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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크 백업_[데즈숀데즈]그 후(After that time)(1)~(完)

20140819~20140823


※2014년에 개인공간에서 연재했던 데즈숀데즈 중단편입니다. 1편부터 완결까지의 분량을 한꺼번에 묶어서 올립니다. 총 7편 분량 63424자.


*어쌔신크리드 3 이후의 초대형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데즈숀인가 숀데즈인가.. 사실 글의 성향상 탑 바텀의 구분은 의미가 없는 듯 하여 데즈숀데즈로.
*기존에 두 사람이 연인에 가까운 사이였다는 가정 하에.
*본편의 설정과 약간 다른 부분이 존재합니다. 본편과 달리 윌리엄은 떠나지 않았으며 숀, 레베카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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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있었다.
창세기 1장 3절

*

무거울 정도의 침묵 앞에 숀은 홀로 놓여 있었다. 고요함이 만들어낸 공기가 숀의 피부를 찌르며 다가왔다. 손을 랩탑의 버튼 위에 올려놓은 채 숀은 지금까지 수십 번도 더해왔던 고민을 또다시 시작했다.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그가 견뎌야만 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때, 겨울의 대신전 이후로, 데스몬드가 떠난 이후로 자신이 보냈던 시간들과 몇 번이고 집어삼켜야만 했던 언어들. 숀은 자조했다. 나는, 너는, 우리들은 세계를 구해냈지. 설령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야. 그렇다면 말해봐. 지금 내가 하려는 짓은 우리가 이룩한 일에 비하면 아주 작은 보상 아니냐고?

그러나 숀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보상이라기보다 새로운 죄에 가까웠다. 굳이 고전적인 표현을 쓰자면 원죄라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엇이 원죄이지? 아담과 이브, 그들이 저지른 죄와 전지전능하게 손가락을 휘두르는 신의 존재조차 진실을 가리기 위해 그럴싸하게 포장된 전설일 뿐인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숀의 두 이성이 충돌했다. 정신 차려, 숀 헤이스팅스. 네가 하려는 짓이 뭔지를 생각하라고. 너는 지금 이성적이지 못해. 그러면 다른 쪽의 숀이 반박했다. 아니, 나는 충분히 생각했어. 견딜 만큼은 견뎌왔지. 그리고 내가 저지르는 일의 무게는 내가 겪어야 했던 일의 무게에 비한다면 결코 무겁지 않아.

얼굴에서 식은땀이 뚝 하고 떨어졌고 숀은 그것을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대충 닦아냈다. 랩탑의 실행 버튼은 그저 입력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지? 실제로 이게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하얀빛을 뿌리는 랩탑의 화면에 비치는 것이 있었다. 일종의 유전자 배열.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실험체 17호의 것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세계의 구세주. 그가 잃어야만 했던 남자. 붙잡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남자.
여태까지 데스몬드가 그들의 애니머스를 종횡무진 움직이며 남겨둔 온갖 흔적과 삶의 그림자들, 그리고 앱스테르고에서 새로 빼내온 정보들이 함께 나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진첩이었다. 다만 유전자들이 각각의 사진 대신 들어가 있을 뿐. 배열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숀은 심호흡을 했다.

데스몬드는 그가 떠나기 전까지 충분히 애니머스 안에 있었다. 충분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코너의 생을 더듬을 즈음에는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넘게 애니머스에서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대신전의 애니머스에 누워있는 그를 떠올리며 숀은 데스몬드가 코너를 동정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결국 알타이르와 에지오, 코너 덕에 데스몬드의 인생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었다는 듯이. 어쨌건 그는 애니머스에 출혈효과 직전까지 들어가 있었다. 그 점에 감사해야 할지. 덕분에 그의 유산은 충분했다.

숀에게 영감을 준 것은 평소 생각해보지도 못한 16호였다. 클레이 카츠마렉. 직접 만나볼 기회도 거의 없었던 데스몬드의 전임자. 이전에 데스몬드가 찾아낸 균열들을 통해 클레이가 남긴 메시지들을 접하긴 했지만, 숀에게 있어 클레이의 존재는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에 가까웠다. 그런 16호의 흔적, 데이터 유령의 이야기가 어느 날 잔뜩 침잠해 있던 숀에게 벼락같은 충격을 안겨주며 마음속에 불을 질렀다. 데이터 유령.

그의 이론은 어디까지나 가설이었다. 16호가 애니머스에 심어둔 자신의 데이터 조각으로 자기 자신의 분신을 만들 수 있었다면 데스몬드는 왜 할 수 없겠는가? 적어도 숀은 제 스스로 자부하기에 아주 똑똑한 남자였고, 여차 하면 일을 도와줄 레베카도 있었다. 물론 그녀에겐 자신의 목적을 숨겨야 했다. 자신이 하려는 일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말리려 들었을 테니까. 레베카와 빌. 두 사람에게도 죄책감이 불쑥 솟았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이 일을 위해 숀은 애니머스 시스템을 자신의 랩탑에 백업해야만 했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데스몬드의 데이터 기억들을 답지 않은 인내심으로 끌어모아야만 했다. 아주 작은 조각일지라도.

숀의 얼굴은 비웃듯 일그러졌으나 기분은 울기 직전이 되어 있었다. 정말 감상적이야. 삼류 신파 드라마나 연극도 이렇게 감상적이진 않을걸. 생각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프랑켄슈타인은 사실 그 괴물의 이름이 아니야. 그걸 만든 박사의 이름이었지. 그런데 왜 다들 괴물을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불렀을까?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의 결과물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하는가?

숀은 다시 갈림길에 서서 생각했다. 수백 번, 수천 번을 해온 생각들. 그가 더는 느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

그들이 ‘그런’ 사이가 된 것은 데스몬드가 코마에서 막 깨어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몇 번 높은 언성이 오가고, 루시의 이야기가 나오고, 붙잡힌 멱살과 주먹이 뒤엉킨 후의, 아주 충동적인 일이었다. 사고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처음 일이 끝났을 때 둘 다 그 자리에 드러누워 할 말을 잃고 쓰디쓴 신음만 내뱉던 일을 기억한다. 데스몬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은 없었으나 숀은 마음속에서 제 자신에게 있는 대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지?
그러나 처음이 어려웠을 뿐, 그 뒤로도 그들은 레베카와 빌이 보고 있지 않을 때 충동적으로 몸을 섞었고 어느새 ‘그런’ 것들은 그들의 일과에 자연스러운 행위로 녹아들고 말았다. 숀이 이죽거리면 데스몬드가 맞받아치고, 또다시 언성이 오가고, 그러다가 그렇게. 이제 와 후회해본들 늦은 일이었다.
어느 날 밤에 숀은 곁에 누운 데스몬드의 벗은 등을 보고 있었다. 조용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곧은 척추가 어디선가 보았던 짐승의 선을 연상케 했다. 그의 몸 곳곳에 오랜 뉴욕 생활 끝에 얻은 습관들과 흔적이 배어 있었다. 질 나쁜 손님과 몸싸움 중에 얻은 상처나 담배로 지져진 듯한 상흔들. 물론 이 천방지축이 그대로 당하고 있었을 리는 없고, 아마 이런 상처를 남긴 작자에게 몇 배로 되갚아주었을 것이다. 숀은 차가운 뉴욕 밤거리의 한구석에서 현란한 조명을 받으며 칵테일을 만드는 데스몬드를 상상하다가 자기들이 놓인 상황을 떠올렸다. 멸망을 앞두고 팔자가 좋구만 그래. 혀끝에 늘 달고 사는 비아냥이 비죽거렸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말해봤자 자신의 빈정만 상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눈앞의 남자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데스몬드는 내리 3일을 애니머스에 들어가 있다가 이제야 나온 참이었다. 출혈 효과를 따질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굳이 템플러와의 싸움이 아니어도 언젠간 애니머스가 그를 죽이고 말 것이다. 다들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 이야기였다. 아가리를 벌리고 앉은 멸망이라는 거인 앞에 개인의 생명이란 어찌나 부질없고 사소한 것인지.
이게 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고. 내가 지금 그를 깨우기라도 하면 그는 다시 애니머스에 들어갔을 때 피로해서 자기 일에 집중하지 못할 거고, 결론적으로는 우리 일이 늦어지고 말 테니까. 자신에게 되뇌면서도 숀은 이것이 손쉬운 자기 합리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솔직히 숀은 그를 좀 더 쉬게 하고 싶었다. 안온함의 요람 속에 내버려두고 좀 더 긴 평안을 얻도록.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음에도. 넌 나한테 감사한 줄 알아야 한다고, 배부른 소리나 해대는 망할 뺀질이. 숀은 새벽 내내 데스몬드의 등을 지켜보았다.

루시의 죽음 직후에 숀은 코마 상태로 애니머스에서 잠들어 있는 데스몬드의 곁을 홀로 지킨 적이 있었다. 오랜 밤샘 끝에 힘겨워하는 레베카를 반강제로 떠밀며 재우러 보낸 후의 일이었다. 빌은 언제나 그랬듯이 다른 지부와의 연락을 위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루시의 배신은 그들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고 숀은 신랄한 단어들을 작게 조잘대며 데스몬드의 곁을 지켰다.
어느 순간 숀은 애니머스의 전원을 내리고 싶다는 충동에 빠졌다. 그가 모든 것을 끝장내는 상상. 태양풍도, 지구도, 망할 암살단과 템플러도, 빌어먹을 데스몬드도, 멸망도. 자신의 손짓 앞에 무너져 내릴 것이었다. 단 한 번의 움직임이면 된다. 가볍기 짝이 없는 한 번의 까딱임이면. 숀은 데스몬드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몇 달 새에 심할 정도로 상해 푸석푸석해진 피부와 해쓱해진 윤곽.
손이 슬며시 올라갔다. 전원 코드 근처를 배회하던 손이 조용히 데스몬드의 눈 위로 얹어졌다. 마치 보면 안 되는 것에서 어린아이를 보호하려는 듯이, 숀의 손바닥이 데스몬드의 양 눈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거기서 뭘 보고 있지, 잘나신 구세주? 데스몬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네가 정말 해답을 가지고는 있는 거야? 물어봤자 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숀은 손을 치우는 대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약한 눈동자의 움직임과 관자놀이 근처에서 뛰는 맥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숀은 입을 다물었고 마음속으로 내뱉던 생각들도 사그라들었다. 그저 자신의 맥박과 데스몬드의 맥박이 겹치는 소리만이 쿵쿵 울리며 그의 손에 자욱을 남겼다. 기이한 새벽이었다.

어느 날 숀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앉아있는 데스몬드를 보았다. 레베카와 빌이 식료품을 구하러 나간 뒤, 숀이 긴 작업 끝에 짓눌러 오는 피로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커피를 더 진하게 내려 가져왔을 때였다. 데스몬드는 어느새 애니머스에서 빠져나와 있었고, 신전 한 귀퉁이의 넓고 딱딱한 암석 위에 걸터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처진 어깨가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터무니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숀은 데스몬드가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데스몬드의 앞에 비스듬히 서서 그때 그 새벽처럼 그의 눈 아래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 것은 여태까지 있었던 일이 그래 왔듯이 몹시 충동적인 일이었다. 데스몬드는 몸을 움찔했지만 숀의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감겨있는 데스몬드의 눈가는 젖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메마르고 건조한, 뜨거운 체온이 달라붙어왔다. 숀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며 속으로 혀를 찼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저 저번 새벽처럼 데스몬드의 눈 위를 덮은 손바닥을 통해 그의 느릿한 맥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만큼은 있는 대로 날이 선 비아냥이 나오지 않았다. 어서 애니머스로 돌아가라는 재촉도. 사위가 조용했다. 오직 냉정하게 뻗어있는 대신전의 차갑고 비현실적인 빛만이 둘을 감싸왔을 뿐이었다. 데스몬드의 고개가 숀의 손 쪽으로 좀 더 파고들었다. 숀은 택도 없는 어리광은 부릴 생각도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다만 그 자신도 조용히 눈을 감고서 잠시간의 고요 속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대신전의 그림자가 마치 그들에게 드리워진 해먹 같이 느껴졌다. 그들은 그 해먹 위에서 흘러가는 침묵을 삼키고 있었다.

며칠 후에 숀은 데스몬드를 잃었다.

겉으로 보기에 숀은 아무 문제가 없었고 한동안 굉장히 쾌활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 쾌활의 방식이 그 나름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레베카는 숀의 비아냥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견뎌내야 했다. 숀은 실제로도 자신이 꽤 붕붕 뜨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공했다. 멸망은 오지 않았다. 무엇이 부재하는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의 도취감이, 그를 추락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듯 비정상적인 밝음을 뿌려댔다. 뒤를 돌아보면 잊고 있던 것을 깨닫게 될 것임을 알았기에 숀은 되돌아보지 않았다. 그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스파이인 줄도 모르는 멍청한 작자가 몇 번 앱스테르고의 정보를 빼내어 온 뒤의 일이었다. 숀은 무감각하게 그들의 보안 네트워크에서 찾아낸 것들을 읽었고, 레베카가 분석해온 자료들 또한 넘겨받았다. 직감으로 레베카가 정보들을 걸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배려하기 위함인 듯했다. 그녀는 은근히 여린 구석이 있었으니까. 아마 빌에게도 똑같이 걸러낸 정보를 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멍청하게. 혼자 끌어안고 있어서 무슨 답이 나온다고. 그런 나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레베카는 기어코 실수를 했다. 실수라기보다는, 걸러낸다고 걸러낸 자료 중에 차마 걸러내지 못한 것이 섞여들어 온 것이었다.
데스몬드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 속에 제가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이 사진 속에서 고정된 채 숀을 습격해왔다. 시간 속에 무뎌지고 있던 날카로운 송곳니가 숀을 낚아챘다. 보통 사람들이 추억이라고 부르는 낯뜨겁고 어울리지도 않는 감상은 숀에겐 일종의 비웃음거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비웃음의 대상이 숀의 사지를 난도질했다. 사진 속의 그는 데스몬드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다만 사진을 찍는 데스몬드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다시는 얻지 못할 것들, 과거의 순간 속에 갇혀버린 것들.
숀은 사진이 전송되어온 랩탑을 내려쳤다. 손목이 나갈듯한 얼얼함이 치고 올라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또다시 내려쳤다. 쿵, 쿵. 무거운 소리가 치고 올라오는 것이 귓전인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울렸다.
솔직히 구세주고 뭐고 알 게 뭐란 말인가? 아니지.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야. 중요한 것은 데스몬드가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잘난 구세주의 이름으로,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의 아들이라도 된 것 마냥. 다른 점이라면 3일 만에 돌아오신 대단하신 신의 아들과는 달리 데스몬드는 부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골자였다.

숀, 헤이스팅스의, 데스몬드 마일즈는, 지금, 이곳에,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심지어 자신은 그때 단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 마, 데스몬드. 그러지 마. 그냥 내버려둬. 내뱉어지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을 어지러이 돌아다니며 불을 질렀다. 아마 그가 말했더라도 데스몬드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숀의 의견보다도, 그 자신의 생명보다도 자신이 배운 신념이 더 중요했던 남자니까. 아버지인 빌조차 말리지 못한 고집이었다. 망할 자식.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망할, 망할 자식. 그는 숀의 입장 따윈 고려하지도 않았다. 왜 그냥 세계가 망하도록 두면 안 되었던 거지? 어차피 바뀐 것도 하나 없는데? 숀은 데스몬드의 죽음 이후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 태양과 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구 주위를 돌았고 세상은 제가 만든 기만의 평화 속에 잠겨 있었다. 그가 데스몬드를 잃었어도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의 상실은 더는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자신이 애니머스의 전원을 내리고 싶은 충동에 빠졌을 때를 기억해냈다. 그때 숀은 차라리 모든 것이 그 순간에 끝났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가 얻었던 것을 빼앗기기 전의, 그 짧고 기이했던 새벽에.
데스몬드, 하고 작게 부르자 그의 이름이 조각 조각난 채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모래 덩어리를 씹는 기분이었다. 데스몬드. 이름은 더는 의미를 이루지 못하고 흩어져 내렸다. 곱씹을수록 버석버석하고 메마른 느낌만이 잠식해왔다.

데스몬드.
이름에는 더 이상 힘이 담겨있지 않았다.

