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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크 백업_[알테어말릭]어크 전력 60분, 암살검



툭. 방울져 떨어지는 액체의 소리가 유독 귀에 거슬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 투두두둑, 하고 또다시 바닥을 때리는 마찰음이 났다. 물 같은 것이 떨어져서 나는 가볍고 찰싹이는 소리가 아니라, 점성이 있는 것 특유의 진득한 무게감이 있는 소리였다. 가볍게 손을 떨며 말릭은 눈을 감았다. 지금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부러진 암살검의 날 선 선단을 쥐고 있던 자신의 손에서 흘러 떨어진 것인지, 혹은 자신이 검을 박아 넣은 상대의 복부에서 떨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자신의 손과 팔을 타고 흘러 떨어지는 것의 끈덕진 감촉과 특유의 역한 비린내, 그리고 얼굴에 흐르는 땀이 느껴졌다.

말릭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떨어지는 핏방울이 만들어내는 소음과 자기 자신의 맥이 뛰는 소리, 간헐적으로 내뱉어지는 고르지 않은 숨소리 외에는 공허의 메아리만이 장소를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도시의 외곽, 평소에도 인적이 뜸한 길목이었다. 지금은 지나다니는 사람마저 없어 텁텁한 먼지 바람만이 불었다.

지금 나는 지부로 돌아갈 수 있는 상태인가? 크게 다친 곳은 없어. 하지만 아직 미행이 붙어있다면 지부와 형제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꼴이겠지.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으며 말릭은 천천히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았다. 땅을 울리는 금속음이 핏방울 소리와 섞여 귓전을 울렸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어깨에 무거운 머리를 기대고 죽어있는 적을 넘어뜨리며 말릭은 다시 눈을 떴다.

폐부가 아플 정도로 크게 공기를 들이마시고 눈에 힘을 주어 앞을 바라보았다. 바닥에는 자신이 처리한 시체들이 입은 금속 갑옷과 방금 떨어뜨린 암살검의 날이 옅게 스며드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다시금 생각이 이어졌다. 당장은 어디로 갈 것인가. 주변에 또 다른 적들이 있다면 역시 지부로 돌아가는 길은 위험했다. 다른 형제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도와주러 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과연 이곳을 찾아내 줄지도 의문이었다.

지부에 들어온 정보는 진짜였다. 알테어가 알 무알림을 죽이면서 그 세력을 감추고 숨을 죽였던 템플러들이, 무슨 속셈인지 예루살렘 근처를 얼쩡거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마치 간을 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것을 알아보러 갔던 어린 노비스가 주검으로 돌아왔다. 죽은 노비스는 카다르의 또래였다. 그의 몸에 남겨진 상처를 본 말릭은 일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는지는 몰라도 전문가의 솜씨였다. 그것도 고문에 특화된. 뼈가 부서지고 몸이 잘려나간 노비스는 아마 최후까지 고통 속에서 울부짖다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착잡한 기운이 마음을 훑었고, 점점 어려워져 가는 상황을 보던 말릭은 지부장으로서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의 신체에 있는 결함은 일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었으나,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려해서 내린 판단이었다. 알 무알림의 편에 섰던 배신자들을 축출하고 뿌리깊이 남은 상처를 정리하느라 어수선한 예루살렘에는 말릭을 따라올 만큼의 경험자가 없었다.

말릭은 고민 끝에 알테어에게 편지를 썼다. 마시아프를 수습하느라 자신 못지 않게 바쁠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비록 그 요청이 직접 와달라는 것이 아닌, 다른 지부에 연락해서 지원을 부탁해달라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러 번의 재고 끝에 말릭은 홀로 움직이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다른 지부에 있는 숙련자 몇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나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다른 지부를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재량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마시아프의 권좌를 무겁게 짊어진-그에게는 권좌에 ‘앉는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에게 있었다.

