해결되었으니 속이 시원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에지오의 가라앉은 황금색 눈이, 자신은 파악할 수 없는 깊이감을 담고 있는 그 눈이 유수프의 마음에 슬픈 잔상을 남겼다. 해가 지면서 등불을 올리고 좀 더 시끌시끌해지기 시작한 거리도 유수프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고향에 있음에도 자신이 먼 타지에 와있는 느낌이 들었다. 에지오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던 고독이 자신에게 옮겨온 기분이었다. 하릴없이 걸으려니 야시장의 상인들이 유수프에게 말을 걸어왔다. 맛있는 음식이 있어요. 댁에 새로운 융단을 까는 건 어떠신지? 소란스러운 외침들을 뒤로하고 나아가던 유수프의 눈에 확 들어와 박히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 있었다. 쓰게 웃으며, 유수프는 그것에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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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책상 앞에서 클라우디아에게 편지를 쓰고 있던 에지오가 천천히 몸을 펴고 일어났다. 잘은 몰라도 꽤 밤이 깊었을 것이다. 제법 오랫동안 앉아 있었으니까. 유수프와의 대화는 에지오에게 크리스티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가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사람. 언제고 그의 마음에 아픈 조각으로 자리할 사람. 내 사랑. 작게 속삭인 말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부딪히더니 사라져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허리를 쭉 펴 이곳저곳 뭉친 몸을 풀어주며 에지오는 지부의 지붕 위로 나섰다. 찬바람을 쐬면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지붕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갈라타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땅, 낯선 풍경. 하지만 다채로운 색을 지녀서, 이방인인 자신조차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도시. 어슴푸레한 도시의 외곽이 새벽의 검은 공기를 뚫고 푸른 그림자를 남기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 에지오는 조용히 돌아보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 멘토.”

 자리에 없기에 한참을 찾았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유수프가 다가와 앉았다. 장난기를 가득 담은 눈이 애정을 담고서 바라봐오는 것에 에지오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비록 아까의 대화가 불편하고 껄끄러운 주제이긴 했어도 유수프는 자신을 위해 그런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었다. 그녀는 행복했을걸세. 작고 사소하지만, 위안을 주는 말이었다. 유수프가 진심으로 한 말임을 알았기에 에지오는 다가오는 유수프를 막지 않았다. 시야가 갑자기 가로막힌 것은 그때였다.

 “유수프?”

 얇은 천이었다. 길가의 여성들이 쓰고 다니던 니캅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좀 더 얇은 것. 약하게나마 천으로 가려진 밖의 윤곽이 비쳤다. 유수프의 그림자가 보였다. 눈앞을 가리는 천을 걷어내자 반짝이는 장식들이 빛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어렴풋이 이것과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죽은 신부가 하고 있던 치장. 거기까지 떠올리곤 에지오가 말했다.

 “내게 어울릴 것 같진 않네만.”

 순간의 당혹을 떨쳐낸 에지오가 조용히 천을 벗어 내려했다. 그 손을 유수프가 붙잡더니 말해왔다. 아니, 멘토가 몰라서 그렇지 제법 어울린다네. 장난을 치는 것으로 생각해 그만두라고 말하려던 에지오의 눈이 유수프의 눈과 마주했다. 그 순간 에지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장난스러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시리도록 파란 눈이 에지오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유수프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굳어 있었다.

 “-이스탄불에선 첫날밤에 신부의 얼굴을 보는 것은 금기이지. 신랑은 신부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입을 맞춰야 한다네.”

 유수프가 천천히 천을 다시 씌웠고, 에지오의 얼굴이 가려졌다. 에지오가 으쓱했다. 그런 얘기는 또 처음 듣는군. 유수프가 작게 웃더니 말했다.

 “그렇겠지. 거짓말이니까.”

 역시나 장난이었나. 조금 전의 그 눈도. 에지오가 바람 빠지는 듯한 헛웃음을 한 번 내고는 유수프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어두운데다 천에 가려서 그의 얼굴이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유수프.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입가의 천에 뜨겁고 부드러운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천의 너머로 들숨과 날숨이 엮이고 합쳐지고 있었다. 지금 이것은. 소스라친 에지오의 어깨를 부드럽고 강하게 잡아오는 손이 느껴졌다. 곧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멘토.

 “나의 신부가 되어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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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어크 백업_[데즈숀데즈]그 후(After that time)(1)~(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