*

숀은 몇 번이고 그가 자신과 함께한 짧은 시간동안 저에게 남겨놓은 흔적들을 반추했다. 데스몬드 마일즈, 저주받을 놈의 이름. 그를 이곳에 남겨놓고 제멋대로 떠나버린 작자의 이름. 최소한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라도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작별 인사. 숀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저 작별 인사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건가? 그 와중에도 머리 한쪽이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해 강한 경고를 보내왔지만 숀은 지난 불면의 밤들을 떠올렸다.

숀은 아직도 간혹 데스몬드의 꿈을 꾸었다. 구체적이지 않고 희뿌연 안갯속을 헤매는 기분을 주는 꿈이었다. 데스몬드에 관한 아주 단편적인 상념들이 무의식 속에서 솟아올라 만들어낸 성채들. 그 성 안을 부유하는 숀은 늘 수많은 문 앞에 도달했다. 각 문마다 하나씩의 기억들이 들어 있었다. 아주 사소한 것들. 대부분은 그들이 나눈 언쟁에 관한 것들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왜 싸웠는지, 그 싸움의 시작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끝은 언제나 이성을 잃고 함께 뒹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식하기도 전에 몸을 섞고, 뒤늦게 후회하고. 그래도 그때 숀은 데스몬드를 직접 만지고,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 기억들을 하나씩 넘기다 보면 자각하지 못한 푸른 새벽이 몰려왔고 개운하지 못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 뒤엔 늘 고통스러웠다. 그저 단 한 마디. 단 한 마디라도. 잘 가, 데스몬드. 망할 자식아. 그런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그 순간 여태까지 해왔던 망설임을 종식하듯 숀의 손가락이 실행 버튼을 누르고야 말았다. 스스로 만들어낸 죄책감의 덩어리가 숀의 마음속에 쿵 하는 울림을 전하며 떨어졌다. 울림이 만들어낸 파동이 이내 온몸을 떨게 했다.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자기 자신의 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숀이 마른 침을 삼키며 랩탑의 화면을 살폈다.

한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숀은 계속해서 혼자였다. 침묵, 그리고 또 침묵. 자신의 숨소리만이 귓가를 가득 메워왔다. 떨리던 손이 가라앉을 때까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한숨이 터졌다.

이론이 성공할 확률은 보장되어있지 않았으므로, 지금의 상황은 이해할만한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결국 실패였어. 이렇게 될 일이었지. 답지 않게 감상적으로 굴다니. 다 허사였다고. 숀은 랩탑을 닫기 위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숀의 어깨가 굳었다.

‘-숀?’

*


그와 대화하면서 숀은 자신의 거짓말이 이렇게 유창할 수 있는지를 처음 깨달았다. 데스몬드는, 정확히는 그의 데이터 유령은 어리둥절한 듯했고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내가 왜 애니머스 안에 들어와 있는 건데? 유노랑 태양풍은 어쩌고? 이래저래 대화해본 결과 아마도 그에게 남은 마지막 기억은 아마 최후에 애니머스에 접속했을 당시 같았다. 대신전의 문을 여는 열쇠를 찾기 위해, 라둔하게둔이 어디에 그 열쇠를 숨겼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들어갔을 때. 그는 제 죽음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고 심지어 자신이 육체가 없는-영혼도 존재하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이터 유령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아마도 평소처럼 애니머스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숀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넌 이전처럼 코마를 일으켰어. 대신전의 문을 연 직후에.”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솔직히 말할 수가 없었다. 데스몬드. 너는 죽었어. 문을 연 직후에, 빌어먹을 먼저 온 자들과의 조우 이후에. 영원히 가버렸다고. 그 말은 내뱉는 순간 숀 자신에게도 큰 상처를 입히게 될 말이었다. 숀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생각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네 정신은 거기서 헤매고 있고, 네 육신은 여기서 자고 있지.”

‘잠깐만.’

그럼 멸망이랑, 그런 건 다 어떻게 된 거야? 혼란에 빠진 목소리가 물어왔다. 숀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유보되었어. 네가 잠든 직후에.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태양풍은 오지 않았어. 지금은 마치 태풍 직전의 고요랄까. 그런 거지.

‘어떻게 된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설마하니 정말로 이게 먹힐 줄 몰랐다고. 입가에 지어지는 쓴웃음과 동시에 미적지근한 안정감이 밀려와 숀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아는 데스몬드의 목소리였다. 나는 지금 그와 대화를 하고 있어. 정확히는 내가 만든 그의 유령과. 이게 정상인가? 사실 정상이 아니어도 좋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투덜대며 걸어오는 말이 주는 평안이 너무 큰 탓이었다. 망할. 숀은 차오르는 욕설을 다시 삼켰다. 그가 랩탑 안에 기거하는 데이터 조각만 아니었어도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에게 하고 싶었던 온갖 말들을 쏟아내면서.

'지난번에 들어왔을 땐 그냥 일방적으로 너희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는데.'

루시의 죽음 직후 코마 상태에 빠졌을 때의 기억을 더듬는 모양이었다. 근데 그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더라. 끙끙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나. 있는 힘껏 모은다고 모은 데이터들이었지만 그의 생전 기억을 완벽하게 모두 복구하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숀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레베카랑 아버지는?’

“폭설.”

식료품을 구하러 갔다가 폭설 때문에 고립되었어. 당분간은 너랑 나만 있다는 뜻이지.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고 가슴 안의 죄책감이 크게 부풀었다. 잠시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들은 사실 숙소의 아래층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임시로 얻은 거처였다. 여기도 곧 옮겨갈 것이다. 숀은 잠시 랩탑에서 눈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적어도 눈이 많이 왔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밤의 도시는 하얀 장막 아래 잠들어 있었고, 겨울의 한기로 만들어진 하얀 연무(煙霧)가 일렁이며 지평선을 날름날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쳤다 다시 오기를 반복하는 눈송이들이 대기에 흔적을 남기며 점점이 흩어졌다. 창의 곳곳에 하얀 성에가 거미줄처럼 끼어있었다. 이윽고 그 성에들이 숀의 마음을 잠식하고 들어와 차가움을 남겼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봐. 얼음 같은 손이 심장을 쥐어오는 기분이었다. 숨이 멈췄다. 한기를 몰아낸 것은 다시금 들려온 목소리였다.

‘숀.’

식는 줄만 알았던 심장이 도로 느리게 뛰었다. 천천히 온기가 돌아왔다. 왜. 퉁명스러운 어조로 묻자 데스몬드가 대답했다. 이거 진짜 기분 이상한데. 여기 또다시 갇힐 줄은 몰랐어.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는 거지? 랩탑의 화면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이퀄라이저가 되어 튀어 오르는 중이었다. 숀은 저도 모르게 너 거기서 못 나와. 하고 말하려던 것을 억눌렀다.

“대책을 찾아봐야지. 우리의 구세주님께서 언제까지고 거기 갇혀 계셔야 쓰나.”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상념들이 숀의 머릿속을 헤집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슬금슬금 찾아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쓰다듬고 있던 숀에게 데스몬드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이봐, 숀.

“왜?”

‘지금이 언제야?’

“뭐? 밤이지.”

‘아니. 시간 말고. 날짜가 어떻게 되는 거냐고.’

“1월 중순쯤.”

‘그럼 내가 약 2주에서 3주간 코마였고, 지금도 그 상태라고?’

아니. 정확히는 아니지. 지금은 2013년 1월이 아니거든. 숀은 마음속으로만 시간을 곱씹었다. 데스몬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시기는 2012년의 12월이었다. 데스몬드가 지금의 시간대를 그렇게 믿는다고 해도 나쁠 것은 없었다.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마음껏 그래도 상관없었다. 거짓말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했다. 여기에 몇 가지가 더 얹어진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

‘…….’

데스몬드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긴, 제 기억을 다시 조합하는 데만도 바쁠 것이다. 랩탑에서 헐떡이는 것처럼 간헐적인 신음이 튀어나왔다. 숀은 그런 작은 신음에도 위안을 받는 저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다.

‘엄, 숀.’

이번엔 또 뭐야? 얼마든지 대답해 줄 요량으로 랩탑 앞에서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숀에게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해피 뉴 이어.’

“넌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대단도 하시지. 평소처럼 빈정대듯 말이 튀어 나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넌 네가 코마 상태에 있는데 그런 한가한 소리가 튀어나와? 데스몬드가 쭈뼛쭈뼛 말을 이었다. 뭐. 그건 그렇지만.

‘혼수상태로 있는 동안 그나마 있는 크리스마스도 신년도 죄다 넘겼다는 거잖아.’

숀은 잠시 앉아 생각했다. 하긴 데스몬드는 그런 여유를 즐길 짬조차 갖지 못했다. 9월에 처음 앱스테르고에 납치당했던 이후로, 가을의 원색이 겨울의 잿빛 무채색이 되고 흔들리던 낙엽이 찬 서리로 바뀔 때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왔으니까. 울컥하는 감정이 단전을 치고 올라왔다. 잇새로 결국 욕이 샜다. 데스몬드는 듣지 못한 모양인지 제 나름의 말을 조잘대느라 바빴다.

‘아버지랑 레베카한테도 대신 전해줘. 통신이 된다면 말이야.’

미간 사이를 주무르던 숀이 천천히 대답했다. 알겠다. 이 자식아. 잘도 그런 태평스런 소리를 하는구만.

‘하지만 멸망이 보류되었다며? 도대체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왜냐하면, 네가 멸망을 막았거든. 보류된 게 아니라 멈춰진 거야. 네 한 몸을 바쳐서. 숀은 자신이 지금 화를 내고 싶은 건지, 아니면 울고 싶은 건지, 혹은 둘 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생각 끝에 나온 단어는 결국 딱 한 마디, 남자의 이름이었다.

"데스몬드."

‘응?’

정적이 이어졌다. 데스몬드도 숀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흘러가는 침묵이 어색하기보다는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너도.”

뭐가? 하던 데스몬드가 이내 자신의 말-해피 뉴 이어-에 대한 대답이란 것을 알아차린듯 헛웃음 소리를 냈다. 너한테 그런 따뜻한 인사말을 돌려받을 줄은 몰랐는데.

“뭐 어때. 잘나신 구원자께서 원하신다면야.”

빈정거리는 말이 뒤를 이었다. 다시금 몇 초간의 침묵. 숀은 레베카와 빌이 종종 자신들의 일로 자리를 비우고 단둘만 남았을 때 두 사람이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오가는 높은 언성과 다툼, 주먹다짐. 그 끝에 이어지는 행위들. 맞닿았던 뜨거운 몸. 일의 끝에 찌꺼기처럼 남았던 후회들. 그리고 다시 반복되던 일들. 불현듯 데스몬드를 직접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꺼지기 직전의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다시 사그라졌다.

‘일단 나는 애니머스 안에서 답을 찾아볼게.’

“무슨 답?”

‘내가 어떻게 깨어날 수 있을지. 언제고 여기에 있을 수는 없잖아. 멸망은 그저 미뤄진 것뿐이고. 태풍 직전의 고요라며?’

전에도 애니머스 안을 돌아다니면서 단서를 찾고 동기화를 한 다음에 되돌아간 거니까. 뭐. 그땐 16호- 아니, 클레이가 도움을 줬지만. 지금은 그가 없으니 내가 알아서 찾아봐야지. 애니머스 섬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섬이라. 데스몬드는 지금 섬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기억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데이터들이 데스몬드의 경험을 토대로 재구축한 섬. 그렇다면 그는 지금 무인도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기분일까. 자신처럼.

어떻게든 멸망은 막아야지. 이어지는 데스몬드의 말을 듣고 숀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그 생각뿐이라니. 맨 처음 만났을 때 어영부영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차라리 기억을 좀 덜 모을 걸 그랬나. 멸망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 검지로 입술을 꾹꾹 눌러가며 숀이 작게 대답했다. 알았어, 수고하라고. 나는 여기서 대책을 찾을 테니까. 데스몬드가 대답했다. 그래.

‘잘 자.’

그 단순하고 평범한, 일상적이기 그지없는 인사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데스몬드는 모를 것이다. 더불어 날을 세우기 시작한 죄책감이 숀의 가슴을 사정없이 긁어 내렸다. 얼마 가지 못 할 거짓 위안. 숀은 지금 그 약한 실오라기의 끝을 붙잡고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창밖에서 다시 무시무시한 기세로 찬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2.


구름이 무거운 몸을 뒤틀며 하늘에 회색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파도는 약한 신음을 내며 발치에서 부서졌다. 물기를 머금은 대지가 저벅거렸다. 자연 상태에서는 나올 수 없는 차가운 직각으로 딱 떨어지는 거대한 검은빛 암석들이 곳곳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며 서 있었다. 낮게 깔리는 차가운 공기. 다가오는 감각들이 제법 현실적이었으나 모두 애니머스가 만들어낸 시스템 공간에 불과하겠지.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데스몬드는 섬의 가장자리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의 지평선을 내다보며 붙박여있었다. 짙은 안개가 하얀 장막을 두르며 그를 감싸 안았다. 흐르는 한기에 몸이 떨렸다. 데스몬드는 양손을 교차시키며 자신의 어깨와 팔을 문질렀다. 그러자 약간 따뜻해졌다. 기분이 묘했다. 애니머스에 들어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이번엔 유독 이상했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애니머스가 주는 감각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의심은 즉 비동기화, 즉 실패를 의미했다. 알테어의, 에지오의, 코너의 삶을 체험할 때마다 데스몬드는 자신의 모든 감각을 완벽하게 애니머스에 내어 맡겨야만 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수명을 깎아 먹고 자신의 정신을 침식하는 일이라고 해도. 문득 처음 루시가 그를 데려간 아지트에서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환영을 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출혈 효과. 머릿속을 헤집는 하얀 유령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서서 데스몬드는 자신이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기묘한 생각이었다. 3개월을 내리 이 안에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마치 자신이 애니머스를 포함한 모든 세상에서 동떨어져 분리된 기분이었다. 혼수상태여서 그런가? 내 영혼이 몸으로부터 멀어져 있어서? 그렇다기엔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데스몬드는 천천히 뒤를 돌아 자신이 걸어온 자욱을 살폈다. 섬은 작았고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전체를 다 돌아볼 수 있었다. 데스몬드는 하릴없이 몇 바퀴고 섬을 돌다가 이 자리에 우뚝 서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뭘 해야 좋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땐 클레이가 그를 이끌었다. 이곳에서 데스몬드는 에지오와 알테어의 마지막 삶을 경험했고 선악과의 힘을 통해 에지오를 만났었다. 그리고 자신이 농장을 떠나 뉴욕으로 향하는 과정을 답습했고 스스로를 되찾았다. 나는, 나는 데스몬드 마일즈다. 나는 암살자다. 몇 번이고 되뇌었던 기억들. 그리고 바로 이 자리가 클레이가 죽은 자리였다. 정확히는 그의 유령이 죽은 자리. 더욱 기묘해진 기분으로 데스몬드는 다시금 눈으로 섬 전체를 훑었다. 무언가가 다른데.

지난번처럼 선조의 기억을 더듬으면 될까 싶어서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돌아다녀 보았지만 다른 기억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 있으면 있을수록 자기 자신의 기억이 혼동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질서정연하게 분류되어있던 그의 파일들을 꺼내서 난잡하게 헤집고 섞어버리는 느낌. 한순간 두통이 몰려와 데스몬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숀. 숀은 해답을 찾았을까.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지금으로써는 오직 숀이 그의 구원자였다. 지루함, 갑갑함, 알 수 없는 울렁임. 이 모든 것들의 탈출구. 숀에게 연락이라도 해볼까. 하지만 어떻게? 이러면 안 되는데. 멸망이 보류되었다고 했다. 그들이 막아야 할 세상의 종말이. 그렇다면 어서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 무력감이 몰려왔다. 클레이. 넌 답을 알고 있어? 그렇다면 가르쳐줘.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이 답을 줄 리 만무했다. 데스몬드는 자신의 몸에도 신호를 보내려 애써보았다. 데스몬드 마일즈, 일어나. 네가 지금 혼수상태로 누워있을 때야? 그러나 이 역시 통하지 않았다. 따분함에 몸서리치던 데스몬드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누워있을 때였다.

“데스몬드.”

‘숀?’

상반신이 벌떡 일으켜졌다. 반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평소엔 그냥 얄밉기 그지없었던, 말끝에 빈정댐이 묻어나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주는 안도감이 너무 컸기에 데스몬드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방법은 찾아봤어? 여기선 도저히 해답이 안 보이는데.’

“보채지 마. 애니머스를 빠삭하게 아는 레베카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뭘 더 하겠어?”