그 뒤 말릭은 오랜만에 자신의 암살검을 꺼내 들었다. 자신의 왼팔을 잃게 한 마지막 임무에서 그가 쓰던 암살검 또한 치명적인 결함을 입었다. 날의 접합부가 끊임없이 덜걱거렸다. 사실상 본래 용도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릭은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 쓰임을 잃고 바래버린 검이 마치 지금 자신의 신세 같아서, 말릭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찌 되었건 나서기 전에 고쳐놓기는 해야 했다. 만에 하나 전투가 벌어지면 금세 망가지고 말 테니까. 말릭에게 그것을 고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인적 없는 길목이어도 대낮에, 암살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리에서라. 마음들이 아주 급했군.”

작게 속삭이며 말릭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오른손을 살짝 쥐었다 폈다. 아직도 왈칵 거리며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말릭은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전, 마지막으로 작전의 동선을 살펴보고 싶었다. 비록 어리숙한 노비스들이 대부분일지라도 예루살렘은 아직 암살자들의 시선 하에 있었고, 자신의 보살핌 아래 놓여있었다. 아마도 그 생각 자체가 안일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말릭은 생각했다. 습격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말릭은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당했다. 이유도 모르게 마음이 이끌리는 바람에 들고 나온 고장 난 암살검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검은 의외로 오래 버텨주었다. 결국, 치열한 격전 끝에 어디선가 날아온 검날에 부러져버리긴 했지만, 최소한 마지막까지는 그 쓸모를 다해준 것이다.

말릭은 그것이 못내 찡했다. 검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마지막까지 견뎌내었다. 오래간만에 겪은 격투는 심장을 요동치게 하고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적의 숫자는 예상보다 많았다. 말릭은 어쩌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나약함으로 형제단의 이름을 더럽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습격한 적들 사이에서 굳건히 살아남았고, 마지막까지 서 있는 단 한 사람이 되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다리 때문에 말릭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벌어진 일에 대해 생각하느라 뒤늦게 찾아온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마침내 살아남았다는 그 느낌이, 자신은 아직 쓸모있는 존재라는 단상이 말릭을 뒤흔들었다.

그 일, 자신의 신체에 치명적인 결함을 남긴 그 마지막 임무가 있고 나서, 예루살렘의 지부장이 되고 겪은 증오와 미움과 혐오와 화해 끝에도 말릭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없었다. 자신은 검으로 쓰여야했다. 적의 목을 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수호하는 검. 그러나 자신은 아무것도 구할 수 없었으며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생각, 이미 부러져서 쓰임이 없는 검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말릭은, 동강 난 검도 마지막까지 그 본분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정신을 더욱 똑바로 차리기 위해 말릭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순간 단 한 사람의 이름이, 그를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암살검과 같은 신세로 만들었던 사람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렇게나 그를 증오했었는데,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되면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래도 나는 견뎌내었어. 나는 마냥 쓸모없는 존재는 아니었던 모양이네.

“알테어.”

속삭이는 이름 끝에 걸리는 감정이 있었다. 자신이 지금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감정. 말릭은 그것을 억지로 삼켜내고 고개를 들었다. 시선의 끝에 언뜻 와 닿는 존재가 있었다. 그를 확인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큰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다른 숙련자들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와주길 바라는 마음이 아예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도 마시아프의 상황을 알고 있는 만큼 기대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익숙한 인영을 보고 느끼는 안도감은 말릭 자신도 놀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나는 어쩌면 자네가 오리란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문장이 끝을 맺자마자 인영은 더 가까이, 말릭에게 닿을 정도로 다가와 있었다. 남자가 다음 순간 그가 지닌 깊은 갈색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을 때, 말릭은 자신이 설명할 길 없는 경건함 속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했다.

말릭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내 사려 깊은 손놀림으로 다친 말릭의 손을 감싸 쥔 남자의 거친 손마디를 보며, 말릭은 이 남자에게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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