절로 탄식이 나올 뻔했지만 데스몬드는 그것을 가까스로 삼킬 수 있었다. 그가 아쉬운 소리를 한다면 또다시 싸움이 시작되고 말 것 같아서였다. 그나마 얼굴을 보고 하는 싸움이라면 지금처럼 외롭진 않을 것이다. 외따로 떨어진 기분을 다시 느끼며 데스몬드는 문득 숀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를 직접 만지고 싶다는-멱살을 잡건 정말로 한 대 쳐버리건, 어떤 방식이건 간에- 충동이 갑자기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들은 자주 싸웠다. 루시의 일 이후로는 더더욱. 레베카와 빌까지도 화를 내며 말려야 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주먹도 꽤 여러 번 오갔다. 물론 맷집이나 힘, 싸움 기술은 데스몬드가 훨씬 앞섰지만 숀이 독한 마음으로 치는 악다구니는 데스몬드에게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숀 헤이스팅스는 데스몬드가 자신을 때린다고 그냥 맞고만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가 숀을 치고, 숀도 지지 않고 응수하고. 서로 기운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엎치락뒤치락 한 후에-

데스몬드가 갑작스레 온 충격에 몸을 굳혔다. 그 뒤에 무언가가 있었다. 줄곧 잊고 있었던 것. 제멋대로 어질러져 있던 기억의 퍼즐 중 하나가 자리를 맞추며 들어앉았고 떨어지는 당혹감에 데스몬드가 입을 뻐끔거렸다. 설마? 데스몬드가 한동안 말이 없자 숀이 물어왔다.

“뭔데? 너 거기서 뭐 해?”

어쩐지 불안감이 묻어나오는 물음이었다. 데스몬드는 순간 떠오른 이것을 숀에게 물어야 하는지 심한 갈등을 겪었다. 숀이 다그치듯 자신의 이름을 불러왔다. 데스몬드?

‘…숀?’

“왜?”

‘그… 뭐냐….’

한동안 뜸을 들이며 말을 고르던 데스몬드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을 던졌다.

'우리 잤었어?'

"뭔 멍청한 소리야?"

'그러니까, 그런 거 있잖아.'

그렇고 그런 거. 데스몬드의 말을 이해한 숀이 묘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데스몬드는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보나 마나 무슨 헛소리냐고, 머리가 맛이 가기라도 한 거냐고 비아냥댈 게 뻔한데. 내가 무슨 정신으로 이런 말을? 갑작스레 후회가 몰려왔고 손에 절로 식은땀이 찼다. 숀의 표정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영겁이나 다름없는 찰나가 지나가고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이야긴가 했더니, 뭘 새삼스러운 얘기를 하고 앉았어?”

데스몬드가 저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심 숀이 부정하고 타박해주길 바랐는데,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어쩌다가? 물론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데스몬드 자신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는 판에 숀이라고 잘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본능적이고 충동적이었고, 지극히 감정적인 것으로 이성이 배제된 관계였다. 데스몬드는 순간적으로 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숀이 다 보인다는 듯이 빈정댔다.

“이제 와서 뒤늦은 후회 따위를 할거면 지금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나 생각하지그래.”

어딘가 기분이 상한 듯도 했다. 데스몬드는 말하려 했다. 아니, 딱히 후회한다는 건 아닌데…. 그러나 나온 것은 떨떠름한 한마디였다.

‘그래야지.’

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지나간 일보다는 지금의 문제가 더 중요했다. 머리를 털면서 데스몬드가 다시 운을 떼었다.

‘그런데 여기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숀이 무슨 소리냐고 다시 특유의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물어왔다. 저걸 한 대 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복잡한 마음으로 데스몬드가 투덜댔다. 정말이야. 아무것도, 진짜 아무것도 없어. 밖에서 뭔가를 할 수는 없을까?

숀이 다시 말이 없었다. 갑갑함이 몰려왔다.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숀과의 일이었다. 대체 그때 왜 그랬을까. 그리고 지금은 왜 이러고 있을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한순간 섬에 와 부딪히던 파도가 강한 물결로 바뀌었다. 바람이 조금 더 거세진 것 같았다. 그저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숀과의 일을 까먹고 있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이곳의 무료함에 잠식되어 있었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까지 무심했던가?

“여기, 바깥에서 아마 너한테 단서가 될 만한 뭔가를 찾아볼 수는 있겠지.”

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제법 차분해진 목소리였다. 천천히 말을 고르던 숀이 덧붙였다. 하지만 결국엔 네가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알아내야 해. 데스몬드의 마음속에 약간의 짜증이 올라왔지만, 결국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애니머스가 자신을 붙잡고 있다면, 방법을 알아내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다만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내게 충분한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어.’

“무슨 시간?”

‘저번에 이곳에 왔을 때 애니머스는 나를 필요 없는 데이터라고 생각해서 삭제하려 했어. 그전까진 클레이가 시간을 벌어줬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다시금 클레이가 떠올랐다. 이 자리에서 자신을 현실로 떠밀고 사라진 남자. 자신의 전임자. 그가 있다면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막막했다.

‘그러니까 애니머스가 날 다시 발견하면, 언제든지 내 존재를 지우려 들 수 있어.’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 애니머스를 교란시키는 일 정도라면 나도 어느 정도는 자신 있으니까.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의 데이터를 쏟아 붓는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야.”

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게 통할까? 의문이 불쑥 들었지만, 지금으로썬 숀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왔다. 재인식되는 무력감. 섬의 파도는 다시 잔잔해졌다.

‘어서 돌아가고 싶어.’

저도 모르게 본심이 툭 튀어나왔다. 한동안 숀이 답이 없었다.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짧은 답이 돌아왔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의외의 답이었다. 가시 돋친 어투도 아니었다. 오히려 서글프게까지 들리는, 한숨 섞인 대답. 데스몬드는 순간 당황했다. 동시에 왠지 모르게 뭉클했다. 숀, 레베카, 빌. 모두가 보고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서, 그들과 포옹하고, 다시 멸망을 막는 여정을 시작해야하는데.

“그럼 나는 여기서 답을 찾아보지. 너는 거기서 ‘섬’을 더 살펴보라고.”

살펴볼 것도 없는데. 답을 하기도 전에 숀과의 통신이 끊겼다. 다시 그 자리에 털썩 드러누우며 데스몬드는 회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두꺼운 구름들이 지나간 잔상이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조용히 손을 뻗어 하늘을 가려보았지만 당연하게도 가려지지 않았다. 자신의 투박한 손가락 하나하나를 바라보다 데스몬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통신을 끊은 후 한동안 숀은 턱에 손을 댄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데스몬드는, 정확히는 그의 데이터 유령은 여전히 자신이 코마 상태에 있고 애니머스에 들어와 있다는 거짓말을 믿고 있었다. 다만 숀과 있었던 일들을 뒤늦게 기억해낸 것으로 보아 아직도 그가 모아두었던 기억들이 아귀를 맞추며 조립되는 중인 모양이었다. 미완성의 프랑켄슈타인.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이후로 숀을 무겁게 때려왔던 죄책감이 이제는 숀의 안에서 울림을 만들었다. 너는 결국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거야. 네가 그에게 한 짓을 좀 보라고. 그런데 너는 아직도 네가 제일 잘났다는 듯이 말하고 있잖아. 자기혐오가 몰려왔다. 몸서리가 쳐졌다. 갑자기 올라온 구토감에 헛구역질이 시작되었다. 입을 틀어막아 보아도 그것을 막을 길은 없었다.

어서 돌아가고 싶어. 데스몬드가 통신을 끊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말. 돌아가고 싶어. 그 말이 숀의 귓전을 때렸다.

숀은 그 순간 자신이 당황스러운 충동을 겪었었음을 자각했다. 다짜고짜 데스몬드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 사실 넌 못 돌아와, 데스몬드. 왜냐면 넌 ‘진짜’가 아니거든. 내가 만들어낸 데이터 유령에 불과해. 네가 말하는 클레이처럼. 너는 그냥 그림자일 뿐이야. 진짜 너는 오래전에 제멋대로 죽어버렸어. 엄청나게 이기적인 선택이었지. 아. 물론 덕분에 구원받은 인류에겐 아니겠지만. 하지만 그들은 네 존재를 알지도 못해. 그러니까 넌 멸망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 모진 말들이 마음속을 쾅쾅 때렸다. 숀은 그 말이 실은 데스몬드가 아니라 자신을 책망하기 위한 말임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말들. 결코 내뱉을 수 없었던 진실들이 입안을 돌아다니며 상처를 냈다. 입안이 썼다. 구토감은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숀은 여전히 데스몬드의 목소리에 위안을 얻고 있었다. 그 사실이 자신을 더 역겹게 느껴지게 했다. 위로를 구걸하고 평안을 동정하면서, 데스몬드를 자신이 만든 악몽에 가둬버렸다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숀?”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려 숀은 헛숨을 들이켰다. 뒤를 돌아보자 레베카가 서 있었다. 며칠 사이에 그녀도 제법 해쓱해진 얼굴이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물음이 이어졌다.

“어디 아픈 거야?”

“별거 아냐.”

숀은 그녀의 말을 냉정하게 쳐냈다. 그냥 나가. 네 일이나 해. 나를 내버려둬. 앞으론 노크 좀 하고. 그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곱지 못한 어투가 되어버렸다. 레베카는 한동안 숀을 쳐다보더니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아마 아직도 방문 앞에 서 있을지 모른다. 숀은 조용히 랩탑을 닫은 뒤 그것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이 안에 아직도 그가 있다.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고 믿는 그가,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그가.

그날 밤에 숀은 외로운 무인도에 홀로 서 있는 데스몬드의 꿈을 꾸었다.



3.


서늘한 그늘을 느끼며 데스몬드는 가만히 누워 흘러가는 상념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기분은 최악이었다. 역하고 비릿한 무언가가 목의 어딘가에 걸려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크게 한숨을 들이켰지만 짓눌러오는 고요도,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침묵을 무기로 행사하고 있는 잿빛의 섬도 그대로였다. 제기랄, 숀. 데스몬드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런 진척이 없었던 지 며칠째, 데스몬드의 인내심은 결국 한계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런 데스몬드의 짜증을 곧이곧대로 받아줄 숀이 아니었다. 결국엔 또다시 언성이 높아졌고, 서로에게 이어지는 가시 돋친 비난과 던지듯이 꽂아댄 비수 같은 언어들이 둘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을 즈음에 숀이 결국 연결을 끊어버렸다. 대답 없는 공허한 메아리를 향해 참아온 분노를 목이 쉬도록 외쳐대던 데스몬드는 찾아온 정적과 허탈함에 몸서리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선이 끝나는 곳에 닿아있던 검은 파도가 데스몬드의 감정에 따라 들끓듯 온몸을 뒤틀어댔다. 데스몬드는 외로움의 끄트머리에 앉아있었다.

와중에도 그가 잊고 있었던 많은 기억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었다가 다시 그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되고는 했다. 코너의 기억을 따라가기 위해 대신전을 찾았던 최근의 기억들은 물론이고 아주 어릴 적, ‘농장’ 시절의 일들도 불현듯 떠올랐다가 사라져 가곤 했다. 지난번 코마 상태에서 애니머스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때의 자신은 자기 자신을 되찾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이곳에서 남아있는 스스로의 잔재마저 잃고 있었다.

어쩌다 가끔 지난번 섬에 왔을 때처럼 문이 열렸다. 처음 문이 열렸을 때 데스몬드는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드디어 애니머스에서 나갈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당황스러운 긴 공백들과 구석구석 숨어있다 그를 습격해오는 예전의 기억들이었다. 왠지 모를 괴리감 속을 허우적대며 이곳저곳을 들쑤셔도 자신의 옛 기억들만이 되돌아올 뿐, 여기서 나갈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데스몬드는 몇 번 클레이가 보고 싶었다. 클레이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해답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심지어는 수수께끼만 잔뜩 주고 떠나는 먼저 온 자들마저. 그들이 지금 상황에 충분한 답을 줄 수 있다면 데스몬드는 기꺼이 그들이 주는 미스테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원치 않을 땐 언제고 찾아와 그에게 사명이라는 짐을 지워놓던 자들이 지금은 아무 말 없이 잠잠하다는 것이 데스몬드는 원망스러웠다.

자신은 아직도 해답을 찾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갑갑한 신세이고, 이 비좁은 세계 밖에선 멸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움직임. 자신들의 은하계 중심에 있는 그 불타는 구가 만들어낸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비록 자신이 원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해도.

데스몬드는 이전에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원해본 적이 없었다. 웃기지도 않는 음모론과 영웅놀이는 자기들끼리 하라고 생각했던 시절 또한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데스몬드는 일종의 체념 끝에 서서 예정된 멸망을 막기 위해 홀로 분투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싸움을 도와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것은 오로지 데스몬드에게만 주어진 일이었다.

데스몬드가 멸망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숀은 이상할 정도로 비아냥거림이 늘었고 급기야는 화를 내기도 했다.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다 그것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왜 멸망이 화두로 떠오를 때마다 서로를 향한 모욕과 비난을 멈추지 못하게 되는지, 데스몬드는 의아했다. 그저 자신 못지않게 숀도 엄청나게 민감해져 있다는 것만을 느낄 수 있을 따름이었다.

요즘은 자신이 정말 살아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삭막한 안개로 둘러싸인 이 섬에서는 자신의 인간성을 검증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숨을 쉬고 먹고 떠들고 잠을 자는 자신의 육체가 그리웠다. 이곳에서 데스몬드는 제대로 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기껏해야 마치 기계장치의 전원이 꺼지듯이 갑작스럽게 기절하는 것에 가까운 잠을 잤고, 그나마 짧은 수면이 끝나고 나면 또다시 이곳에 홀로 던져져 있었다. 지긋지긋해. 차라리 숀이 되돌아와서 말을 걸어주길 바랐다. 다시 언성이 높아지고, 서로에게 상처만 남는 말을 쏟아낸다고 해도, 지금 데스몬드의 위안은 그런 숀과의 대화뿐이었다. 숀.

매번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숀, 못된 말을 쏟아내는 숀, 기어코 자신에게 부아가 치밀게 만들고 자기 자신도 몰랐던 잔인한 생각들을 끄집어내게 하는 숀, 그리고…. 어느 순간에 자신의 몸에 비슷한 온기로 맞대어 오던 숀. 조용한 밤의 시간들.

두 사람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행위에 열중하던 시기들이 천천히 한 조각씩 떠올랐다. 행위 그 자체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주로 모든 것이 끝난 후의 평화로운 시간에 대한 것이었다. 한바탕 크게 싸운 뒤, 자기들도 모르게 충동적인 행위를 벌이고 나면 둘은 싸울 때 꺼내들었던 그 어떤 비정하고 잔인한 말도 다시 꺼내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을 둘러싼 시간을 느끼며, 멸망이 코앞에 온 것조차 잊고 이 시간이 계속되리라 믿는 사람들처럼 곁에 누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는 했다. 어쩌다 가끔 가벼운 접촉이 있었다. 등을 맞대고 누운 숀의 팔꿈치가 자신의 팔꿈치에 닿는다거나, 자신의 손가락이 숀의 손을 스친다거나 하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행위 그 자체보다도, 그런 작은 움직임들이 커다란 위로이자 위안이었다. 데스몬드는 숀의 얼굴을 정확하게 떠올리려 애써보았다.

‘숀, 돌아와.’

작게 나온 한 마디에도 여전히 답은 없었다. 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잘못했어. 돌아와 봐. 여기에 날 혼자 두지 마.

작은 속삭임에 응답하듯이 갑작스레 눈앞에 문이 펼쳐졌다. 자신의 옛 기억을 더듬을 때면 으레 나타나던, 기이할 정도로 검고 탁한 암석과 푸른 빛의 장막으로 이루어진 문이었다. 데스몬드는 홀린 듯이 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러나 데스몬드가 막 들어서려는 찰나에 갑작스레 문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공기 중으로 흩어지면서. 벌어진 일에 데스몬드는 넋이 나갔다. 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다음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데스몬드는 얼어붙었다.

‘뭔가 후회하고 있나?’


*

참을 수 없이 밀려오는 두통을 느끼며 숀은 이마를 한 번 짚었다가 다시 손을 떨구었다. 데스몬드의 일, 자신의 랩탑 속에 그의 유령으로 남아있는 잔재에 대한 일이 잠시도 숀을 떠난 적이 없었다. 숀은 툭하면 과할 정도로 일에 몰두했고, 다 타버린 커피를 마셨고, 전 세계의 네트워크망을 돌아다니며 암살단의 존재를 알고 있는 방관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 열중하는 순간에도 데스몬드의 존재가 숀을 얽매고 있었다.

레베카는 말도 없이 일에만 몰두하는 숀을 걱정했다. 빌도 내색은 않았지만 때로 주의 깊은 눈으로 숀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했다. 빌의 그런 시선을 받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 숀은 때로 티가 나게 짜증스러운 동작으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 버리곤 했다. 자신의 목에 걸린 죄책감으로 만들어진 밧줄이 언제라도 자신을 강하게 죄어 올 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데스몬드와의 말다툼이 잦아졌고, 숀은 마음에도 없는 거친 소리들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마음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밑바닥에서부터 진득하게 달라붙어 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 숀을 뒤흔들었다. 때로는 그들이 싸우고 나면 말보다 육체적인 행동으로 화해하곤 했던 시절이 그리웠다. 그러나 그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었고, 숀은 스스로 만들어낸 죄책감과 싸워야만 했다.

창밖에선 또다시 눈이 오고 있었다. 세상을 묻어버릴 듯이 내리는 눈이. 숀은 그 눈이 자기 자신도 파묻어버리고 세상에서 지워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얀 여백에 홀로 남겨지는 상상을 했다. 자신이 만들어낸 잿빛 섬에 홀로 서 있는 데스몬드처럼.

떨리고 주저하는 손을 가까스로 다시 끌어올려 안경을 고쳐 쓰며 숀은 랩탑을 들여다보았다. 보조전원이 켜져 있었지만, 화면에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잠들어 있는 것 마냥. 숀은 잠시 자신의 곁에 누워 곤히 자고있는 남자를 떠올렸다가 금세 지워냈다.

“데스몬드?”

대답이 없었다. 이봐. 데스몬드? 몇 번의 부름에도 대답이 없자 불안감이 스멀스멀 침식해왔다. 여태까지 데스몬드는 숀이 부르면 쏜살같이 튀어나와 응답하곤 했다. 사람과의 대화가 고팠다는 듯이, 혼자 그곳에 있는 것이 너무나 외롭다는 듯이. 그것이 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그러나 자신이 데스몬드의 유령을 만들어낸 이후 처음으로, 데스몬드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숀은 재빨리 랩탑의 버튼들을 누르며 반응을 기다리고 탐색을 했다.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당장 나와 봐. 사람 애간장 태우지 말고.”

간절한 목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숀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그가 데스몬드를 잃어버리던 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며 그가 자신들을 물리치던 모습. 그 냉정해 보이는 뒷모습이. 그것이 숀이 마지막으로 본 살아있는 데스몬드였다. 아마 영원히 지워지지 않겠지. 할 수만 있었다면 숀은 그때 데스몬드의 멱살을 잡고 그 비정한 곳에서 끌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서글픈 울림이 뒤를 따랐고 숀은 지금 당장 대답 없는 랩탑 속의 데스몬드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한 번이면 족해.

나에게 너를 다시 잃게 하지 마. 데스몬드.

그때 기적처럼 데스몬드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숀의 정신은 긴장감을 버티다 못해 기절했을 것이다.

‘숀?’

울컥하는 마음이 치고 올라와 숀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참고 있었던 것인지 공기를 들이켜는 순간 산소가 부족했던 머리가 띵하고 울려왔다. 이가 악물렸으나 숀은 침착하려 애썼다. 랩탑 위에 얹어진 손이 아직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 묻고 싶었으나 여전히 소란스러운 마음 탓에 뒷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숀 대신에 데스몬드가 천천히 물었다.

‘어디 갔었어?’

“잘도 태연하게 말한다.”

또다시 날 선 말이 튀어나왔다.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네가 나를 떠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네가 여기 있어서, 너를 다시 잃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숀은 머리를 털며 물었다.

“너야말로 어디 갔었어? 대답이 없었잖아.”

네가 지금 나를 얼마나 놀라게 했는지 너도 직접 겪어봐야 한다고. 내가 겪은 상실감을 너는 겪어보지 않았다고. 차마 이어지지 못한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난 그냥.’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 데스몬드가 대답했다. 숀은 그때 데스몬드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조바심이 났다. 캐묻고 싶었지만, 그러면 데스몬드가 자신에게서 더욱 멀어지리란 것 또한 본능적으로 알았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은 데스몬드가 떠나지 않았고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큰 안도감을 주었다.

“다음부턴 제때 달려와서 대답해. 늦장 부리지 말고.”

‘알았어.’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늘상 오가던 의례적인 말이 오갔다. 해결책은 보여? 아니. 밍숭맹숭한 대화가 끝나자 데스몬드가 잘 자. 인사하고는 말이 없었다. 숀은 전원을 끄려다가, 그냥 놔두기로 했다. 이런다고 해서 옆에서 데스몬드의 숨소리나 말소리가 들릴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평소엔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송곳처럼 찔러오던 데스몬드의 존재가 지금의 숀에게는 너무나도 큰 안온감을 주었다. 숀은 눈을 감았다. 종종 꾸는 무인도에 홀로 선 데스몬드의 꿈이, 날이 갈수록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다.


*

데스몬드를 놀라게 한 목소리는 일종의 메아리였다.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았을 때, 데스몬드는 16호를 보았다. 정확히는 남겨진 그의 메아리 같은 것을.

그 잔향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전과 똑같은 행동, 자신과 나눴던 대화를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자, 이번엔 다른 잔향들이 펼쳐졌다.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한 10대 시절 짝사랑한 아이의 얼굴이나 처음 농장을 나왔을 때 차를 태워줬던 히피 여자애들, 바에서 일하던 시절 동료들은 물론이고 어머니, 아버지, 레베카와 숀까지도 보였다. 마치 일생의 파노라마 같아서 데스몬드는 자신이 주마등을 보고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그 많은 기억이 도대체 어디서 기어 나온 것인지.

때로는 자신을 이런 자리로 내몬 선조들의 모습이 스쳐 가기도 했다. 지금의 데스몬드는 오히려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일생에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하고 지금은 평안 속에 영면하고 있었다. 자신은 여기에 이렇게 걸려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있는데.

가장 최근에 대화를 나눈 것이 숀 뿐이어선지 무엇보다도 숀의 잔향이 가장 많이 등장했다. 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데스몬드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했다. 홀로그램으로 흐리게 나타나는 숀의 얼굴은 그의 기억 속에서 나온 얼굴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졌지만, 자신의 손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스치고 난 후에야 후회가 되었다. 잔상 속의 숀은 여전히 짜증날 정도로 미운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오, 네가 최초의 채식주의자 암살자가 될 건가? 그런 거야, 데스몬드?

‘젠장. 시끄러워, 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데스몬드는 이것이 환상이 아닌 진짜이길 바랐다. 실제로 그들을 느낄 수 있기를, 얼싸안고 소리를 지르고 대화하고 함께 부딪힐 수 있기를. 외로움이 강해질 무렵에 잔향이 점점 잦아들다 사라졌다.

그것들이 끝남과 동시에 데스몬드의 기억에서 빠져있던 부분들도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일종의 플래시백인 모양이었다. 기억들이 잠들어 있는 문과 함께, 자신의 지워진 부분을 채워줄 무언가가 애니머스에 의해 작동한 것 같았다. 그래도 최소한, 문 속의 퍼즐들을 맞추는 것보단 이쪽이 더 인간적이네. 자조하며 정신을 차린 데스몬드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여전히 뭔가 중요한 것들이 빠져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가장 중요한 부분들은 마치 그 부분의 프레임만 먹칠을 한 것처럼 새까맸다. 어차피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된다면 서서히 다 떠오를 부분들이겠지만, 밀려오는 불길한 기분에 데스몬드는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정말 중요한 게 있는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부분이 닥쳐온 멸망보다도 중요하다고, 그의 본능이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무엇도 멸망보단 중요할 수 없어. 스스로에게 되뇌어봐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새로운 잔상이 다시금 나타났다. 이번엔 비교적 선명한 것이었다.

‘앱스테르고 보안 프로토콜, 앱스테르고 엔터테인먼트 프로젝트에 대해 브리핑합니다.’



4.



컵이 바닥을 때리며 둔탁하게 구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숀의 정신이 되돌아왔다. 흐려지는 눈의 초점이 느껴져 숀은 강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맞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레베카가 보였다.

“괜찮아, 숀?”

“너야말로.”

딱딱하게 반문하며 숀은 떨어진 컵을 주워들었다. 컵의 밑바닥에 잔뜩 달라붙은 커피 찌꺼기가 보였다. 다시 레베카를 건너다보자, 그녀 역시 사정은 자신과 다르지 않은 듯 자판 위에 올려둔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표정없이 휴대폰-추적의 위험이 언제나 있었기 때문에 항상 편의점에서 팔곤 하는 일회용 휴대폰이었다-을 들여다보는 빌도 말을 하지 않을 뿐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작은 상파울루 팀의 소식이었다. 자신들 외에 다른 암살자 팀이 앱스테르고에 의해 격리된 채 생존하고 있다는 정보. 사실인지 혹은 함정인지를 따질 겨를도 없이 오사카와 상파울루를 비롯해 빌의 팀까지 모든 팀이 사태 파악에 착수했다. 암살단이 괴멸한 작금의 상황에서는 한 팀의 인원이라도 소중했다. 비록 거기서 살아남은 것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덕분에 빌은 물론이고 레베카와 숀도 며칠째 밤을 새워가며 조사에 착수하고 있었다. 숀이 뿌려놓은 네트워크 미끼 중 몇 개에 앱스테르고가 걸려들었고, 그럴 때마다 정보의 신빙성은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졌다가를 반복했다. 숀은 벌써 며칠째 데스몬드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데스몬드. 숀은 때로 자신의 네트워크와, 해킹한 앱스테르고의 네트워크에서 ‘진짜’ 데스몬드의 정보들과 마주쳤다. 2012년 12월 21일 00시 07분에 죽은 실험체 17호에 대한 정보.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자신이 죽은 데스몬드에 대한 파일들을 뒤적이는 와중에도, 자신의 방에는 데이터 유령인 데스몬드가 살아 있었다. 그것은 때로는 큰 위안이었고 때로는 큰 죄악감이었다. 숀은 다만 자신이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자신은 그저 잔해에 불과하다는 것을 데스몬드가 최대한 늦게 알아채길 바랐다.

숀은 그다지 낙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관적인 전망과 현실적인 시야는 그의 인생에서 나름의 도움이 되어왔다. 숀은 이번에도 희망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데스몬드는 언젠간 알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당장은. 그가 멸망도 다른 것도 모두 잊고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뻐하길 바랐다. 물론 바라는 게 그것뿐이라면 위선일 것이다. 숀은 사실 더욱 많은 것을 원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숀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숀은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왜 데스몬드가 살아있건 죽어있건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지가 궁금했다. 내가 이렇게 감상적인 인간이었나? 숀이 기억하는 자기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다음 순간 빌의 휴대폰에서 울린 신호음이 숀의 상념을 갈랐다.

레베카와 숀의 고개가 동시에 빌에게 가서 멈추었다. 빌 또한 잔뜩 긴장한 눈으로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양쪽 눈이 움푹 꺼져 보일 정도로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숀은 갑작스레 빌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데스몬드를 잃었을 때, 그 또한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평소에 빌은 데스몬드가 선조들의 기억을 더듬는 것들을, 그리하여 멸망을 막기 위한 단서들을 모으는 것을 암살단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데스몬드가 지독한 피로 속에서 헤매거나 과중한 부담감에 무너지기 직전인 상황에서도 빌의 태도는 강경했다.

하지만 숀은 데스몬드의 마지막 순간에 그가 한 사람의 아버지로 돌아오는 것을, 아들을 잃는 것을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부모가 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지 마라, 데스몬드. 그것은 아마도 빌의 말하지 못한 모든 진심이 함축된 한마디였을 것이다. 고집 센 아들을 말리는 것은 무리였지만. 빌이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레베카와 숀을 마주 봐왔다. 입을 먼저 연 것은 레베카였다.

“뭐죠?”

“아무래도 어디선가 일이 잘못된 모양이네.”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할 것 같아. 빌이 말하는 것과 동시에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레베카의 시선이 빌의 등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숀은 목소리를 낮추고 레베카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말하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 편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속삭여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나조차도 걱정하는 와중에 말이지. 레베카의 대답이 들려왔다.

“걱정하고 있지 않아.”

“걱정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그렇게 사람을 사지로 내보내는 것 마냥 쳐다봐?”

“……정말로, 빌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면서 레베카가 또렷한 눈으로 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딘가 정곡을 찔린 기분에 숀이 움찔했다. 뭐가 불만이냐며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야 할지, 아니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받아쳐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로 숀 역시 레베카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구해낸 사람이라는 것을, 어쩌면 자신보다 훨씬 강인한 여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숀은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레베카가 피곤하다는 듯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힘들면 쉬고 와도 상관없어. 어차피 빌이 돌아올 때까지는 우린 여기 묶여있을 테니까.”

“아니, 나는……. 그래, 쉬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너도 좀 쉬어, 숀.”

마음을 바꿨는지 순순하게 몸을 굽혀 깔고 앉은 담요를 집어 든 뒤 방으로 향하던 레베카가 어딘가에 걸린 듯 멈추어 섰다.

“왜 그래?”

“그러고 보니…. 전의 앱스테르고 프로젝트 있잖아.”

“어떤 거? 프로젝트가 좀 많았어야지.”

“내부 스파이를 썼던 거.”

아, 자기가 스파이인줄도 몰랐던 그 작자 파일? 숀이 과장스레 눈썹을 치켜세웠고 레베카가 그래도 우리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야. 하고 속삭였다. 여전히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짤막하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그 파일의 첫 번째 백업본을 네 랩탑에도 전송해뒀어.”

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백업본들의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거기 담겨 있던 내용은 자신은 물론이고 레베카와 빌 또한 몹시 고통스럽게 했다. 아마도 빌이 지금 움직이는 원동력은 순전히 그 파일 때문이리라고, 숀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국 자신이 벌인 일도 따지고 보면 그 파일이 주는 고통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패스워드는 늘 우리가 쓰던 거야. 다음에 다른 백업본들을 더 보낼게. 그리고….”

레베카가 말끝을 흐렸다. 주저하는 눈치였다.

“또 뭔데?”

“네가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해.”

숀이 허탈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알아.”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지. 혼자인 건 데스몬드야. 숀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꾸는 무인도의 데스몬드에 관한 꿈, 자신이 어느 날 밤 미친 듯이 벌인 모든 일에 대하여 레베카에게 고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조용히 되삼켰다. 이건 나 홀로 짊어져야 할 문제야. 정정해야겠군. 이 문제 앞에서 나는 혼자가 맞아.

“숀. 네가 늘 힘써주고 있다는 거, 우리에게 큰 전력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도 알아줘.”

“이것 참. 당장 촛불을 들고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서로에게 잘못한 시간을 떠올려야 한다는 생각 안 들어?”

“그렇게만 받아들이지 말고.”

나는 언제든 여기 있을게. 레베카가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숀은 정적 속에서 조각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나도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게.”

레베카에게 닿지 못한 대답이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숀은 자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

자신의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의문의 홀로그램을 파헤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팀에서 늘 쓰던 비밀번호. 루시가 죽은 뒤 단 한 번 바뀌었던 암호였다. 그러나 데이터들이 마치 자신의 기억들처럼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데다 여기저기 빠진 부분들이 있어 많은 정보를 얻기는 어려웠다. 데스몬드는 혼란 속에서 눈앞에 펼쳐졌다 다시 사라지고는 하는 파일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처음 접하는 것들이었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나온 정보들인 모양이었다. 몇몇 데이터들은 아예 손상된 것처럼 보였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자료가 모이면 확실해질까? 자신의 기억이 그랬던 것처럼. 데스몬드는 주의 깊게 분산된 데이터들을 살폈다. 숀에게 이게 무엇이냐고 물어야 할까?

다음 순간 머릿속에서 아니. 하는 대답이 들려와 데스몬드는 당황했다. 이 데이터들에 대해선 숀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나는 이걸 숀에게 숨겨야 할 이유가 없어. 내 눈앞에 더 이상 열려 있는 문이 아닌 내가 아는 사람들의 환영이 나타나는 것도, 이렇게 처음 접하는 데이터들이 떠돌아다니는 것도 모두. 오히려 숀에게 말하면 숀이 새로운 단서를, 애니머스에서 나갈 수 있는 단서를 구해줄지도 몰라. 그러나 자신을 향한 설득 끝에도 숀에게 이것들을 말해야 한다는 확신은 내려지지 않았다.

숀은 왜 이걸 진작 내게 알려주지 않은 거지? 아니, 어쩌면 숀은 이게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내가 혼수상태인 이상 이 정보들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숀이 나도 모르게 애니머스에 삽입한 정보들일 수도 있어. 나에게 힌트를 주려고. 데스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미리 말을 했겠지. 숀에 대한 의구심이 끝없이 들었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어찌 되었건 숀이 이 데이터의 환영들을 대화의 화제로 삼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데스몬드는 거의 직감으로 느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숀이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었다. 데스몬드는 지난번 느꼈던 위화감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이 잊고 있는 것. 어쩌면 멸망보다 훨씬 중요한 것. 그것에 대한 실마리가 잡힐 듯 말듯 검은 기억의 수면 위에서 떠돌았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낚아챌 수 있을 것 같은데.

“데스몬드?”

순간적으로 데스몬드는 놀라서 자지러질 뻔했다. 숀이었다. 레베카와의 교신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더니, 자신의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모양이었다. 헛숨을 들이 삼키며 데스몬드가 말을 골랐다.

‘숀.’

“기억들은 좀 더 찾아봤어?”

오늘의 숀은 어쩐지 평소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늘상 곤두선 말들로 데스몬드를 찔러오던 것과는 달리, 오늘은 말투부터 낮고 부드러웠다. 무언가를 감추거나 회피하기 위한, 꾸며낸 부드러움이 아니었다. 숀의 목소리는 진정으로 데스몬드를 염려하고 있었다. 데스몬드는 저도 모르게 왈칵하고 눈물을 쏟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대답했다.

‘크게 달라진 건 없어. 여전히 빠진 부분들도 많고….’

“별수 없지. 코마 상태가 그만큼 길었으니까. 단숨에 복구하려고 하면 애니머스가 과부하를 일으킬 거야.”

그래도 최소한 네가 전에 말한 것처럼 너를 바이러스로 인지하고 있진 않은 것 같은데. 숀이 말해왔다.

‘맞아. 그렇게 인지하기는커녕 아무 반응도 없어서 문제지.’

“그래도 레베카와 이야기를 나눠봤어. 날씨가 풀리고 길이 열리면 다시 돌아와서 애니머스를 정비해주겠다는데. 눈이 녹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데스몬드는 또다시 숀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느꼈다. 자기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아까처럼, 일종의 직감이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을 굳이 숀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기껏 오랜만에 풀린 분위기를 다시 망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이야기한대도 숀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데스몬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눈은 이제 지겨워.’

“어차피 네가 서 있는 곳엔 안 오잖아?”

‘내가 내리게 할 수는 있다고.’

그건 사실이었다. 애니머스 섬의 기후를 제 맘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데스몬드가 알게 된 것은 지루함과 무료함에 견디다 못해 차라리 폭풍이라도 휘몰아치기를 바랐던 날이었다. 그 날 섬에 휘몰아치던 거센 폭풍우를 기억한다. 자신의 감정에 따라 이리저리 사납게 널을 뛰던 비바람도. 그 뒤로 데스몬드는 종종, 숀이 있는 바깥처럼 눈이 내리는 섬을 상상했다.

그러면 정말로 섬은 겨울이 몰려온 듯 삭은 북풍을 몰고 오는 눈구름 밑에 파묻히곤 했다. 그래도 떨어지는 결정이 진짜 눈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단지 하얀 송이들이 연달아 떨어지다, 바닥에 닿으면 말끔하게 사라지는 식이었다. 그래도 데스몬드는 일부러 눈을 내리게 하고는 바깥을, 눈을 맞으며 서 있는 숀에 대해 상상했다. 그 눈 때문에 갇혀서 오지 못하는 아버지와 레베카에 대해서도. 그러다 그것마저 지겨워지면 언제나 그랬듯이 섬의 검은 그늘 자리에 가만히 앉아 오지 않을 것들을 기다리거나, 작게 열린 문틈으로 자신의 옛 기억들을 탐사하는 게 고작이었다.

“거기서 보는 눈은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

‘맞아. 나도 기왕이면 나가서 직접 맞고 싶다고.’

너랑 같이 말이야, 숀. 갑자기 모든 의심과 의문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적어도 자신은 지금 숀과 연결되어 있었다. 숀이 무엇을 감추고 있건,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 중요한 것이 있건, 당장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머리 한편에서는 아니라고,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어서 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 윽박지르라고 경각의 종을 울려대고 있었지만.

“여기서 직접 맞아보면 그런 소리 안 나올걸.”

‘그래도.’

다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한바탕 싸우고 난 뒤 무겁게 짓눌러오곤 했던 답답한 것이 아닌, 안정감에서 나올 수 있는 잔잔하고 부드러운 고요였다. 이런 걸 느껴보는 게 얼마 만인지. 새삼 감회에 젖어 데스몬드는 지평선을 멀리 바라보았다. 이어지던 정적을 깬 것은 숀과 연결된 통신의 너머로 강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익숙한 목소리였다.

“-숀!”

데스몬드의 몸이 굳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걸까? 갑자기 숀과의 통신이 불안정해졌다.

‘숀? 무슨 일이야? 숀?’

“잠깐 여기 있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남아있던 통신 회선마저 나가버렸다. 데스몬드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미처 내뱉지 못한 말을 입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숀, 방금 그건.

‘레베카 목소리 아니야?’

산산 조각나 깨진 평화에 데스몬드는 몸을 떨었다. 역시 숀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폭설 때문에 다른 도시에 갇혀있다는 레베카의 목소리. 그것이 왜, 지금 여기서?

‘뭘 감추고 있는 거야, 숀?’

감정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데스몬드는 주저앉았다. 양팔로 다리를 감싸고 머리를 파묻었지만, 몸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잘못되었어. 뭔지는 몰라도, 아주 중요한 것이. 아주 크게.

‘돌아와, 숀.’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제대로 자각함과 동시에 이대로 영원히 홀로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데스몬드를 엄습했다. 다시금 섬에는 눈이 내렸다. 숀. 제발 나를 혼자 두지 마. 숀. 그러나 그 어떤 메아리도 숀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통신의 전원을 급하게 내리며 숀이 식은땀을 훔쳤다. 데스몬드가 알아챘을까? 이글거리는 분노가 치고 올라와 하마터면 문을 열자마자 보인 레베카에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의 충동을 막은 것은 자신이 화를 내기도 전에 급하게 쏟아진 레베카의 말이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빌의 말이 맞았어. 상파울루 팀. 일이 틀어졌어.”

“정확하게,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봐, 레베카.”

“빌이 나가자마자 되돌아왔어. 안 좋은 소식이야. 팀의 비밀 접견자 한 명이 오늘 아침에 살해당했어.”



5.



“여기 설탕은 없어?”

“되는대로 마셔. 어린애도 아니고.”

“난 그저 있는지만 물어봤을 뿐이라고.”

“네가 애니머스에 처박혀 누워 있을 동안 우리는 몸소 발로 뛰며 식료품을 구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잖아. 그냥 닥치고 감사나 하는 게 어때?”

“두 사람 다 적당히 해요. 이런 때마저 그래야겠어요?”

“그래. 계속 그러면 둘 다 벽 보고 서 있게 한 다음에, 서로 사과하고 포옹할 때까지 벌을 세워둘 테니까.”

“레베카!”

몬테리지오니에서는 식재료를 구하는 일이 여의치가 않아서 모두가 늘 가벼운 인스턴트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은 더 이상 안 되겠다며 루시와 레베카가 무리해서 시내로 나갔다. 돌아왔을 때는 두 사람 모두 한 아름씩 짐을 들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시내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사온 테이크 아웃 메뉴였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며칠 간 줄곧 통조림이나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건조식품으로 끼니를 해결했던 그들에게는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덕택에 팀의 분위기는 다소 누그러져 있었고, 데스몬드와 숀의 투닥거림도 평소와는 다르게 금방 멈추었다. 빌라 지하 한 편에 추위를 쫓기 위해 가져다놓은 전기스토브가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간헐적인 침묵을 사이를 채웠을 뿐이었다. 데스몬드는 홀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스토브가 아니라 모닥불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랬다면 소풍 나온 컵스카우트들이 캠프파이어를 벌려놓은 모양새였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손에 들린 커피 한 잔이 따뜻했다.

데스몬드는 주변의 사람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레베카, 숀, 그리고…. 루시. 미안해, 루시.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잠깐. 뭐가 그러려던 게 아니라던 거야? 다음 순간 시야가 일그러졌다. 그제야 데스몬드는 자각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난 지금 그저 내 지난 기억 중 일부를 보고 있을 뿐인 거야. 요즘 들어 내내 그래 온 것처럼.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공간이 이리저리 뒤틀렸다. 가만히 앉아 스토브의 불빛을 쬐던 레베카가 사라졌다. 등을 보이고 서 있었던 숀도. 마지막으로 자기 몫의 커피잔을 들고 있던 루시마저 사라지자 검은 공허가 찾아들었다. 데스몬드는 숨을 골랐다.

플래시백이 찾아올때마다 데스몬드는 목이 갈라지도록 소리쳤다. 제발, 여기에 날 홀로 남겨두지 마. 이 외딴 섬에 나만 두고 가버리지 마. 그것이 의미 없는 외침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숀과 나눈 마지막 대화 이후로 플래시백은 더 강렬하게, 더 자주 데스몬드를 찾아왔다. 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숀.

데스몬드는 암흑의 미로 속에서 이리저리 떠돌았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견딜 수 없는 추위뿐이었다. 다음 순간 불이 켜지듯 공간이 환해졌고, 데스몬드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루시. 그 작은 몸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흘러나올 수 있는 것인지. 흐르는 것이 아직도 붉었다. 눈은 감기지 않은 채 데스몬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은 마치 데스몬드를 책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어쩌면, 자신에게 사과하고 싶어 하는 눈일지도 모른다고 데스몬드는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자기 합리화일 것이다. 자신이 루시에게 미안해하는 것 못지않게 루시도 미안해 할 것이라고, 자신들을 배신한 일을, 비딕의 손을 잡은 일을. 그렇게 생각하면 최소한 데스몬드 자신의 죄책감은 덜어지니까. 비겁한 일이야. 옆에서 클레이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정확히는 자신의 무의식이 클레이를 흉내 낸 소리다.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고 싶을 때 데스몬드는 클레이의 목소리를 빌려 자기 자신에게 여태까지의 일을 거칠게 따지고는 했다. 아주 저열한 짓이지. 나는 나를 혼내는 몫까지도 남에게 미루고 있어. 알고 있었지만 한번 그런 습관을 들이고 나서는 그것을 고치는 일도 여간 쉽지 않았다.

다시 내려다보자 루시는 사라져있었다. 오직 그녀가 남긴 혈흔의 흔적만이 시야에 잔상처럼 남았다. 그 피는 루시만의 피가 아니었다. 클레이의 피,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앱스테르고에 돌진했을 이름 모를 암살자들의 피, 또 다른 누군가의 피였다. 내 자리는 희생으로 이루어진 거야. 데스몬드는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도 나를 바쳐야 해.”

“아니, 그러지 마.”

갑자기 들려온 단호한 목소리가 데스몬드의 상념을 끊어냈다.

“그러지 마.”

“숀?”

뒤를 돌아보고 목소리의 주인공과 시선을 맞추고 나서 데스몬드는 당황했다. 숀은 여태껏 본 얼굴 중 가장 냉정하고 엄숙한 얼굴로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지 마. 덕분에 데스몬드는 숀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잊고 멍하니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뭘 그러지 말라는 거야?”

“너는 그렇게 해선 안 되는 거였어.”

“무엇을?”

“데스몬드.”

동상처럼 굳게 버티고 선 숀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가지마.”


*


빌의 표정이 심각했다. 그것은 레베카도, 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들려오는 소식들이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상파울루의 접견자가 살해당한 것은 그제 아침의 일이었다. 팀원 모두가 비상사태임을 직감하고 사태 파악에 매달렸다. 혹시 은신처가 노출됐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생각하여, 모든 팀이 본거지를 옮기느라 분주했다. 오직 다시 내린 폭설 덕에 발이 묶인 빌의 팀만이 기존의 은신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나날이었다.

숀은 또다시 며칠 동안 데스몬드를 보지 못했다. 마음 한편이 어쩌면 이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최소한 데스몬드에게 무언가를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고 자조했다.
데스몬드와 이야기했던 마지막 순간에, 데스몬드는 레베카의 목소리를 들었다. 숀 자신이 다른 도시에 갇혀있어 올 수 없다고 얘기했던. 분명 그는 그 점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아마 아직도 자신을 보러오지 않는 숀에 대해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문제에서 이렇게 도망쳐봤자 답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숀 역시 닥쳐온 일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뒤늦은 후회임을 알고 있었으나 그 말을 다시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숀 헤이스팅스. 너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

“숀?”

빌의 목소리가 들려와 숀은 고개를 들었다. 며칠 새 더욱 초췌해진 빌이 오랜 고민으로 깊어진 눈동자를 하고서는 숀을 부르고 있었다.

“우리 은신처에 대한 보안을 확신할 수 있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100% 확신해드릴 순 없어요. 접견자가 잡혔을 때 무슨 정보를 불었을지 모르니까요. 그나마 그가 자세한 정보를 몰랐으니 다행이었다는 점만 말씀드리죠.”

“이건 중요한 문제일세.”

“저도 압니다, 빌.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요. 녀석들은 아직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딨는지는 모릅니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진작 여기로 달려와 우리를 벌집으로 만들었을걸요. 아마 안다고 해도 대략적인 지역뿐일 거에요.”

“그것조차도 큰 위험이야.”

“그건 맞는 말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짐을 들고 눈 사이를 몸으로 헤쳐나가 탈출하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곁에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레베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폭설 경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숀의 보안망 말고도 제 보안망도 같이 동작하고 있으니 최소한 며칠간은 숨어있을 수 있을 거예요. 오히려 이곳이 외진 곳이라 살았어요. 그들의 위성 네트워크도 폭설을 뚫고 우리를 들여다볼 순 없을 테니까요.”

“그녀 말이 맞아요, 빌. 아마 그들의 위성은 눈 때문에 백지나 다름없는 하얀 사진만을 잔뜩 전송하고 있을걸요.”

그러니까 조금만이라도 쉬어둬요. 하는 이야기는 무겁게 어깨를 떨구는 빌의 모습에 쏙 들어가고 말았다. 빌. 마지막으로 잔 게 언제에요? 식사는? 물어봤자 의미 없는 질문임을 알고 있었기에 구태여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들이 자세한 우리 위치를 잡아내기 전까진 안전할 겁니다. 이런 폭설에서는 GPS 장치도 제대로 기동 못 해요. 만약 우리가 어느 지역에 있는지 알아냈다고 쳐도, 그들이 섣불리 움직이기는 힘들 겁니다.”

이것 역시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죠. 숀이 말을 마치자마자 레베카 역시 한숨을 쉬었다.

“……다른 팀이 무사한지 확인해보겠네.”

빌이 여느때와 다름없이 일회용 휴대폰을 들고 나서자,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레베카와 숀은 마치 말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들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늘 그렇듯 레베카 쪽이었다.

“나는 내 쪽의 네트워크를 점검해볼게, 숀. 너는 남은 데이터베이스를 정리해줘.”

“분부대로.”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많지 않았다. 폭설은 앱스테르고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는 방어선의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구축하고 있던 네트워크의 연결마저 취약하게 만들었다. 연결은 퓨즈가 나가려는 것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상황에 불과했다. 빌의 휴대폰조차 수시로 먹통이 되고는 했으니, 그나마 신호가 잡히고 연결이 미약하게라도 되어 있는 순간에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나마도 불안정한 네트워크가 언제 또 나가버릴지 모른다. 숀은 일에 전념했다. 데스몬드에게 진실을 설명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먹물처럼 번져 나와 그를 검은 아가리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숀은 그것이 싫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데스몬드의 복사판에게 그가 아는 사실을 확인시켜줘야 한다는 것이. ‘데스몬드 마일즈는 이미 죽었다’고, 자기 자신에게도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는 말을 꺼내야 한다는 것이.


*

시야가 되돌아왔을 때 애니머스 섬은 온통 불길할 정도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지금 혼수상태인데, 그 상태에서도 또다시 잠들 수 있다니. 꿈속의 꿈. 예전에 스치듯이 본 헐리웃 영화가 생각날 정도였다. 우습지도 않다고 생각하며 데스몬드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섬은 여전히 붉었다. 눈앞의 하늘도, 대기를 가득 채운 구름의 무리도, 심지어 언제나 차갑게 대지위에 버티고 서 있던 기둥들마저도. 애니머스에 뭔가 큰 문제가 생긴 걸까? 순간적으로 두통이 몰려와 데스몬드는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잔상을 뒤적이고, 눈앞에 나타나는 과거의 환영들을 쫓다 보면 의식이 희미해지고는 했다. 얼마 전 앱스테르고의 브리핑 자료들-숀이 자신에게 감추고 싶었을 그것-을 본 뒤로는 더욱 그랬다. 진실에 가까워지면서 동시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묻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다. 다음 순간 애니머스 섬이 크게 들썩여 데스몬드 또한 소스라쳤다.

‘뭐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임은 알 수 있었다.

‘숀?’

예상대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순간 데스몬드는 사무치게 숀이 보고 싶었다. 루시도, 레베카도, 아버지도. 제 발로 뛰쳐나온 농장이 그리울 정도였다. 애니머스 섬이 천천히 하얀 빛깔로 모습을 바꾸어갔다.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비록 감각으로 느낄 수는 없었지만, 시야를 가득 채우는 하얀 입자들이 나풀거리고 반짝이며 쏟아져 내렸다. 숀이 있는 곳에도 눈이 오고 있다고 했다. 엄청나게 많이, 지겹도록. 그 눈 때문에 레베카와 아버지가 자신들이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고. 이제는 그 말이 거짓말임을 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데스몬드는 숀과 함께 눈을 맞고 싶었다.

같은 공간에 나란히 서서 눈을 맞는 사소한 일을 바라게 되리라곤 이전엔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이건 그렇게 대단한 소원이 아니야. 적어도 나는, 난 그 정도는 바라도 되는 거잖아. 나는 멸망을 막아냈는데.

‘나 자신을 희생해서.’

다음 순간 벼락같은 무엇인가가 몸을 꿰뚫어 데스몬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아무리 웅크려봐도 그 모든 아우성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자신이 던져놓고도 알 수 없는 말이, 맨몸으로, 생살로 드러내진 진실이 머리 안쪽을 직접 후벼들고 있었다.

‘앱스테르고 보안 프로토콜, 앱스테르고 엔터테인먼트 프로젝트에 대해 브리핑합니다.’

며칠 전, 혹은 그보다 오래전에 자신에게 처음 나타난 잔상의 음성이었다. 그 음성을 듣자마자 사위가 물을 맞은 듯 조용해졌다.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커진 하얀 눈송이들이 몸을 던지듯이 데스몬드에게로 떨어지고 있었다. 무엇 하나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던 것이, 온전하게 다가왔다.

‘기증자 17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합니다.’

재생되는 것은 생생한 영상이었다. 신전, 누워있는 자신과 수술 도구들, 식은 몸, 꺼진 눈, 영혼 없는 몸을 난도질하는 칼.

‘나는.’

몰려오는 것이 안도감인지 피로감인지, 아니면 절망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금 의식이 멀어졌다. 기억나는 것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터진 눈물 덕에 온몸이 축축했다는 것이다.



6.



“제기랄!”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등을 돌리고 보안을 점검하던 레베카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숀.”

“아무것도 아니야. 네트워크가 끊겼었어.”

“괜찮은 거야?”

“지금은 문제없어. 다시 연결됐으니까.”

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내리는 폭설, 연락이 없는 다른 지부들, 불안정한 통신, 지금 이 순간에도 위성으로 자신들이 숨은 곳을 찾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앱스테르고. 무엇 하나 도움이 되는 것이 없었다. 빌의 팀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소식은 숨어있던 또 다른 팀 하나가 습격당했다는 것이었다.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다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은 이 습격 자체가 앱스테르고가 흘린 거짓 정보일 수도 있었다. 직접적인 통신이 되지 않고 있다 보니, 계속해서 통신에 혼선이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더는 자신들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빌은 탈출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포위망은 점점 좁아져 오고 있었다. 극한 상황까지 내몰린 팀원들의 대화는 갈수록 적어졌다. 그 와중에도 숀은 계속해서 데스몬드에 대해 생각했다.

숀이 마지막으로 데스몬드에게 대화를 시도했을 때, 데스몬드는 말이 없었다. 숀은 프로그램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타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다시 점검했음에도 이전과 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데스몬드가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숀은 거의 애걸할 뻔했다. 제발 네가 거기 있다고 말해. 데스몬드. 네가 아직 가지 않았다고 말해. 마지막 남은 알량한 자존심이 입을 틀어막았기에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수 있었지만.

숀의 마음 한쪽은 데스몬드가 화를 내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레베카는 이곳에 없다고 한 거짓말이 들통 난 것을 생각한다면. 데스몬드는 그 거짓말에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마음 한쪽은 막무가내로 그가 자신에게 화낼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데스몬드가 신전에서 한 선택, 희생이라는 선택으로 인해서 자신이 받은 상처에 비한다면. 그러면 불쑥 제3의 자신이 튀어나와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어? 죽은 사람의 의식을 되살려 데려온 건 너야. 너는 그것에 책임이 있어.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그랬다. 지금 그의 곁에 있는 데스몬드는 자신의 책임이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데스몬드의 그림자. 작별 인사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남자를 대신할 존재. 처음에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숀에게 있어 그 존재는 진짜 데스몬드가 되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그의 기억이 곁에 있다는 것. 얼마나 우스운 꼴이지?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에 위로받고 그걸 진짜라고 생각하다니. 누가 보면 징그럽다고 욕하게 생겼군. 자기 자신을 학대하다시피 이어지던 숀의 상념은 레베카의 말에 의해 끊겼다.

“숀. 잠깐 여기 좀 봐줘.”

“뭐가 문제야?”

“그렇게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아.”

레베카가 내민 화면은 그녀와 자신이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는 보안망이었다. 그곳에 몇 차례의 공격 흔적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레베카가 작게 말했다.

“아직 뚫리지는 않았어. 하지만….”

“이대로라면 시간문제겠지.”

앱스테르고에게 넘쳐나는 것이 자본과 자원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레베카와 숀에게 맞먹는, 혹은 더 뛰어날지도 모르는-과연 있다면 말이지만- 해커를 섭외할만한 능력이 있었다. 자신들이 네트워크 어딘가에 남긴 아주 조그마한 흔적들을 찾아 역추적을 해낼 만한 자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 수많은 시도 중 하나에 불과했다. 메마른 입술을 느끼며 숀이 물었다.

“어느 정도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잘은 모르겠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 해야지.”

침묵이 이어졌다. 차가운 공기를 데우려 애쓰는 스토브의 둔탁한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숀은 조용히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하얀 입김이 그녀의 주변에서 일렁거렸다. 그녀도 꽤나 수척해져 있었다. 또다시 불쑥,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고해하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숀은 그 충동을 구기고 접어서 억지로 되 삼켰다.

“어떻게든 되겠지.”

뒤이은 숀의 말에 레베카는 답이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내부로 침잠한 듯 흐린 눈을 하고서는 여기저기 공격받은 흔적이 역력한 보안망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두르고 있던 담요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숀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려던 손을 가만히 거두고는 함께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한 시간이었다.


*

하얀 불길.

큼지막하게 펄럭이며 이리저리 흔들리던 불길은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날뛰었다. 이리저리 퍼져있던 기억의 잔재들을 장작 삼아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꽃은 여기저기 불똥을 일으키며 튀더니 어느 순간 재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재는 곧 눈이 되었다. 폭설. 시야를 가리며 폭풍처럼 몰아닥치는 것. 단숨에 세상을 질식시킬 기세로 내리는 결정들.

그 가운데에 데스몬드는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시시때때로 모습을 바꾸는 창백한 데이터 섬의 중심에서. 약간 어지러웠지만 견딜 수는 있었다. 한바탕 속을 뒤집고 지나간 온갖 감정의 파도는 마지막 남은 절박함마저 데리고 밀려 나갔다. 절박함. 돌이킬 수 없는 모든 일에 대한 절박함.

처음 솟아오른 감정은 자기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분노였다.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자신의 뇌수까지 태워버릴 정도로 격렬하던 분노는 이내 절망으로, 슬픔으로, 각종 색을 지닌 감정들로 모습을 바꾸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놀라울 정도의 평안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안도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데스몬드는 다시금 놀랐다. 여태까지 마음 한 켠을 괴롭히던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해방감이 가져다주는 안식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반쯤은 체념하고 있었던 일이었으므로. 아마도 처음 대신전에 들어가 몇 번이고 코너의 기억을 뒤지던 그때부터, 애니머스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에 미쳐버린 클레이의 심정을 천천히 이해하기 시작했던 그때부터. 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흘린 다른 사람들의 피를 죄처럼 이고 가기 시작했던 그때부터.

데스몬드는 천천히 자신이 알게 된 것,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을 곱씹었다. 자신이 남긴 유산을 뒤적이고 다니는 것은 때로는 부끄러움을, 때로는 분노를, 때로는 안도를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지금은 더 이상 2012년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은 2012년의 끝자락에 그 대신전에서 죽었다. 어찌 되었건 멸망은 막을 수 있었다. 이것은 데스몬드에게 있어서 크나큰 위로였다. 자신은 적어도 헛되이 사라지지 않았다. 알테어, 에지오, 코너가 그러했듯이 주어진 일을 완수해낸 것이다.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들 또한 헛되이 죽은 것이 아니었다.

‘클레이.’

때때로 자신에게 나타나곤 했던 데이터 유령이 떠올랐다. 데스몬드는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정신이 어떻게 여기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그에게서 얻었다. 아마 자신도 그때의 클레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애니머스에 남아있던 클레이는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진짜 클레이 카츠마렉이 아니야. 그는 자살했고 육신은 땅에 묻혔지. 나는 그가 아니야. 그가 여기에 숨겨둔 유령 같은 거지. 유령. 지금 데스몬드의 상태를 정의할 수 있는 좋은 단어였다. 유령. 여기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자.

‘어쨌든 네 죽음은 헛된 게 아니었어. 클레이.’

그 말은 클레이에게 하는 말이자 동시에 죽어버린 진짜 데스몬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데스몬드 마일즈. 나는, 아니, 너는 헛되이 죽은 게 아니었어.

‘네 죽음은 헛된 게 아니었어.’

떨어지는 생각이 유독 무거웠다. 데스몬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데이터 섬 안에 여전히 그가 만들어낸 하얀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데스몬드는 숀을 생각했다. 자신이라는 데이터 유령을 만들어낸 남자.

왜 그랬어, 숀?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마 물어봐도 그는 제대로 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숀은 한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마지막 대화에서 자신이 답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으리라. 데스몬드는 그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어떠한 감정이 되어 날뛰고 있던 와중이었으므로. 숀의 목소리에 응답하기에 자신은 너무나 무기력했다. 숀답지 않은 일종의 망설임이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울려 퍼지는 숀의 목소리에서 데스몬드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동시에 데스몬드는 숀에게 강한 연민을 느꼈다. 유령을 만들어낸 뒤 그 유령에게 너는 아직 살아있다고 설득하는 일은 실로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대답해줄걸. 숀. 나는 아직 여기 있어. 한 마디면 아마 그에겐 충분했을 텐데. 그러나 이제와서 생각해봤자 이미 지난 일이었다.

데스몬드는 몸의 긴장을 풀고 조용히 공간을 만들고 돌아다니는 상상을 했다. 자신이 데이터 유령임을 자각한 이후로 가능해진 일 중 하나였다. 자신이 구성된 전뇌 안을 돌아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애니머스 안에 들어가 조상들의 기억을 보던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기도 했다.

눈이 감기고 하얀 빛이 다시금 찾아왔다.  


*

충돌이 있었다.

그것은 레베카가 깔아둔 보안망 중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레베카와 숀은 밤새도록 자신들의 좌표 정보를 조작해가며 쓸모없는 더미 정보를 만들어냈고, 그것들을 풀어서 쫓아오는 자를 무력화 시키려했다. 그러나 추적자는 끈질겼다. 막아냈다 싶으면 다시 뚫고 들어왔고, 따돌렸다 싶으면 다시 추격해왔다. 바짝 마른입과 충혈된 눈으로 손을 떨며, 두 사람은 며칠을 내리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있었다. 잠시간의 휴식도 사치였다.

상대의, 혹은 상대들의 실력은 무시무시했다. 앱스테르고가 자신들이 가진 자원을 총동원한 결과였다. 숀의 입에서는 수십 번도 넘게 욕설이 쏟아졌고, 참을성 많은 레베카마저 막판에 가서는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마지막 좌표를 보낸 뒤 은신처 내의 모든 전력과 통신망을 내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 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던 빌은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갔다. 만약을 대비해 은신처 구석에 처박혀있던 구식 무전기를 손에 든 채로. 어떻게든 제대로 된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도록 빌은 돌아오지 않았다.  


*

몇 번의 흔들림과 몇 번의 충격.

데스몬드가 느낀 것은 우레와도 같은 요동침과 폭풍우 한가운데를 누비는 듯한 성난 파도였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데스몬드가 존재하는 데이터 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애니머스 안을 탐색하던 때처럼 여기저기 통신망을 돌아다니다가도 갑자기 길이 끊기거나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어느 순간에는 아예 갑작스러운 기절이 찾아오기도 했다. 정신을 차린 뒤 데스몬드는 사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 노력의 결과물 들 중 가장 크게 빛을 본 것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이제 은신처 내의 통신망이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그 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데스몬드는 하마터면 소리 내어 통곡할 뻔했다. 데스몬드는 제 생각보다 오래 홀로 남겨져 있었다. 은신처의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숀은 데스몬드를 만날 짬을 거의 내지 못했다. 레베카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저도 모르게 반가움에 소리를 칠 뻔했다. 어차피 외쳐봤자 데이터 섬에서의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고 그녀에겐 닿지 못했을 테지만. 숀의 거짓말로 보았을 때 레베카는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듯했다.

때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통신망 중 하나에 녹아들어 가 그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그러나 숀이 기겁할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은 원래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녹아들어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일은 데스몬드의 육신이 살아 숨 쉴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의 그는 그저 인식 기능만이 남은 프로그램에 불과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자신이 진짜 데스몬드가 아니기에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규정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데스몬드를 괴롭혔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은…. 맨 처음 데스몬드는 자신이 데이터 유령임을 힘들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찾아오는 플래시백, 데스몬드가 남긴 기억들이 몰려와 자신을 괴롭힐 때면 데스몬드는 클레이의 말을 이해했다. ‘내가 너랑 같이 나가는 거야. 네 육체를 잠시 빌려서.’ 클레이는 자기가 진짜 클레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진짜 클레이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육신을 가지고 살고 싶어 했다. 그와 비슷한 충동이 간헐적으로 마음속에서 날뛸 때마다 데스몬드는 여태껏 발휘했던 모든 자제력을 끌어모아 억눌러야만 했다.

레베카와 숀이 은신처를 보호하기 위한 싸움을 반복할 때마다 데스몬드 또한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으며 두 사람의 곁에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함께 겪으며 데스몬드는 함께 에지오와 코너의 기억을 찾아 이곳 저곳 이동하며 여행하던 일들을 떠올렸다. 최소한 자신은 그들의 곁에 있었다. 설령 이 기억들이 모두 주입된 것이며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일종의 자기 위로였다. 그리고 그 모든 싸움을 함께 지켜보며 깨달은 것은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빌의 연락이 끊겼을 때 데스몬드의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데스몬드는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보려 애썼다. 차라리 전에 빌이 납치되었을 때처럼,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찾으러 갈 수만 있다면 좋았으리라는 가정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숀과 레베카는 그들의 일만으로도 잔뜩 지쳐있었다. 자신은 나약했다. 절망감과 무력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몰려들었다. 모두에게 너무나 긴 하룻밤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데스몬드는 데이터 섬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하얀 불꽃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상상이 계속되었다.  


*

빌에게서 연락이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레베카와 숀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두 사람은  퀭한 눈으로 눈부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설이 남겨놓고 간 눈 더미는 태양 빛을 반사하며 하얗게 잔상을 뿌려댔다.

둘은 조심스럽게 전력을 복구했다. 빌에게서의 연락이 닿을까 싶어서였다.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는 기분을 느끼며 전쟁을 벌이는 사이에 팀의 정신력은 바닥이 난 상황이었다. 숀은 창에서 눈을 돌려 바로 옆에 서 있던 레베카에게 시선을 던졌다.

“독 안에 든 쥐 신세군.”

숀의 중얼거림에 레베카가 고개를 돌려 숀을 마주 봐왔다. 멍해 보이는 눈. 레베카가 천천히 도리질을 치며 말했다.

“이것보다 더한 상황도 얼마든지 있었잖아.”

“아. 루이지애나에서? 아니면 빈에서의 일을 말하는 건가?”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를 앱스테르고에서 구해냈을 때도 그랬지.”

“이런. 한 방 먹었는걸, 마담.”

기운 없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레베카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더한 상황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지금 그들은 그때보다 더 수가 적었고, 도움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스승이 그때 죽지만 않았어도.”

“빌어 처먹을 다니엘 크로스.”

다시금 정적이 이어졌다. 최소한 예전의 일들을 화제로 꺼내는 것은 기분 전환에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더 심각했던 일들, 수습하기 어려웠던 사건 하나씩이 나올 때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의 상황을 잊을 수 있었다. 팀을 이끌어주던 사람은 생사를 알 수 없고, 바깥에서는 언제 어디서 템플러들이 자신들을 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 멸망을 막은 후에도 그들의 일상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레베카가 담담히 말했다.

“가끔 뭐가 바뀌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왜. 적어도 망할 태양풍이 우리를 죄다 쓸어버리는 건 막았잖아.”

그 일로 우리는 데스몬드를 잃었지만 말이야. 뒷말은 꺼내지 않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랩탑 안의 데스몬드가 떠올랐다. 자신의 위안, 자신의 과오. 따지고 보면 그 때 그 신전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가슴 한쪽이 저며 왔다. 데스몬드.

여기까지 걸어오는 모든 과정에서 빌은 아들을, 숀은 연인이었는지 원수였는지 모를 존재를, 레베카는 절친한 친구였던 루시를 잃었다. 마치 가지고 있던 것을 잃기 위한 여행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는 없었다. 그들은 관성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얻는 것보다 빼앗기는 것이 많은 여정이었다. 둘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무심히 쌓인 눈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눈만 좀 덜 와도 상황이 나았을 텐데.”

“그래. 지긋지긋하지.”

숀은 무인도 한 가운데서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데스몬드에 대해 상상했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꿈. 외로이 홀로 서 있는 데스몬드를 바라보는 꿈. 그곳에도 눈이 내린다고 했다. 이 일이 어떻게든 끝나면 데스몬드와 대화를 해야 해. 우리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나름대로 결심하는 숀의 생각을 가로막으며 구식의 무전기가 지직거리는 잡음을 쏟아낸 것은 그때였다.

“ㄹ……지직,……나?”

“……!”

둘은 순간적으로 소스라쳤다. 맨 처음 떠오른 생각들은 은신처가 발각되었다는 것이었다. 잠시 동안 무자비하게 은신처의 문을 따고 들어와 두 사람에게 총을 겨누고 모든 정보를 가져가는 앱스테르고 용병들의 상상이 환영처럼 그려졌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잡음만이 침묵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순간 레베카가 지적했다.

“빌이 들고 나간 무전기!”

두 사람은 쏜살같이 무전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길고 긴 긴장감을 끊어낸 것은 그토록 고대하던 목소리였다.

“레베카? 숀? 거기 있나?”



7.



숀은 온몸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 레베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팔을 있는 힘껏 붙잡는 것으로 함께 꼴사납게 넘어지는 일을 모면했다. 빌은 침착하게 두 사람을 안심시키려 애썼다.

그놈의 폭설이 원흉이었다. 닥쳐오는 불행들 속에서 거의 기적적으로, 빌은 그들의 탈출로를 확보했다. 유일하게 끊기지 않은 옛 다리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은 그의 발을 묶었고, 그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무전을 쓰는 것도 조심스러웠네. 발각될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이미 발각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럼 다음 계획은요?”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는 것. 짐은 모두 챙기지 않아도 좋아. 필요한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나와 합류하면 되네.”

“당신이 있는 곳은 어떻게 찾는데요?”

“만날 곳을 미리 정하지. 피렌체의 카니발에서.”

그것은 그들 사이에 쓰이는 은어였다. 혹시 모를 도청을 방지하기 위한. 피렌체의 카니발은 어딜 가든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마을의 중심 상점가를 의미했다. 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어요. 지금 당장 짐을 챙기면 늦어도 해가 지기 전에 출발할 수 있으니까.”

“내 짐은 챙길 필요 없네. 모두 파기하게. 불을 피워서 던져 넣어. 필요한 것은 전부 내게 있으니까.”

“도대체 언제 챙기신 겁니까?”

“만약을 위해서.”

“빌. 당신 진짜 더럽게 철두철미 하시다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겠지.”

오랜만에 분위기가 나아지고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돌파구.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것은 팀의 전멸, 혹은 또 하나의 탈출기가 될 수 있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 또 다른 ‘어려웠던 무용담’의 사례중 하나로 남는 것. 모두가 바라는 것은 물론 후자였다.

“그럼 이만 끊지. 무전이 길어질수록 좋지 않아. 꼬리가 길수록 밟히는 법이니.”

“옛, 썰.”

뚝. 모든 잡음이 끝나고 정적이 흘렀다. 다만 이전처럼 우울하고 암담한 정적이 아니었다. 약간의 흥분이 두 사람에게 서려 있었다. 레베카는 곧바로 필요한 정보 외의 모든 것들을 파기하기 시작했다.

“숀. 너도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고 있어.”

“네 방에 있는 랩탑도 챙겨둬.”

숀은 순간 당황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데스몬드의 존재가 숀의 머리에 경각을 울렸다. 레베카는 대답이 없는 숀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니.”

딱딱하게 답하며 숀은 방으로 향했다. 혹여나 랩탑이 사라지진 않았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방안에 들어섰을 때, 침대 위에 놔둔 랩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들어 올린 것은 한없이 가벼웠다.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의 무게에 비한다면. 아직도 거기에 있을까? 아마 다시 말을 건대도 답하지 않을지도 몰라.  

숀은 데스몬드와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나가면, 여유가 생긴다면. 자신이 레베카에 대해 했던 거짓말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어야 할까? 어쩌면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굳이 지금 그와 대화할 필요는 없었다…. 아예 대화를 나중으로 미루면 그만이니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기도 했다. 그러나 의지와는 다르게 손은 랩탑의 전원을 누르고 있었다.

한동안 숀은 자리에 굳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데스몬드를 불러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다시 랩탑의 전원을 끄고 나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부른대도 데스몬드가 답해줄지도 여전히 의문이었다. 숀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느꼈다. 뭐가 그렇게 두렵지, 숀 헤이스팅스?

그가 화가 나서 나와 대화하지 않으려 할까 봐.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을까 봐. 혹은…. 데스몬드가 더는 거기 없을까 봐.

숀은 그의 부재가 두려웠다. 이미 한 번 느꼈던 남자의 부재는 그 자체로 커다란 고통이었다. 저도 모르게 물건을 건네 달라며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일, 그가 썼던 컵을 사용하다 문득 그가 없음을 실감하는 일, 차갑게 식은 침대에서 홀로 눈을 뜨는 일. 그가 생전에 자신을 놀려먹겠답시고 쳐놓은 장난의 잔재를 뒤늦게 발견하는 일.

“…데스몬드.”

실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남자의 이름은 생경했다. 혀가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데스몬드. 데스몬드 마일즈.

‘숀.’

남자가 그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숀은 몸을 푹 수그렸다. 날카로운 것에 찔리는 기분이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바빠서 올 수 없었어.”

숨이 가빠졌다. 숀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잇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만 했다.

“그동안 진척은 봤어?”

‘…숀.’

“무언가 코마에서 벗어날 단서라도?”

‘숀.’

데스몬드가 힘을 주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숀은 잠시 멈칫했다. 레베카에 대해서도 얘기해야해. 들통 나버린 거짓말에 대해서. 그러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침묵을 먼저 깬 쪽은 데스몬드였다.

‘나 다 알고 있어.’

무엇을? 숀은 능청스럽게 받아치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몸이 떨려왔다. 그 한 마디에 숀은 깨달았다. 데스몬드는 알고 있다. 자신이 해왔던 모든 거짓말에 대해서. 그가 감추고 싶어 했던 진실에 대해서.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결국 홀로 알아내고 말았다.

숀의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

‘몬테리지오니 기억해?’

“…거기 지하실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나도.’

이야기는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다 알고 있다’고 운을 띄운 데스몬드는 뜬금없게도 예전 일들을 줄줄이 꺼내놓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너는 그때부터 좀 재수가 없었어. 앱스테르고 녀석들이 첫 은신처에 쳐들어와서 나와 루시가 다 때려잡았을 때는? 그렇게 꺼내진 말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두 사람이 함께 보냈던 모든 시간에 관한 물음이었다.

‘내가 그때 알테어 석상에게-.’

“그 말도 안 되는 농담 따먹기 헛소리 말이야?”

숀은 메마른 목소리로 킬킬거렸다.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때로는 가슴 아픈 일에 대해서도 얘기해야했다. 루시. 그녀가 죽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 조촐했어. 그녀는 아직도 거기에 묻혀있어. 네 녀석은 보지 못했지만.

숀의 머리 한쪽이 말했다. 너는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 당장 짐을 챙기고 필요한 자료를 모아서 빌에게 합류해야 한다고. 그러나 흘러나오는 데스몬드의 목소리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숀은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던 사람이 우물을 만난 듯이 데스몬드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이윽고 이야기는 가장 아픈 부분에 도달했다.

‘…나의 죽음을 기억해?’

숀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당연히 기억해. 네가 냉정하게 뒤돌아서 가던 것. 빌의 제안을 거절하던 것. 선택권은 없다고 못을 박던 일마저. 그 시리고 적막한 공간에 너만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일도 기억해. 눈가에 열이 오르고 목구멍이 세게 조여 왔다. 깔깔한 모래를 한 줌 삼킨 듯이.

‘숀.’

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욕설이 쏟아져 나올 것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데스몬드.

‘나는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

정확히는 ‘진짜’ 데스몬드가 후회하지 않은 것이지만. 데스몬드는 덧붙이려 했지만 숀의 짜증이 가득 담긴 말이 그것을 막았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날 때부터 메시아로 태어나신 남자가 뭘 후회하겠어? 세상도 구해내셨는데.”

‘…숀.’

“네 인생을 좀 봐. 얼마나 전형적인 영웅 신화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나 놓고는, 모든 책임을 버리고 도망갔었잖아. 그러더니 멍청하게 저쪽에 붙잡혔다가 다시 이쪽 편에 되돌려졌지. 그 뒤에 갑작스럽게 짠! 나는 역시 세상을 구해야겠어!”

‘내가 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 적은 없어.’

“그렇다면 왜 그때 그런 거야?”

‘그건 내 선택이었어, 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

“아주 잘 나셨구만!”

숀은 자신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도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바깥에 있는 레베카가 만약 들어와서 이 광경을 보게 된다면. 그러나 당장은 들키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숀 자신의 감정이 훨씬 중요했다. 언제나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있어?”

뱉어놓고 숀은 잠시 후회했다. 모두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자신을 마치 실연당한 비극적인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숀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네가 결정하던 그 순간에 나는 염두에 있었어?

숀은 데스몬드가 자신의 연인이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 데스몬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 연인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고, 오히려 원수라는 말이라면 아주 딱 들어맞았다. 둘은 단지 견디기 힘든 날에 종종 온기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숀은 그때 나누었던 온기들만으로도 자신이 이것을 물을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며 요동쳤다. 숀은 대답을 듣고 싶었다. 동시에 대답을 듣는 것이 무서웠다.

‘숀.’

데스몬드의 목소리는 그 와중에도 차분했다. 생전의 그를 생각하면 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지금쯤 숀에게 대들고 소리를 치는 편이 훨씬 어울렸다. 죽음이 그의 성격까지 바꿔놓은 걸까? 아니면 그가 자신이 만들어낸 데이터 유령이어서일까. 어느 쪽이건 최악이었다. 동시에 그 생각 자체가 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흩어졌다. 가슴 속에 누군가가 사금파리를 뿌려둔 것만 같았다. 숀은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밟으며 피를 흘렸다. 다음 순간 데스몬드가 천천히 말했다.

‘미안해.’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끅끅거리는 소리가 온몸을 울리고 다문 입 사이로 흘렀다. 그 말은 데스몬드에게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나아지질 않았다. 오히려 그 한마디가 숀의 가슴에 비수를 박았다.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고작 그 말 하나를 듣기 위해 나는 너를 다시 데려왔는데. 미안해. 혼자 둬서 미안해. 너를 남겨두고 가버려서 미안해.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은 자신이 그에게 해주어야 하는 말이었다. 미안해. 몇 번을 망설이다 건네지 못했던 말. 미안해. 너에게 다시 겪게 해서 미안해. 너의 죽음을 깨닫게 해서 미안해. 다른 모든 것들도. 숨죽인 울음이 그치지 않고 흘러나왔다. 데스몬드는 그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데스몬드는 울고 있는 숀에 대해 상상했다. 그의 눈으로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모습. 들썩이는 어깨와 일그러진 얼굴. 다른 때였다면 데스몬드는 그를 놀려댔을 것이다. 하지만 데스몬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소리가 한순간에 뚝 멎었다. 데스몬드는 다시 말을 골랐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

숀의 침묵을 느끼며 데스몬드는 애니머스 섬을 둘러보았다. 잔잔한 물결과 하얗게 부서지는 빛무리.

‘너와 함께한 시간도 그래.’

“지금이라도 다시 그럴 수 있어.”

숀이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네가 원한다는 게 전제 조건으로 붙지만 말이야.”

‘숀.’

데스몬드는 숀의 말을 이해했다. 숀은 계속해서 여기 있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제나 짜증을 내던 숀, 사람의 화를 돋우던 숀이. 지금 전혀 그답지 않게 부탁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싸우고 언성을 높이고 자신과 대치하면서, 있는 힘껏 여기에 존재해달라고.

‘…숀, 잊지 마. 나는 진짜 데스몬드가 아니야. 그의 기억의 집합체일 뿐이지.’

그 말은 숀과 데스몬드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스몬드는 말해야만 했다. 그를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

숀은 말이 없었다. 그가 화를 낼까? 아니면 소리를 지를까? 아니면 또다시 눈물을 흘릴까? 데스몬드는 궁금했다. 무거운 정적이 덮쳐왔다. 숀이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숨을 고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너는….”

“안 돼!”

비명처럼 들려온 목소리에 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데스몬드도 마찬가지였다.

‘레베카?’

데스몬드의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뒤로하고 숀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잠시 잊고 있던 비상사태가 떠올랐다. 머릿속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방의 문을 세차게 열자 등을 돌린 채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레베카가 보였다.

“레베카!”

“숀.”

레베카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한 편으로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숀은 덩달아 당황하며 레베카에게 다가갔다. 레베카가 붙들고 있는 노트북의 화면에서 붉은빛이 몇 번 깜빡였다. 레베카가 참담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시간이 없어.”

숀은 굳은 표정으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간밤에 안간힘을 써서 막아냈던 공격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곳곳에서 그들의 보안망이 무너져 내렸다. 이대로라면.

“…우리 위치가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군.”

“숀, 자료를 챙겨서 빌에게 합류해.”

“뭐?”

“나는 여기 남을게.”

“무슨 소리야?!”

숀은 경악한 표정으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단호했다. 그가 봐온 모습 중에 가장 확고한 태도였다.

“누군가는 남아서 시간을 끌어야만 해. 이대로라면 둘이 함께 공멸하고 말 거야.”

레베카가 챙겨뒀던 짐을 다시 풀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우리 둘 중 하나는 살아남아서 빌에게 가야 해. 네가 가, 숀.”

그리고 데스몬드는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

숀은 레베카의 말을 ‘웃기지 말라’는 한 마디로 일축해버리고는 자리에 주저앉아 컴퓨터의 전원들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레베카 못지않게 그의 고집도 황소고집이었다. 소모적인 말다툼 끝에 레베카는 고개를 저으며 숀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보안망은 차례로 무너졌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저지선에서 버티고 있는 셈이었다. 공격은 한순간 세차게 치고 들어왔다가 스리슬쩍 빠지기를 반복했다. 둘은 다시금 전력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상대가 이미 어느 정도 침투해 있는 상황에서는 그마저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일일이 거짓 좌표와 거짓 정보를 끊임없이 생성해내서 상대방에게 던져주는 원초적인 작전이 반복되었다.

빌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점점 늦춰지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버린 지도 몇 시간이 흘렀다. 빌에게 연락을 해야 할까? 그러나 이제는 무전마저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빌도 마찬가지였는지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다. 아마 그는 나름의 끈기를 가지고 그 자리에서 레베카와 숀을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레베카는 몇 번이고 다시금 숀에게 떠날 것을 강권하고, 숀은 거부했다. 숀은 오히려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네가 날 두고 가. 레베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숀.”

“나는 진심이야.”

숀이 무표정한 얼굴로 반복했다. 나는 진심이야. 그러니 갈 거면 네가 가. 그 말은 사실이었다. 숀은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었다. 그는 데스몬드에 관한 일을 그녀에게 밝힐 생각까지 했다. 그 일에 대해 이번에야말로 고해하고, 자신의 랩탑을 레베카에게 맡긴다면. 그런다면. 최소한 숀에게 있어 이것은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아니면 이대로 레베카만 보내고 데스몬드와 함께 죽는 것도 괜찮겠지. 비뚤어진 생각이 뇌리를 날름거리며 훑고 지나갔다. 이어지려던 고해는 레베카에 의해 끊겼다.

“이래서는 도돌이표잖아.”

“잘 알고 있었네. 알면서도 계속 똑같은 노래를 부른 거야?”

“숀!”

“너는 이미 나를 한 번 구했어. 레베카. 두 번은 공정하지 못하지. 그러니까 이런 의미 없는 싸움은 적당히 하자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바람이 창밖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다. 한 차례 산발적인 공격이 다시 이어졌다. 숀은 그것을 막아내며 실없는 농담을 지껄였고 레베카는 침묵했다. 공격은 새벽이 다 된 시간에야 멎었다. 다음 공격이 언제 들어올지는 둘 다 알 수 없었다.

“혹시 모르니까 물건들은 다 내오는 게 좋겠어.”

레베카가 말했고 그제야 숀은 방 안에 두고 온 데스몬드에게 생각이 미쳤다. 공격을 막아내느라 그를 또 말없이 두고 나오고 말았다. 혀를 차며 머리를 긁는 숀에게 레베카가 말했다.

“나는 잠깐 밖을 살펴보고 올게. 적어도 감시자가 붙었는지, 둘 중 하나가 도망갈 퇴로가 아직 무사한지는 봐야 하니까.”

마지막 말에 숀이 또 그 소리냐는 듯 레베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레베카 또한 지지 않고 마주 보는 것으로 응수해왔다. 숀은 막대한 피로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다녀와. 언제 다시 공격이 시작될지 알 수 없으니까.”

레베카가 나간 직후에 숀은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나갔을 때 그대로였다. 랩탑 배터리가 약간 모자란 것을 제외한다면. 급하게 충전용 전원을 넣으면서 숀은 물었다.

“데스몬드. 아직 있어?”

‘응.’

빠르게 돌아오는 답이 안도감을 주었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는 상황인지라 숀은 빠르게 말하려 했다. 데스몬드. 지금 사태가 좋지 않아. 그러나 숀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데스몬드가 치고 나왔다. 마치 기습공격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내가 남을게.’


*

공기가 한 남자가 만들어낸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분노로 까맣게 물들었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릴 들은 거지?

“뭐?”

‘숀. 나는 남을 수 있어. 심지어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교란하는 일이라면 나만 한 적임자도 없어. 잊었어? 난 데이터 유령이라고.’

“개소리하지 마.”

숀이 악문 잇새로 낮게 말했다. 그러나 데스몬드는 굴하지 않았다.

‘이건 절호의 기회야.’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지.”

‘숀. 너답게, 냉정하게 생각해 봐. 이건 너와 레베카, 아버지를 모두 구하는 길이라고.’

“…….”

‘나야말로 남아야 하는 사람이야. 나를 은신처의 모든 네트워크에 연결해줘.’

“닥쳐!”

외마디 비명처럼 갈라져 나온 한마디가 데스몬드의 말을 잘랐다.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방 안에 진동했다. 데스몬드는 레베카가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금방 돌아오기는 하겠지만.

‘진정해. 성질 나쁜 너드 양반. 내 말이 맞다는 걸 너도 알잖아.’

데스몬드는 차분히 덧붙였다. 지금 하려는 말이 숀에게 다시 줄 상처는 아마 자신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란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잊지 마. 나는 진짜가….’

“네가 진짜 데스몬드가 아니라고? 아니. 너는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데스몬드 마일즈야.”

데스몬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숀은 단호히 부정했다. 뱉어지는 말에서 분노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슬픔으로도 느껴졌다. 숀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다리가 떨려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또다시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생각을 할 리가 없지.”

닥쳐오는 정적. 데스몬드는 그 순간 숀의 분노를 이해했다. 동시에 그에게 감사했다. 숀은 자신을 데스몬드 마일즈라고 말해주었다. 그것은 그 누구의 말보다도 가장 강력한 확신을 주는 말이었다. 루시의 죽음 직후 갇혀있었던 애니머스 섬에서 자신을 찾아 나섰던 때와도 같은 확신이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 내 이름은 데스몬드 마일즈. 나는 암살자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데스몬드는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이들은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었고 세상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이미 죽어버린 자신보다도 더욱.

‘난 아버지와 레베카, 그리고 너를 죽게 할 순 없어.’

“…우리를 죽게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죽게 하겠다는 이야기군.”

‘숀.’

“나에게 너를 다시 한 번 잃으라는 거잖아.”

‘…….’

“너는 늘 그랬어. 잘나신 구세주 나으리. 그리곤 네 선택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지. 나는 데스몬드 마일즈야. 암살단의 마지막 희망이지. 내가 고르는 길은 언제나 맞는 길이야. 스스로가 참 자랑스러우시겠어.”

말끝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 나왔지만 숀은 멈추고 싶지 않았다.

“너는 그냥 그 순간에 네 목숨을 끝장내버렸어. 그래. 그렇게 해서 멸망은 오지 않았고 세상은 지켜졌지.”

쏟아져 나오는 감정들을 막지 않은 채로 말이 이어졌다. 머리가 뜨거웠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했잖아. 그냥 해 본 말이었어? 분위기상 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렇지 않아, 숀.’

“그러면 도대체 뭔데? 이제 와서 이런 개소리를 나한테 늘어놓는 이유가 뭐야?”

‘숀.’

“그러지 마. 데스몬드.”

그것은 숀에게서 나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내게 다시 너를 잃게 하지 마.”

‘숀. 나는 그 말을 네게 그대로 돌려줄 거야.’

데스몬드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물기를 느꼈다. 이번엔 내가 통곡할 차례인가? 아니지.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

‘네가 만약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너는 나에게 널 잃게 만드는 거야. 내가 네게 했던 짓을 나에게 똑같이 할 셈이야? 알량한 복수심으로?’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숀. 알아. 네가 나에게 화가 난 것, 우리가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던 것, 함께 울고 웃고 떠들고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조차 사라져버린 것.’

“그건 앞으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거야.”

‘아니. 우리는 지금 해야 해. 그때 하지 못한 인사를. 앞으로가 아닌 지금.’

“데스몬드-.”

‘숀. 나는 원래 지금 여기 있어선 안 돼. 그게 나를 고통스럽게 해. 적어도 나에게 안식할 권리를 줄 수는 있잖아.’

“네가 나를 고통스럽게 한 건 생각 안 하고?”

숀은 정말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데스몬드는 느낄 수 있었다. 숀의 말끝에 서서히 체념이 녹아들고 있었다. 데스몬드는 숀에게 강한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숀도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쨌건 그를 여기에 만들어놓은 것,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숀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끝내는 이 또한 숀이어야만 했다.

‘레베카와 함께 아버지에게 합류해줘. 네가 여기서 죽는다면 내가 세계를 구한 의미가 없어. 내 죽음을 그렇게 만들어선 안 돼.’

데스몬드는 숀의 떨림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숀이 무어라 더 악다구니를 쓰기 전에 반드시 말해야만 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이야…. 그리고.’

해야 했을 말. 미리 하지 못했던 말들이 수도 없이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에 나누지 못한 인사들. 그중에서 강렬하게 떠오르는 한 마디만이 흘러나왔다.

‘고마웠어.’

진심으로 고마웠노라고. 지금도 네가 밉지만 그만큼 고맙다고. 암살자의 길을 걸어오는 짧은 시간 동안, 너와 다른 사람들로 인해 견딜 수 있었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숀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데스몬드는 조용히 웃었다.


*

숀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레베카는 당황스러운 눈치로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나를 못 믿어?”

잠깐 밖에 다녀온 사이에 숀은 몇 배나 수척해진 얼굴로 자신의 랩탑을 은신처의 통신망 전체에 연결하고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물어보자 덤덤한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둘 다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어.

“하지만 어떻게….”

“랩탑에 자가 증식 바이러스를 복제해둔 걸 잊고 있었어.”

“바이러스? 숀. 네가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있단 얘기 한 번도 한 적 없잖아.”

“그렇다고 내가 그걸 아예 쓰지 않았던 것도 아니잖아. 의심을 거두라고, 여왕님. 희소식이야.”

이 녀석이 여기서 무한으로 거짓 좌표를 뽑아내는 동안 우리는 시간을 벌 수 있어. 숀의 목소리가 너무도 메말라 있었기에 레베카는 덜컥 겁이 났다. 숀. 너는 정말 괜찮은 거야? 물음에 답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레베카는 숀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무언가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선택한 것은 조용히 숀의 등 위에 손을 올려놓는 일이었다.

평소 같으면 징그럽다며 쳐냈을 남자가 말없이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레베카는 한동안 조용히 숀의 등에 손을 올려둔 채로 두었다. 숀이 바쁘게 다시 움직이며 어서 짐을 챙기라고 재촉할 때까지. 진짜로 둘이 같이 가는 거지? 다시 한 번 묻는 말에 숀이 지겹지도 않으냐며 손사래를 쳤다. 레베카는 혹여 숀이 자신만 보내고 홀로 남으려고 할까 봐 끝까지 감시의 눈을 거두지 못했다. 그 시선에 숀은 자기가 먼저 짐을 챙기고 문을 열었다.

“다 됐어. 가자고, 의심 많은 아가씨. 여기서 나가서 빌하고 합류한 뒤에 우릴 이렇게 만든 망할 놈들한테 복수하는 거야.”

“알았어.”

레베카는 숀의 뒤를 따라나섰다. 숀이 앞서 나가며 재촉해왔다. 빨리 와. 갈 길이 멀잖아. 그녀가 문을 닫으려는 순간에 환청처럼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잘 가.’

레베카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의 목소리. 그러나 뒤돌아보려던 몸짓은 숀이 부르는 소리에 멈춰졌다. 숀이 맞았다. 날은 저물었고 그들이 갈 길은 아직도 한참이었다. 레베카는 들고 있던 물건들을 추슬러 급하게 숀의 뒤를 따라 달렸다.


*

또다시 눈이 내렸다. 세상을 덮어버릴 기세로 내리는 지긋지긋한 눈이었다.

눈발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며 춤을 추었다. 차가운 입자들이 하늘에 회색 흔적을 남기며 땅을 향해 추락했다. 빌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에게 연신 사과하며 사정을 설명했다. 빌은 그 정도는 예상했다며 오히려 무사히 와줘서 기쁘다고 말했다.

그들은 서둘러 옛 다리를 건넜다. 오래 방치된 구식의 흔들다리는 말 그대로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세 사람의 하중을 간신히 견뎌냈다. 빌은 모두가 건넌 직후 지니고 있던 휴대용 칼로 확인사살 하듯 다리를 끊어냈다. 일행은 동이 트기 전까지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걸었다.

우여곡절 끝에 급하게 시도한 히치하이크가 성공했다. 일행은 지나가던 농장 트럭의 화물칸에 올라탔다. 친절한 운전 기사는 그들에게 담요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비록 낡은 데다 소똥 냄새가 풍기는 것이었지만 추위를 막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트럭은 계속해서 덜컹거렸다.

어쨌건 또 하나 해냈네. 레베카는 작게 웃었다. 다음 은신처에 도착하면, 우리는 또다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애써야 해. 그렇게 말하며 숀을 다독이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그랬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숀은 계속해서 세상을 구하려 애쓸 것이었다. 숀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이 세계는 데스몬드가 목숨을 구해 지켜낸 것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남겨준 세상이었다. 그의 유일한 유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레베카와 빌의 목소리를 들으며 숀은 눈을 감았다. 상상 속의 무인도에 데스몬드가 서 있었다. 그가 눈을 맞고 있었다. 하얀 빛깔의 결정 하나하나가 남자를 뒤덮었다.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막을 수가 없었다. 데스몬드. 자신은 차마 마지막까지 할 수 없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숀의 상상 속에서 데스몬드는 계속해서 눈을 맞았다. 서럽도록 시리고 하얀 눈이었다. 온 섬이 눈 아래 잠들 때까지 데스몬드는 홀로 서 있었다. 숀? 옆에서 말을 거는 레베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피로 끝에 수마가 덮쳐오고 있었다. 한동안 자게 내버려두지. 너도 좀 자두도록 해, 레베카. 이어지는 빌의 목소리는 마치 동굴 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울렸다.

잠들기 전에 숀은 데스몬드가 자신에게 뒤돌아 웃어주는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어둠이 몰려왔다.


*

데스몬드는 그때 눈이 내리는 애니머스 섬에 서 있었다.

섬의 하늘이 붉어졌다 까매지기를 반복하며 일렁이고 있었다. 데스몬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상대는 이곳의 위치를 추적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네트워크를 파괴하려 들고 있었다. 데스몬드는 누군지 모를 상대를 조롱하며 웃었다. 이를 어째. 허탕이야. 여긴 이제 아무도 없어. 오직 나만이 있지. 네가 없애봤자 무의미한 존재. 섬은 계속해서 출렁거렸다.

이런 상황인데도 데스몬드의 마음은 놀랍게도 후련했다. 그 어떤 미련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데스몬드는 클레이가 자신을 떠밀던 순간을 떠올렸다. 멍청아, 너를 구해주려는 거야. 가! 클레이가 그랬듯이 데스몬드는 숀의 등을 떠밀었다. 결과적으로 그를 두 번씩이나 홀로 남겨두게 된 셈이었다.

아니, 숀은 혼자가 아니었다. 최소한 그의 곁에는 아버지와 레베카가 있었다. 그를 지탱해줄 사람들이. 잠시 동안 아버지에게라도 말을 걸어볼까 싶었지만, 그 생각은 금세 사라져 갔다. 이편이 옳았다. 최소한 자신은 또다시 세계를 구했다. 저번에 구한 것이 인류 전체로 구성된 세계였다면, 이번에 지켜낸 것은 자신을 구성해온 세계였다. 자신의 주변을 이루어주었던 세계, 동시에 자신이 어느 것보다도 가장 지키고 싶었던 세계.

마지막 남은 일말의 아쉬움은 숀의 손을 잡아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체온을 나누고, 서로의 온기를 맞대지 못했던 것. 그래도 최소한 인사는 건넬 수 있었다. 적어도 숀은 더는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일로 상처받지는 않을 터였다.

곧게 뻗어있던 검고 차가운 사각형의 암석들이 하나둘 무너지며 바다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끝인가 봐. 홀로 중얼거리는 데스몬드의 위로 계속해서 눈이 쏟아졌다.

데스몬드는 눈밭에 서 있는 숀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나 얄미운 소리만 하던 입에서 새는 하얀 입김이 그려졌다. 광대한 눈밭에 우뚝 서 있는 숀에 대하여. 늘 회의적인 태도와는 다르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믿는 사람. 자신이 믿었던 사람. 미안했던 사람. 고마웠던 사람.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

섬이 무너지는 순간 데스몬드는 약하게 웃었다. 안식의 끝에서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 섬은 마치 누군가가 찌그려놓은 캔처럼 짓눌리고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파도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내리던 눈발이 점점 굵어지더니 눈보라가 되었다. 꺼지기 전의 촛불 같은 맹렬한 움직임이었다.

곧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내리던 눈이 그치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송이가 춤을 추며 덜커덩거리는 농장 트럭 위로 떨어졌다. 그 안에 그들이 타고 있었다. 트럭은 덜덜거리며 주의 경계선을 향해 달리더니 이윽고 새로운 주를 향해 나아갔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길가에 부서졌다. 트럭 위에 떨어진 눈송이는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여있더니 곧 녹기 시작했다.

폭설은 끝날 것이었다.

그 후(After that time)(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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